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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교육은 빈곤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코로나19 사태는 교육 분야에도 여러 과제를 남겼지만, 《오늘의 교육》에서는 그중에서도 빈곤의 문제를 교육 담론의 장으로 끌어냈다는 데 주목하려고 한다. 재난 상황에서 교육의 공간이 학교에서 가정으로 옮겨 가면서 은폐되었던 가난이 다시 호출된 것이다.
채효정은 언젠가부터 교육 담론에서 ‘빈곤’ 문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혁신 교육, 미래 교육, 창의 인재 교육 등이 차지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가난’이 교육의 영역이 아닌 복지의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당사자들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만들었음을 비판하며 ‘빈자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빈자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정용주는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 빈곤 상태에 있다는 것은 현재의 부진 상태나 부모의 빈곤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부재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빈곤을 경유하지 않고는 불평등의 문제에 접근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학교를 ‘평등하게 있지만 빈곤한’ 공간에서 ‘빈곤하지 않게 평등한’ 공간으로 만드는 실천을 조직해 나가자고 제안한다.
김은지는 보육원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홀로 자립해야만 했던 청년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경제적 빈곤보다 더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던 것은 삶에 비빌 언덕이 되어 줄 어른이 없는 정서적 빈곤이었다는 그의 토로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빈곤 문제의 본질을 꼬집는다.
청소년자립팸 이상한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한낱은 거리 청소년 자립 지원 현장에서 만난 청소년의 빈곤에 대해 이야기한다. 탈가정과 함께 영영 학교로부터도 멀어진 그들은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지워진 존재들이다. 한낱은 가난은 단순히 소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원에 대한 접근 가능성에서부터 시민적 지위를 확보하는 문제까지 삶의 안정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을 일컫는다고 말한다.
빈곤 담론은 이른바 조국 사태를 통해 드러난 교육 불평등 문제와 ‘빌거’ ‘휴거’ 등으로 표상되는 빈곤에 대한 혐오와 차별 문제를 다시금 교육적 의제로 사유하게 만든다. 물론 교육을 통해 빈곤이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채효정의 말처럼, 교육운동이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을 시작할 수 있는 진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안에 가난은 명백히 존재하고 학교는 이를 재생산하는 데 충실히 복무한다.
교육은 ‘빈곤’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 편집부
▶ 《오늘의 교육》 58호는 교육 속의 빈곤, 교육에서 지워진 빈곤에 대해 이야기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수면 위로 드러난 빈곤의 문제를 재조명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지난 호에 이어 코로나19에 대한 학교 현장에서의 고민과 실천들을 전하며, 학교 텃밭과 교육농의 실천이 현재 상황에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도 소개한다. 새로 시작하는 연재,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는 장애인이자 특수 교사인 윤상원이 장애와 특수교육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담았다.
차례
8 바라보다 | 최승훈 기자
10 읽은 이야기
특집 교육은 빈곤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14 가난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워졌나 | 채효정
- 빈자의 교육과 가난한 학교
32 평등하게 있지만 빈곤한 | 정용주
- 비자발적 자발성으로서의 빈곤
45 가난이 지운 ‘나’를 찾기까지 | 김은지
- 보육원에서 유년을 보내고 홀로 청년을 살다
56 ‘끝을 알 수 없다’는 절망에 대하여 | 한낱
- 거리 청소년 자립 지원 현장에서 목격하는 빈곤
연중 기획 ‘공(公)’을 다시 묻다
68 학교의 공공성을 위한 자치 | 황법량
후속 ‘포스트’가 아닌 ‘지금’ 코로나 시대의 교육 ②
78 코로나19 속에 달리는 입시 열차 | 조영선
95 코로나 시대, 노들야학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 천성호
104 코로나19, 학교 수업의 빛과 그늘 | 김인순
