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지 않는 흰 나비
숲이 깊어질수록 빛은 말을 아낀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온 햇살이 군데군데 초록을 밝히고, 그 아래 작은 꽃들이 바람의 방향을 따라 몸을 흔든다. 한참을 걷다가 문득 발걸음이 멈춘다. 어둑한 숲 한쪽에 흰 나비 몇 마리가 내려앉아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나비가 아니다. 해오라비난초다.
참 묘한 꽃이다. 땅에서 피었으면서 하늘을 닮았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매달린 흰 꽃잎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치고 있다. 꽃잎 가장자리는 누군가 아주 가는 가위로 정성껏 오려놓은 것처럼 섬세하다. 한 송이는 날개를 펴고, 또 한 송이는 고개를 살짝 돌린다.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피어 있는 모습이 작은 새들의 군무 같다.
꽃 앞에서는 가끔 이름보다 먼저 마음이 움직인다. 무슨 꽃인지 몰라도 좋고, 어느 계절에 피는지 몰라도 좋다. 그저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래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해오라비난초가 그렇다. 화려한 색도 없고 커다란 꽃송이도 아니지만 한번 눈에 들어오면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순백의 꽃잎이 어둑한 숲을 밝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날아가고 싶은 마음을 닮았기 때문일까.
사람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 살다 보면 문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이름도 사연도 잠시 내려놓고 싶어진다. 해야 할 일과 책임, 익숙한 관계에서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은 날이 있다. 우리는 그 마음을 가슴속에 숨긴 채 또 하루를 살아간다. 해오라비난초를 바라보면 그 마음을 들킨 것 같다.
나도 날고 싶었다. 한때는 멀리 가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했다. 새로운 길을 만나고 낯선 풍경 속에 서면 삶도 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길을 나섰고, 수많은 풍경 앞에 섰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떠날 때마다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오래 걷고 나서야 알게 된다. 자유란 반드시 멀리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디에 있든 자신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것 또한 자유였다.
해오라비난초는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가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흰 날개가 흔들린다. 금방이라도 줄기에서 몸을 떼어 하늘로 오를 것 같다. 그러나 꽃은 제자리에 남는다. 가느다란 줄기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땅을 붙들고 있다. 그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날개와 뿌리. 서로 반대되는 말 같지만 살아가는 데에는 둘 다 필요하다. 날개만 있다면 우리는 어디에도 머물지 못할 것이고, 뿌리만 있다면 한 번도 먼 곳을 꿈꾸지 못할 것이다. 떠날 수 있다는 마음과 돌아갈 곳이 있다는 믿음 사이에서 삶은 조금씩 깊어진다.
젊은 날에는 날개가 중요했다. 얼마나 높이 날 수 있는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가 삶의 크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뿌리의 의미를 알게 된다. 기다려주는 사람, 돌아갈 집, 오래된 친구, 익숙한 골목,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들. 삶을 붙들어주는 것은 대개 화려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꽃도 그렇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흰 날개지만 꽃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그러하다. 세상은 드러나는 것을 기억하지만 한 사람을 지탱하는 힘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견디어낸 시간, 말없이 건넨 위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수고,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섰던 마음. 그런 것들이 뿌리가 되어 오늘의 나를 세워놓는다.
해오라비난초 몇 송이가 바람에 흔들린다. 서로 부딪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각자의 방향으로 피어 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함께 피어 있어 더 아름답지만 어느 한 송이도 다른 꽃을 대신하지 않는다. 사람 사이도 이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한다고 너무 가까이 붙잡지 않고, 아낀다고 상대의 날개를 접게 하지 않는 것. 곁에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하늘 하나쯤 남겨주는 관계.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고, 돌아왔을 때 말없이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 그런 관계라면 오래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람이 조금 세게 분다. 꽃들이 한꺼번에 몸을 기울인다. 순간 정말 흰 나비 떼가 숲에서 날아오르는 것 같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가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문득 살아온 날들이 떠오른다. 나 역시 얼마나 많은 바람을 지나왔을까. 기쁜 바람도 있었고 견디기 힘든 바람도 있었다. 어떤 바람 앞에서는 휘청거렸고, 어떤 날에는 주저앉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강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어딘가에 나를 붙잡아주는 작은 뿌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흔들린다는 것은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다. 나무도 흔들리고 꽃도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바람을 만나지 않은 것뿐이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삶이 아니라 흔들리고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힘인지 모른다. 해오라비난초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손대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떤 것은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고, 어떤 인연은 잠시 스쳐가는 것으로 완성된다.
꽃은 그 자리에서 피고 나는 다시 길을 간다. 뒤돌아보니 흰 꽃들이 여전히 날개를 펼치고 있다. 날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듯.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멀리 날아갈 날개가 아니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도 하늘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인지 모른다. 해오라비난초는 오늘도 땅에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 흰 날개를 펼친다. 그리고 그 작은 꽃 앞에서 나는 비로소 알 것 같다. 잘 살아간다는 것은 날아가는 일이 아니라, 날개를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자리를 오래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