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팔가자 가는 길 (하편)
강 문 석
북한과의 경계인 압록강철교 아래에서 순례자들은 서너 명씩 나뉘어 보트에 올라 북한 땅 가까이 다가갔다. 무너지다 만 녹슨 철제구조물 사이로 뉴스에서 자주 접했던 북한의 황폐한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분명 공장시설 같은데 천장은 없었고 초라한 행색의 젊은이들 몇이 붙어선 모습이 보였다.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저들은 보트에 탄 우리가 남녘 동포라는 걸 알기나 할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보트에서 기념품으로 파는 북한지폐 세트를 구입했지만 그들에게 전할 방법은 없었다.
순례자들은 고려문이 있던 압록강 북쪽의 역사 속 한만국경지역으로 이동하여 봉황산 책문지구에서 차를 내렸다. 우람한 산이 거대한 성처럼 앞을 턱 가로막고 있었다. 막힌 산을 바라보며 루카 박사로부터 책문 역사를 들었다. 책문은 당시엔 고려문으로 불렸고 조선에서 관리가 파견돼 근무했던 별정소가 있었다. 중국으로 가는 조선 외교사절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중국의 관문이었지만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에서 일박한 후 40km를 더 와야 이곳 책문이 나타난다고 했다.
3천 호에 달하는 조선인이 거주했다지만 그 흔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때마침 진해에서 참가하여 혈육 고모를 중국 땅에서 상봉했던 토마스 형제가 피리를 꺼내어 ‘동심초’와 ‘봉선화’를 연주하자 일행은 숙연한 분위기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땅덩어린 드넓어 심양에서 연길까진 항공편을 이용했다. 순례자들은 중국항공 기내의 음료와 식사 서비스 품질에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에서 기내 서비스 일등이란 대한항공을 중국항공이 많이 따라잡았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연길성당은 우리나라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성전엔 주일미사에 참례한 조선족들이 많았다. ‘평화의 인사’ 때 순례자들은 그들과 맞잡은 손을 쉽게 놓질 못했다. 동포를 만난 감동이 그만큼 진했던 것이리라. 강론시간에 레오 신부는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백두산 등정을 앞두고 우리 민족의 일치를 위해 이 미사를 봉헌한다.”고 했다. 성당 마당엔 성당을 짓고 남은 모래자갈이 보였는데 건축공사 빚도 1억이나 남았다고 했다. 가난한 신자들이라 더욱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듯했다.
부산 성베네딕도수도원에서 파견된 수녀는 중국에서의 선교활동 체험담을 비교적 자상하게 소개했다. 중국에선 선교를 위해서 수도복 대신 점퍼를 입고 파마머리로 꾸며야 한다는 것. 하얀 수도복을 입은 여섯 수녀도 성전 맨 앞줄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는데 젊은 수녀들 사이에 허리가 굽은 할머니 수녀도 보였다. 이 수녀들은 선교활동에 나서지 않고 태연하게 미사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신자들의 기도’ 시간엔 적은 쪽지를 들고 마이크 앞에 나와 순례의 은혜에 감사하는 순례자들이 여럿이었다.
대우그룹에서 지었다는 D호텔엔 ‘가톨릭신문사 중국방문단 환영’이란 플래카드가 만찬장 무대에 내걸렸고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은 연변가무단이 공연도 펼쳤다. 우리 독립투사들이 만주 땅을 떠돌던 당시를 그린 노래 ‘선구자’가 바리톤 음색으로 먼저 장내에 울려 퍼졌다. 한복차림으로 이 노래를 부른 조선족 남자가수는 씨름선수처럼 체구가 우람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소프라노가 ‘그리운 금강산’을 끝내자 남녀가 혼성으로 간드러진 중국민요까지 두어 곡 선보였다.
세계 민속노래경연에서 일등으로 뽑힌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공연단이 합창으로 부를 땐 좌중 순례자들 눈가가 약간씩 젖어들기도 했다. 이어 가무단의 부채춤이 화려하게 펼쳐지나 했더니 어느새 음악은 빠른 곡으로 바뀌었다. 그때까지 얌전해 보이던 개량한복 차림의 작달막한 중년의 안젤라 자매가 현란한 트위스트 춤동작을 선보이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안젤라의 종횡무진 무대를 누비는 숙련된 춤동작은 좌석에 앉았던 서너 명을 더 불러내어 ‘샹하이 트위스트’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었다.
사회자는 여기서 분위기를 바꿔 순례자를 모두 무대 앞으로 불러냈다. 그러곤 서로 손을 잡고 원형으로 돌면서 ‘고향의 봄’을 합창케 했다. 노래는 쉽게 일행을 하나로 묶는 힘을 발휘했으나 두고 온 집을 떠올리는지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이어 피날레는 가무단과 순례단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숙연한 분위기에 젖은 탓인지 합창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연변 조선족 사회자는 특유의 엑센트를 섞어 "이렇게 힘없이 불러가지고 통일이 제대로 되겠습네까?"라며 익살을 부렸다.
환영공연이 끝난 자리에서는 연변에 살고 있는 조선족 고모를 만나는 극적인 이벤트도 벌어졌다. 고국에서 성지순례로 찾아온 60대 조카 부부와 반세기 넘어 만난 것이아. 그 장면을 바라보는 참석자들도 가슴이 먹먹한지 가끔씩 고개를 돌렸다. 고모를 동행한 장년의 조카가 우리말을 몰라 지켜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했다. 먹고 살기 위해 만주로 떠났던 혈육은 어느새 아흔에 이르고 있었지만 생존해 있었으니 고국의 조카를 만날 수 있었다. 조카는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라고 했다.
