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숲의 알몸들
올해는 대설주의보가 잦았다 회사후소(繪事後素)*로 한 밤내 눈 내린 아침 화계사 청솔숲 작은 암자
한 채로 기울고 있었다 눈빛 흰빛의 음덕이었다 직립이란 없다 서로를 버티게 해주는 이쪽 저쪽의 힘을,
사방 기울기를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내린 눈들의 무게와 흰빛들의 비유가 숲의 알몸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다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로 건너뛰는 청설모의 속도마저 한눈에 가늠할 수 있었다
나무들의 사이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낼 듯 공기들의 살얼음이 팽팽했다 이쪽 청솔이 오른쪽으로 기운 만큼 그만큼만 저쪽 청솔이 왼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런 사방 기울기의 연속무늬를
보았다 오늘 아침은 눈들이 담아 온 하늘 무게만큼 조금씩 더 기울고들 있었다
슬픔의 중량이 어제 오늘 더해졌다 하나 *
* 회사후소(繪事後素)-그림 그리는 일은 그 바탕이 희게 극복된 다음이라야 한다는 뜻의 [논어]一句.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모과 썩다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는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 삽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
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
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
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
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
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
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2]-민음사
* 다시 쓰는 연서(戀書)
사랑이여 그렇지 않았던가 일순 허공을 충만으로 채우는, 경계를 지우는 임계속도(臨界速度)를 우리는 만들지 않았던가 허공의 속살 속으로 우리는 날아오르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 힘이었던가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는 *
* 연애질
새로 연애질이나 한번 시작해 볼까 대패질이 잘 될까
결이 잘 나갈까 시가 잘 나올까 그게 잘 들을까 약발이
잘 설까 지금 '빈 뜨락에 꽃잎은 제 혼자 지고 빈방엔
거문고 한 채 혼자서 걸려 있네'* 그대 동하시거들랑
길 떠나보시게나 이번엔 마름질 한번 제대로 해보세나
입성 한 벌 진솔로 지어보세나 *
* 고시 일절
* 축이법
우리네 젓갈을 한자말로 축이라고 쓴다 그 글자에도 무슨 내력이 있기야 하겠으나,버린 물고기들을 거두어 먹을 수 있도록 한 우리네 조상들의 무슨 가여운 뜻이 거기 숨어 있기야 하겠으나 그 젓갈의 곰삭은,심각한 맛을 지닌 여자(女子)가 하나 내 곁에 있음을,지금 함께하고 있음을 나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심각(深刻)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생선회가 생선 중의 생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인생초단(初段)이다 날것을 날것 자체로 익혔다는 것 그것도 못쓰게 될 것들을 살려냈다는 것 그것도 소금의 쓰라림만으로 익혀냈다는 것 그게 심각(深刻)이다 나는 기쁘다 싱싱한 상처라는 말을 이제 쓸 수도 있겠다 *
* 비누
비누가
나를 씻어준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믿고서 살아왔는데
나도 비누를 씻어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몸 다 닳아져야 가서 닿을 수 있는 곳,
그 아름다운 소모(消耗)를 위해
내가 복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누도 그걸 하고 있다는 걸
그리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내 당도코자 하는 비누의 고향!
그곳의 어디인지는 알 바 아니며
다만
아무도 혼자서는 씻을 수 없다는
돌아갈 수 없다는
나도 누구를 씻어주고 있다는
돌아가게 하고 있다는
이 발견이 이 복무가
이렇게 기쁠 따름이다 눈물이 날 따름이다 *
* 율려집(律呂集) 14 -연꽃들
연꽃들엔 충만의 속도를 화알짝 하늘 햇살로 열어젖히는 당당한 초록 이파리가 있다 마침내 등을 가득 내어 걸었다 방죽을 가득 채웠다 화안해졌다 연전 내가 크게 절망했을 때 전주 덕진공원 연못 가서 새벽 연등 내어걸고 두 번째다 화안해졌다 가득 채우기, 절망의 절망으로 가득 채우기 채우는 속도가 실물로 눈에 보였다 속도의 실물을 처음 보았다 자라 오르는 생물의 속도가 저리 번지듯 빠른 것은 처음 보았다 무얼 멕인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넘치지 않게 가장자리의 끝에서는 속도는 지우는 연꽃들 피었다 내 안에서도 문 열고 나오는 그런 속도가 보였다 장에 가면 보체리 사람들 어쩐 일이냐고 얼굴이 모두 화안해졌다고 연꽃이 피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마을 노인회장집 막내며느리는 쌍둥이를 순산했고 그래, 연꽃들의 野壇法席 , 안산 풀섶에선 없던 반딧불이가 밤새도록 충만의 속도로 함께 반짝였다 어디로 건너가고 있었다 화안해졌다 *
* 모기 친구
진종일 뛰어놀고서도 씻지 않으려 하기에 얼굴엔 온통 암괭이를 그리고서도 말을 듣지 않기에 지난 밤 모기에 물린 자리가 발갛게 부어올랐기에 모기는 깨끗한 것보다는 더러운 걸 더 맛있어한다고 겁을 주었더니, 그럼 모기에겐 깨끗한 것이 더러운 거고 더러운 것이 깨끗한 거네, 모기가 목욕을 해주었잖아! 더러운 걸 먹어버렸잖아! 난 모기 친구가 될 거야 그러곤 여섯 살짜리 내 상욱이는 깔깔깔 달아나버렸다. *
* 미수(未遂) ㅡ알 6
글씨를 모르는 대낮이 마당까지 기어나온 칡덩쿨과 칡순들과 한 그루 목백일홍(木百日紅)의 붉은 꽃잎들과
그들의 혀들과 맨살로 몸 부비고 있다가 글씨를 아는 내가 모자까지 쓰고 거기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한 줄금
소나기로 몸을 가리고 여름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우 빨랐으나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없었다
들킨 건 나였다 이르지 못했다 미수(未遂)에 그쳤다 *
* 한국문학선집[시]-문학과지성사
* 옛날 국수 가게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
* 정진규시집[본색]-천년의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