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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개관
1. 어원 및 연원
실학은 실사구시지학(實事求是之學)의 줄임말로 실제적인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낸다는 뜻이며, 반고가 지은 《한서》
중 경제의 아들 헌왕(獻王) 유덕(劉德)을 평한 “학문을 닦는 데 옛것을 좋아했으며, 일을 참답게 하여 옳음을 구했다.
(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헌왕이 현실적인 학문을 연구 발전시켰으므로 수학호고(修學好古), 실사
구시 한다는 데서 나왔다. 한편 실학에 반해 기존의 유학을 “성명의리지학”이라고도 부른다.
2. 한국 실학의 특징
중국에서 실학으로써 학풍이 세워진 것은 명나라 말기 서구 과학의 전래와 청나라 초기의 고증학풍이 일어나 학문으로
서의 체계를 세웠다. 청조 고증학파 실학은 한족이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 정복된 민족 문화 운동 또는 경전 재정리로
청조 타파와 한족 국가의 재흥을 기도한 민족적 사상과도 합류된다고 볼 수 있다.
청조의 실학파 학자들이 경서 고증에 치중한데 대하여 한국 실학파 학자들은 정치·경제·종교 및 문화 등의 제반 제도를
개선하여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인한 절박한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하자는 데 치중하였다. 즉 한국의 실학은
서구 과학과 청의 농법·농제를 토대로 하는 경세의 학문을 주로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뜻에서 한국의 실학은 한국의 르네상스라 보아야 할 것이다.
실학은 종래의 공리공담이 주로 된 도학과 주자학의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나 실제의 세계에서 온갖 민생문제와 사회
문제를 참다운 이상과 방법으로서 해결하여 다 같이 행복한 생활을 하자는 데 그 뜻이 있으며 이것이 한국 실학의
특징인 동시에 이상이었다.
3. 배경
조선 초기의 유학, 즉 주자학적 도학(道學)이 초기의 참신한 기운을 잃고 케케묵은 이론을 시종하여 실제와는 아주 동
떨어진 학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사실에 입각한 새로운 비판 정신을 불어넣은 것은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고증학과
서양의 과학적 사고방식이었다.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 즉 새로 등장한 실학파들은 비판의 눈을 우선 퇴폐한 사회·
경제·정치로 돌리고 현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와 희망적인 장래를 내다보고자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을 전후한 우리 국내 사정은 지주(地主) 및 관료층의 착취와 이전부터 상공기술(商工技術)에 대한 천대에
겹쳐 조선 후기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3정(三政) 문란은 부패한 사회의 개량을 더욱 촉진케 하여 새로운
생활 타개를 위한 구국구폐운동(救國救弊運動)이 개별적 혹은 체계적인 개혁방안(改革方案)과 사회정책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두 난이 있은 뒤 국민들의 곤란한 생활의 타개책으로 관리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며,
권리의 유지책으로 드디어는 당쟁을 이용하게 됨에 따라 당쟁의 격심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은 임야(林野)에 들어
가 역사와 정치·경제 문제를 연구하였으며 국가 재건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의 사회적인 요구가 절실한데서 비로소 실학
사상이 움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치명적 타격은 비판 정신을 길러 사회생활과 정치의
지도이념으로 되어온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었고, 지행합일주의(知行合一主義)를 주장하였다.
주자학에 대립되는 양명학(陽明學)의 전래에다 청조의 고증학이 영·정조(英·正祖) 때에 하나의 새로운 학풍을 이루어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치국(治國)의 이상을 올바르게 하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정치를 실현하려는
일종의 혁신운동이 그들 사이에 일어났다.
4. 성립
실학파의 비조(鼻祖)는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인데, 그를 계승한 성호 이익(星湖 李瀷)과 더불어 실학의 앞길을 닦아
놓았다.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이익의 《성호사설》은 현실적인 문제들, 즉 정치의 길(道)·지방제도·경제·과거제도·
학제(學制)·병제(兵制)·관제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들의 장래에 대한 이상과 구상을 논한 책이다. 이리하여 실학의
계통을 밟은 학자들이 잇달아 나타났으니, 앞에 말한 유형원의 《반계수록》, 이익의 《성호사설》 외에 정약용(丁若鏞)
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지어 현실의 개혁을 부르짖었다.