기획 교육농, 그리고 전환의 교육학
114 학교 텃밭과 텃논이 미래 교실이다 | 조진희
129 코로나 시대, 왜 학교 텃밭은 빛이 나는가 | 강주희
140 퇴직하고 농사짓겠다는 게 아니라 | 방효신
- 어떤 교사로 살까
153 씨앗이 씨앗에게 전하는 이야기 | 배이슬
- 진안토종생태학교 텃밭 사례
기고
167 ‘교육’이 가난을 차별해 온 뚜렷한 흔적, 형제복지원 | 하금철
179 정의로운 성평등 교육을 이어 가기 위해 | 장병순
- 56호 〈‘성 비위’로 전락한 나의 성평등 수업〉을 읽고
192 “껍데기는 빼고 알맹이만 팝니다” | 양래교
- 제로 웨이스트 샵 알맹상점 창업기
204 베트남 청년을 다시 만나다 | 권현우
- 평화의 ‘초록놀이터’
연재 누구를 위해 ‘특수’교육은 존재하는가
215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장애이더라 | 윤상원
- 연재를 열며
교육 현안 꺼내 보기 ③
227 4세대 나이스NEIS의 등장 | 진냥(이희진)
- 나이스 개편과 정보 인권
1980년대의 청소년들, 너무나 정치적이었던 ④
239 ‘운동에 눈뜬’ 고등학생들의 ‘학생답지 않은’ 생활 | 전누리
- 고등학생운동 참여자들의 개인적인 변화
영화와 아이들
257 ‘세상을 구하는 아이’라는 이미지 | 김종구
- 〈옥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교육 현장 찾기
279 아직 ‘청소년 인문학’은 없다 | 공현 기자
- 청소년의 편에 서는 인문학 강좌, 교육공동체 나다
리뷰
291 나의 싸움이자 너의 싸움이면서 우리의 싸움이었던 그 모든 순간을 떠올리며 | 영실
- 《우리의 목소리를 공부하라》
302 자본의 ‘가치’는 자연의 ‘무가치화’를 통해 만들어진다 | 채효정
-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313 미투 혁명을 완성하는 길 | 목수정
- 《김지은입니다》
321 두 줄 새 책
323 주제가 있는 독서
책 속에서
교육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전면화했던 두 가지 이슈가 있었는데, 자립형 사립고 도입(2010)과 무상 급식 도입(2012)이 그것이다. 빈자의 교육은 전자에선 졌고 후자에선 이겼다. 잘살건 못살건, 모든 학생이 ‘똑같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 평등의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무상 급식 운동에서도 실은 교육 평등보다는 ‘교육 복지’에 더 무게가 실렸다. 정치적 의제를 경제화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통치의 고유한 문법이다.
- 본문 23쪽, 채효정, 〈가난은 학교에서 어떻게 지워졌나〉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짐 크로 법과 같은 기능을 한다. 신분 세습과 상승의 통로로서 기능하면서 동시에 불평등을 재생산하고 있는 가장 큰 영역 중 하나가 교육이기 때문이다. “분리되어 있지만 평등한”이라는 원칙을 교육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짐 크로 법은 생명을 다했지만 한국의 교육은 그렇지 못했다.
- 본문 34쪽, 정용주, 〈평등하게 있지만 빈곤한〉
사실 대학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중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시작됐다. 공부를 썩 잘해 학교 선생님께서 집(보육원)으로 전화를 할 만큼 공부에 열을 내던 언니가 원하는 입시 준비를 할 수 없어(보육원에서 할 수 없다 하여) 눈물을 쏟던 여러 날을 기억한다. 보육원에서는 ‘다른 애들 다 안 가는데 너만 가면 어떡하냐’며 불공평과 형평성 운운하며 만류했다. 그때부터였을까. 언니의 눈물은 대학만이 살길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했고 나 역시 대학엔 갈 수 없는 삶임을 인지하는 순간 패배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살길을 잃은 것이었다.
- 본문 50쪽, 김은지, 〈가난이 지운 ‘나’를 찾기까지〉
정부 재난 지원금을 예로 살펴보자. 지급 단위를 ‘가구(주민등록표상 등재된 세대)’로 설정하고, 〈국민건강보험법〉상 피부양자 개념을 적용했는데, 이러면 청소년 ‘개인’이 지원금을 수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낮아진다. 일단, 미성년자의 경우 보호자의 동의 없이 전입 신고가 어렵다. 더군다나 시설 입소를 택하지 않은 거리 청소년의 경우, 거처가 늘 임시적이기에 새로 전입할 주소 자체가 없기도 하다. 어찌하여 주소지가 달라졌다고 해도 미성년자는 건강보험 분리가 가능하지 않다. 지원금은 세대주가 수령하므로 해당 청소년의 지원금은 그들의 부모(보호자)에게 지급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들이 지원금을 수령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방임하거나 학대했던 부모에게 연락해 자기 몫을 요구하는 것이다.
- 본문 57-58쪽, 한낱, 〈‘끝을 알 수 없다’는 절망에 대하여〉
2000년대 이후 학생 자치는 이른바 대학의 기업화라 불린 조치들에 반대했지만 대학이 왜 학문의 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유익한지 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위기라는 말만 무성했을 뿐 정작 대학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 자치가 지키려 했던 기존의 대학이라는 것도 학문의 공간이라는 틀에 꼭 들어맞지는 않았다. 학생 자치는 존재의 정당성을 묻기보다 당장의 참여를 늘릴 방법에만 주목했고, 그 결과가 축제에 모든 역량과 기대가 쏠리는 질서이다.