훈춘성당 마당에선 중국인 신자들이 순례자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이곳 순례기념미사엔 조선족 신자들도 꽤나 되었다. 7년 신학대학 과정을 마친 조선족 부제도 미사를 함께 집전했다. 성당은 문화혁명 당시 파괴된 아픈 역사를 지녔지만 그 10여 년 뒤 새로 지어져 오늘에 이른다고 했다. 광복 직후엔 사제와 수도자가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었지만 침묵의 교회가 되기 전까지는 공소만 스무 곳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제 교우 5백 명 남짓한 본당으로 변했는데 그마저도 조선족 신자들이 있어 가능했단다.
훈춘에서 백두산 지역으로 이동하는 차안. 글레멘스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백두산을 무사하게 오르려면 철야기도로 죄를 사해야 한다며 저녁식사 후 호텔 로비로 모이라고 했다. 그러자 교회사연구소 야고보 소장신부가 그를 야단쳤다. “조금 전 미사를 봉헌하여 죄를 모두 사했는데 무슨 소릴 하느냐?” 차안은 조용해졌고 모두들 철야기도는 물 건너 간 줄 알았다. 그랬지만 그날 밤 칠팔 명은 호텔 복도 한구석에 모여 소리 죽여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드디어 백두산을 오르는 날 새벽. 순례자들은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 호텔 식당으로 모였다. 민족의 영산에 오르기 전 민족통일과 북한의 인권회복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였다. 간밤 철야기도를 바친 이들도 미사에 빠지지 않았다. 악천후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백두산을 지프차로 올랐다. 천문봉 오르는 길엔 황톳물이 흘러넘쳤고 인부들이 모래주머니를 쌓느라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을 시도했지만 비바람에 먹혔고 백두산 천지 비경은 아예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초대형 고딕양식 건물인 북경북당성당에선 다음 방문지 미사시간에 쫓겨 마당에서 외관만 둘러보고 나와 곧바로 이승훈이 세례 받은 북경남당성당으로 향했다. 남당성당도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이곳에선 특별히 순례를 끝내는 의미를 담아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미사를 봉헌했다. 성전 제대 벽엔 대형 성모마리아 그림만 붙었고 십자고상은 보이지 않았다. 순례자들은 특별히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을 떠올리며 주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이승훈이 귀국해 천주교 공동체를 설립한 1784년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해였다. 외국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천주교회를 설립한 것은 세계에서 유일한 일이기도 했다. 남당성당 미사가 끝나자 순례자 중 한 자매가 대표로 마이크를 잡고 8일간의 순례체험을 풀어놓았다. 그의 소감은 한마디로 7박8일 여정 전체가 하느님의 축복이었다는 것. 모두들 그의 말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이때 이미 노년에 든 중국인 여자사무장은 소감내용이 궁금했던지 옆 좌석 통역 사제에게 묻기도 했었다.
순례를 마감하면서 사제는 이곳 성물방에서 구입한 묵주에 축성하여 참가자들에게 선물했다. 귀국하느라 공항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평소 말수가 적던 가톨릭신문 레오 사장신부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개신교재단 서울 Y대 철학과를 나온 뒤 다시 신학대학을 진학하여 구교와 신교를 두루 학습한 사제였다. 레오 신부는 의외에도 우리 스스로를 칭찬하는 박수를 치자는 제안을 했다. “먼저 나를 순례에 보내준 가족에게 감사…”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아~!”하는 함성과 함께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자~아, 이러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박수는 치라고 하면 한꺼번에 치세요.”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나 싶더니 “그리고 어~ 본당 신부와 수녀에게 또 성당 교우들에게, 조선족 동포들에게 감사… 마지막으로 순례여정 시작부터 끝까지 비디오 촬영에 애쓴 가롤로에게도 감사…” 이렇게 왁자한 박수가 끝나자 분위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누구도 가롤로에게 비디오 촬영을 요청하지 않았지만 그는 출국하는 김포공항에서 시작하여 순례 전 과정을 캠코더에 담았다.
심지어 순례자들이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공항직원이나 기내 승무원들을 비롯해 순례지의 성직자나 수도자까지도 빠트리지 않았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8일간의 중국 성지순례 비디오 작품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순례자 중엔 한국영화의 중심무대였던 충무로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은퇴한 요셉 영화감독도 있었다. 서울 명동성당 교우인 그는 가롤로가 만든 비디오를 가톨릭회관에서 관람한 후 어찌 그 작은 캠코더 하나로 이렇게 놀라운 작품을 만들 수 있었느냐는 찬사를 보냈다.
순례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카메라에 담겼기에 표정이나 동작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성지순례 비디오테이프는 순례자들 자녀인 신부와 수녀에게도 보낸다며 추가로 물량주문이 늘어나기도 했었다. 신문사가 소재한 대구에선 앙코르 요청이 있어 영상을 한 번 더 틀었고 서울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도 중부지역 순례자들과 가족들을 위해 상영하는 기회를 가졌다.
중국 성지순례를 통해 레오 신부가 일행에게 남긴 메시지는 ‘성체성사의 신비’였다. “우리도 소팔가자 교우들처럼 성체성사가 우리 신앙의 핵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스스로를 희생 제물로 봉헌하고 다시금 부활해 인류구원의 위업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성사를 통해 우리 곁에 실제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끝.
강 문 석
부산대 사회교육원 소설창작과정, 부산교대 사회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국제신문 문예창작교실, 동국대 사회교육원 여행작가과정 수료. <가톨릭신문> 위촉기자, <실버넷뉴스> 사진부 기자, 양산문화원 인터넷 문화관광해설사 역임. 한국문협 부산문협 부산가톨릭문협 회원. 2004《에세이문예》창간호 신인상, 제5회 부산수필문협 우수작품상, 2020년 부산문협《문학도시》소설 등단. 수필집『산으로 남고 싶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