한편 한국에서 실사구시의 학풍 장려를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양득중(梁得中)이다. 그는 1729년(영조 5)에 실사구시
의 학이 이상적이며 실제적인 학문임을 왕에게 아뢰어 왕도 ‘실사구시’란 4자를 써서 실내의 벽상에 걸어 놓고 양득중
으로 하여금 진강하게 하였다 한다.
5. 전개
서세동점(暑勢東漸)에 따라 서학(西學)의 중국 유입, 즉 1601년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북경 개교(開敎)와 함께 포교를
위한 방법으로 《천주실의》 등의 천주교 교리서와 《기하원본》 등 서구 과학서를 번역하여 전포했으며, 천리경·자명종·
지구의·천구의·곤여만국전도·서양포(西洋布)·유리제품 등 중국민의 취미에 맞는 서양 기물을 만들어 중국인의 마음을
사는 데 사용하였다. 이런 것들은 해마다 북경에 내왕하는 한국의 사절들이 호기심을 가져 드디어 한국에도 들어오기
시작하여 서학이 천주교와 서구 과학을 겸한 두 방면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선조 때에 이수광(李睟光)이 한국에도 소개
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대사상가 허균(許筠)과 인조 말기의 소현세자 등이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서학의 종교는 숙종
때의 이익에게서 크게 이해되어 마침내 그 문하에서 홍유한(洪有漢)·이벽(李蘗)·이승훈(李承勳)·권일신(權日身)·정약종
(丁若鍾) 등의 천주교 실천자가 배출됨으로써 서학이 종교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또한 인조 때의 김육(金堉)·정두원(鄭斗源)·이영준(李榮俊) 등이 학습을 시작한 서학의 과학면은 이익에 이르러 크게
발전되어 그의 문하에서 홍대용(洪大容)·신경준(申景濬)·정약용·최한기(崔漢綺)·김정호(金正浩) 등의 서구 과학의 실제
응용자를 얻음으로써 서학이 과학으로서의 발전은 더욱 활발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 사이에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
관이 수립되었고 다급한 민생 문제의 해결을 위한 새로운 방안과 노력이 생기게 되었으니 서학은 한국 사상 발생의
일대 요인이 되는 것은 물론 실학 내용의 절반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한국에 실학사상이 발생되던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중국 문화는 한인(漢人)의 한문화 재건으로부터 오는 고증
학적 학풍과 서구 과학의 섭취로써 얻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경제 정책 또는 산업 정책을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소위
북학파(北學派)로 알려져 있는 홍대용·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의 신진학자들이 수입하여 발전시켰다.
이들은 중국의 문물제도를 배워 그대로 사용하자는 것으로 한국 실학 성립의 한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국
에도 서학(西學)[1]을 한국보다 더 실제 생활에 이용해 본 중국 문화의 전래 등으로 인해 완전히 실학사상이 대두하여
명실 공히 이용후생의 학문으로서 나타났다.
6. 실학파
조선 중기에 일어난 실학의 한 학파인 실학파(實學派)는 헛된 이론을 버리고, 사실을 추구하여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는
학문을 주장하였다. 고려 말에 중국에서 전하여 온 성리학은 그 사이에 많은 발전을 보았으나 일상 생활과는 먼 감이
없지 않았고,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양난을 겪고 난 국민은 때마침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아
학계에 큰 변동을 일으켰다. 곧 정치·경제·천문·지리·어학 등에 유형원을 비롯하여 이수광·정약용·이덕무(李德懋)·박지원·
신경준 등의 학자가 동시에 일어나 실용적인 학문을 주장하였다.
(1) 경세치용학파
18 세기 전반에는 농업 중심의 개혁론이 대두되었다.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한 실학자들을 경세치용학파라고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유형원: 경세치용파의 선구자로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
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이익: 경세치용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성호 학파
를 형성하였다. 그는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저서 《성호사설》를 통해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2]
(2) 이용후생학파
18세기 후반 영조·정조 대에는 상공업 발전 및 기술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당시 오랑캐라 배척하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3]라고도 한다. 그들은 주로 청나라에 내왕하면서 청조 문화의 우수함을 보고 조선에 돌아와서 그 발달한 문화
를 수입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견문을 토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유수원(柳壽垣): 북학파의 선구자이다. 그의 저서 《우서》에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홍대용: 사신으로 청나라을 방문한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사대부의 중화사상을 비판하였다. 《담헌집》을 남겼다.