- 본문 73쪽, 황법량, 〈학교의 공공성을 위한 자치〉
어떤 학생은 등교 후 다음 날 모의고사를 치르다가 중간에 열이 높아 시험 중단 조치를 받았지만, 자신의 인생이 걸렸다며 결국 구급차를 타지 않고 별도 교실에서 시험을 봤다. 고3이라는 학생의 절박함도 이해가 되지만, 전염병이 창궐해도 입시를 향해 가는 열차가 출발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 본문 83쪽, 조영선, 〈코로나19 속에 달리는 입시 열차〉
바이러스의 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두기를 ‘안전’과 ‘배려’의 이름으로 공식화했다. 단비 같은 하루 등교에도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침묵의 시간을 강요당한다. 공동체의 규칙과 질서를 이참에 제대로 훈련하게 되었다며 반기는 목소리도 들린다. 학교는 여전히 그렇게 딱딱하고 지루하고 어둡다. 하지만 학교의 생활보다도 더 경직된 일상 덕분에 하루짜리 얼어붙은 학교 일과도 환영받는다. 적어도 혼자가 아니다. ‘관계’가 존재한다. 텃밭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그물처럼 이어지고 얽힌다. 나는 교사이기에 텃밭에 나갈 시간을 얻고자, 교과들과 연결 짓는다. 때로는 텍스트와 이어지고 때로는 주제와 잇는다.
- 본문 134쪽, 강주희, 〈코로나 시대, 왜 학교 텃밭은 빛이 나는가〉
형제복지원은 내가 지금껏 겪어 왔고 또 목격했던 가난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원점을 가리키는 지표라는 것을 말이다. 가난한 자기 학생들을 향해 ‘똥통 학교’라는 혐오의 말을 쏟아 냈던 나의 중학교 시절 교사들의 모습은 고아들을 ‘불량 아동’이라 지칭하며 분교에 격리시키려 했던 형제복지원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둘은 모두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가난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동형적이다.
- 본문 178쪽, 하금철, 〈‘교육’이 가난을 차별해 온 뚜렷한 흔적, 형제복지원〉
오랜동안 장애라 명명된 학생들을 배제한 채 설계 및 발전되어 온 학교 구조에 그간 배제된 이들이 끼어드는 순간 이들의 존재로 인해 학교의 구조적 모순은 비로소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그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모순과 갈등은 새로운 배움의 계기가 되며, 배움을 통해 모순이 점차 줄어드는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 그래서 모순과 갈등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 본문 223쪽, 윤상원,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장애이더라〉
한국 사회는 학교가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매우 관대한 편이다. 반면 그 정보를 다루는 것에 대한 민감성은 매우 부족하다. 특히 의사나 변호사, 상담가 등이 직업상 알게 된 사실을 유포할 수 없는 법적 의무를 가지고 있는 반면 교사는 비밀 유지 의무가 없다. 가장 최근에 제정된 충남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도 논란 끝에 결국 교육 행정 기관 및 교직원의 비밀 유지 의무 조항이 삭제된 채로 제정되었다.
- 본문 237쪽, 진냥(이희진), 〈4세대 나이스의 등장〉
인문학은 세계관이고,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도 이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그런 세계관이 우리에게 불리한 세계관은 아닌지 돌아보고, 불리한 세계관을 갖고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가 더 다양한 정보를 통해서 세계관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다. 이건 똑똑해지기 위한 공부도 아니고 대학에 잘 가기 위한 공부도 아니다. 약하다는 이유로 속지 않기 위해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하는 공부이다.
- 본문 285쪽, 공현 기자, 〈아직 ‘청소년 인문학’은 없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싸운 이들이 자책하고 후회하는 장면이었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활동가인 최유경은 페미니스트들이 과격하다는 말을 정작 여학생들로부터 듣게 되었을 때 ‘동의할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는 고립감’을 느꼈고, 결국 ‘학교를 바꾸지 못하고 졸업한 것을 조금 자책했다’고 했다. 학교에서 성소수자인권 동아리를 만들고자 했던 이호는 동아리회장이었던 자신의 자퇴로 인해 그 동아리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과 슬픔을 아주 깊이 이해한다. 나 역시 그런 감정을 느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 말만은 꼭 해 주고 싶다. 당신들이 한 일은 차별과 혐오로 물든 그 단단한 세계에 작은 균열을 내었으며, 그건 ‘실패한’ 것도 ‘자책할’ 일도 아니라고.
- 본문 295-296쪽, 영실, 〈나의 싸움이자 너의 싸움이면서 우리의 싸움이었던 그 모든 순간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