박지원: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
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
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청나라에 갔다온 경험을 담은 여행기 《열하일기》로 유명하다.
박제가: 박지원의 제자로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밖에 저작으로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홍양호(洪良湖)의 《이계집(耳溪集)》, 유득공의 《영재집
(泠齋集)》 등이 있다.
7. 실학의 영향
(1) 국학의 발달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
역사 분야 : 이익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은 우리 시각의 역사관을 반영한 강목체 형식의 역사서《동사강목(東史綱目)》
을 저술했고, 그밖에 《열조통기(列朝通紀)》를 펴냈다. 이긍익(李肯翊)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한 《연려실
기술(燃藜室記述)》을 저술하였다.
한치윤(韓致奫)은 《해동역사(海東繹史)》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종휘의 고구려사
연구와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저술은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김정희(金正喜)는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지리 분야 :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
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정상기의 《동국지도》 및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권상기(權尙驥)의 《팔도분도(八道分圖)》 등이 대표적이다.
역사 지리서로는 유득공의 《사군지(四郡志)》,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彊界考)》 등이 나왔고, 인문 지리서로는 이중환의 《택리지》,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 정약용의
《조선수경(朝鮮水經)》,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 《산수경(山水經)》,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이 편찬되었다.
언어학 영역 :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와 유희의 《언문지》, 황윤석(黃胤錫)의 《이재집(頤齋集)》 등이 나왔고,
한국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도 편찬되었다.
예술 영역 : 조선 중기 이후 중국의 화풍을 모방하는 당시 풍토를 비판하고 조선의 화풍으로 확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어
났다. 대표적인 이가 정선으로 중국 산수화의 모방이 아닌 우리의 자연을 그리려는 진경산수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백과사전류 편찬 :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
었다.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며, 그 뒤를 이어 이익의 《성호사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등이 나왔다.
영·정조 때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한국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
사전이다.
(2) 과학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면서 중국에 머물던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도 큰 진전이 있었다.
천문학 분야 : 이익은 서양 천문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으며,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
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고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의학 및 생물학 분야 : 정약용은 마진(홍역)에 대한 연구를 진전시키고 이 분야의 의서를 종합하여 《마과회통》을 편
찬하였으며, 박제가와 함께 종두법을 연구하여 실험하기도 하였다.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을 저술하여 사상의학을
확립하였다. 김려(金鑢)의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
농업 기술 분야 : 실학자들은 농업의 발달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의 영향으로 많은 농서가 편찬되었다. 신숙은 《농가집성》을 펴내 벼농사 중심의 농법을 소개하고, 이앙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박세당의 《색경》, 홍만선의 《산림경제》,
서호수의 《해동농서》 등이 대표적인 농서이다. 조선 말기 서유구가 편찬한 《임원경제지》 는 농업과 농촌 생활에 필요
한 것을 종합한 일종의 농촌 생활 백과사전이었다.
(3) 실학파 문학
실학파 문학(實學派文學)은 유학 이외의 실생활에 유익한 것을 목표로 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 곧 실학자들의 문학이다.
그들은 신선한 구상과 평이한 사실적 수법으로 시와 산문을 창작했으며, 한국의 속담이언(俗談俚言)을 자유로이 표현
하고 풍자와 해학으로 서민적 정취를 섭취하여 한국의 한문학상 새로운 한 유파를 형성하였다.
실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종래의 공리공담(空理空談)이 위주가 된 주자학적(朱子學的) 도학(道學)의 관념적 세계에
예리한 비판을 가하고 실생활과 직결된 학문의 추구 및 서유럽의 진보된 신학문 도입을 시도하였다. 이 일군(一群)의
학자들은 그때까지 당시(唐詩)와 당 ·송 고문(唐宋古文)을 지상(至上)의 것으로 여기던 사대부(士大夫)의 진부하고 형식
적인 정통문학(正統文學)에 대하여 신선한 구상과 사실적(寫實的)인 수법으로 평이한 시와 산문을 제작하였으며, 한국
의 속담 ·이언(俚諺)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풍자와 해학으로 서민적인 정취를 섭취, 한문장(漢文章)에서 중국의 전형을
탈피한 독자적인 한문체(漢文體)를 확립시켰다. 이러한 실학파 문학의 조류는 이미 선조 때 이수광(李晬光)의 《지봉
유설(芝峰類說)》 등에 등장하며, 허균(許筠)의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등 몇몇 한문소설과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항간(巷間)의 기사이담(奇事異談)에서 주로 취재한 유몽인(柳夢寅)의 《홍도(紅桃)》 《진이(眞伊)》 등 일련의 한문
소설로 이어진다.
그 후 이익(李瀷)의 우언(寓言)소설인 《동방일사전(東方一士傳)》, 이용휴(李用休)의 골계(滑稽)소설인 《해서개자
(海西丐者)》, 안정복(安鼎福)의 우언소설인 《홍생원유기(洪生遠游記)》, 채제공(蔡濟恭)의 협사(俠邪)소설인 《이충
백전(李忠伯傳)》 등에서 더욱 성행하다가 박지원(朴趾源)의 여러 작품에서 완성되었다. 박지원은 《양반전(兩班傳)》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 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김신선전
(金神仙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등 일련의 소설 작품을 통해서 허식과 현학(衒學)을 일삼는 당시의 유학자들을
통렬히 비판, 풍자하였다.
그는 실학을 통한 사회개혁의 의지를 문장을 통하여 작품화하고 이론화시켰다. 이는 박지원의 문하(門下)로서 조선 실학
4대가(實學四大家)로 불리는 박제가(朴齊家)의 기행문 《북학의(北學議)》, 이덕무(李德懋)의 협사소설 《은애전(銀愛
傳)》 및 염정(艶情)소설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 유득공(柳得恭)의 골계소설 《유우춘전(柳遇春傳)》과 이서구
(李書九)의 한시집(漢詩集)인 《강산집(薑山集)》 등으로 계승 ·발전되어 조선 후기 한문학의 주류를 이룬다.
이처럼 실학파의 문학이 조선 후기에 크게 융성한 것은 영 ·정조의 학문 보호책에 힘입은 바 컸으나, 이들 문인들은 대개
재야(在野)에서 정권에 참여할 기회가 적었으므로 결국 한말에 이르러서는 서양의 신문물(新文物)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 밖에도 실학파의 문학으로서는 정약용(丁若鏞)의 골계소설 《장천용전(張天慵 傳)》 및 협사소설 《죽대선생전(竹帶
先生傳)》 《조신선전(曹神仙傳)》과 풍자소설 《출동전(黜僮 傳)》, 김려(金鑢 ) 의 골계소설 《가수재전(賈秀才傳)》
및 풍자소설 《유구왕세자외전(琉球王世子外傳)》과 협사소설 《삭랑자전(索囊子傳)》 《장생전(蔣生傳)》, 우언소설
《한숙원전(韓淑媛傳)》, 이옥(李鈺)의 단편 《신아전(申啞傳)》 《성진사전(成進士傳)》 《유광억전(柳光億傳)》 《심
생전(沈生傳)》 등과 유본학(柳本學)의 《오원전(烏圓傳)》 《김풍헌전(金風憲傳)》 《김광택전(金光澤傳)》 《이정해
전(李廷楷傳)》 등 허다한 한문소설 작품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특히 영 ·정조 시대에 융성한 실학파문학은 그것이
한문학(漢文學)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서민의 생활과 의식체계를 국문학에 본격적으로 도입하였으며, 특히 산문
(散文) 문학의 정수라 할 소설문학의 일대 부흥을 가져오게 하였다.
(4) 영향 및 의의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 사상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이었다.
특히, 북학파 실학 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1. 권일신(權日身, ?~1791)
한편으로는 지방의 자제들을 교육하여, 그들이 겉만 화려한 벌열(閥閱)보다 우수함을 강조하고 벌열들에 대한 비판의식
을 갖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1799년 다시 필화를 당하였으며 이때 그의 저서가 대부분 분서(焚書)되는 화를 입었다.
1801년(순조 1) 강이천 비어사건의 재조사에서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다시 진해(鎭海)로 유배되었으며, 그곳
에서 어민들과 지내면서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지었다.
이는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와 더불어 어보의 쌍벽을 이룬다. 1806년 아들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려
나, 1812년 의금부를 시작으로 정릉참봉(靖陵參奉) ·경기전영(慶基殿令) ·연산현감을 거쳐 함양군수 재직중 죽었다.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 문장의 대표적 인물로 이옥(李鈺) 등과 교유하였으며, 김조순(金祖淳)과 함께 《우초속지(虞
初續志)》라는 패사소품집을 낸 바 있다. 저서에 《담정유고(潭庭遺稿)》 《담정총서(潭庭叢書)》 《한고관외사(寒皐
觀外史)》 《창가루외사(倉可樓外史)》 등이 있다.
4. 김만중(金萬重, 1637~1692)
6. 김정호(金正浩, ?~1866)
또 지리지 편찬에도 힘써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44),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
地志)》(1861∼1864) 등을 펴냈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는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지리지로서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그의 저작활동은 19세기 조선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하여 구축하고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국가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를 물어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지도와 지리서가 보존되었
다는 점, 그의 후원자였던 실학자 최한기와 고위 관리를 지낸 신헌 등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 등
으로 보아 신빙성이 적다.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
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불교
에 심취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한다.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
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
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
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
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
하여 파면되었으며, 그 아버지 김노경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
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는 김정희가 너무 강직한 탓이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
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 권돈인이 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
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
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
을 하였다고 한다.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 신위, 오경석, 민태호, 민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등 이다. 이조 참판 박정(朴炡)과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남원에서 태어났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예조
좌랑·병조좌랑·정언·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려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 것과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668년에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 : 지금의 도봉산 아래 다락원)으로 물러났다. 그뒤 숙종 23년(1697) 4월에 한성부판윤을 비롯하여 예조
판서, 이조판서 등 수차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주력하였다.
폐쇄적인 성리학 연구방법을 비판하고 고증학적 방법론에 입각하여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의 결합을 주장했으며,
경학(經學)에 대한 많은 저술을 남겼다. 본관은 창녕. 자는 용여(龍汝), 호는 연경재(硏經齋).
1771년 북청(北靑)부사, 1773년 좌승지(左承旨) ·강계(江界)부사 ·순천(順天)부사, 이듬해 제주(濟州)목사, 1779년 치사
(致仕)하고 고향 순창(淳昌)에 돌아갔다.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성률(聲律) ·의복(醫卜) ·법률 ·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실학을 바탕으로 한 고증학적 방법으로 한국의 지리학을 개척했다. 1750년에는 《훈민정음운해
(訓民正音韻解)》를 지어 한글의 과학적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
신경준이 관직에 나아간 것은 43세 때인 1754년(영조 30)에 실시된 증광향시에 급제하면서부터이다. 늦은 나이로 관계
에 진출한 그는 승문원기주관(承文院記注官)·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산군수·장연현감·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종부시정(宗簿寺正) 등을 거쳤으나 관직생활은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었다.
15년 만인 1769년(영조 45)에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 해에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의 영유권에 관한 외교관계
의 문건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을 편찬할 것을 청하였다. 이 때 홍봉한의 천거로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강역고(疆域考)』와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저서에는 《여암집(旅庵集)》 《소사문답(素砂問答)》 《의표도(儀表圖)》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산경표(山經表)》 《증정일본운(證正日本韻)》 《수차도설(水車圖說)》이 있다
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
양보경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18세기의 지리학과 신경준
학문의 내용과 수준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의 구조와 지식의 축적 속에서 형성된다. 조선시대의 자연과 공간, 지리에
대한 인식체계의 변화는 조선 사회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지식의 축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자연,
지리의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고자 하는 노력은 조선 후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가 지역 내지 국토의 공간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인식한 실학적 지리
학자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지리학의 다양화, 계통지리학적인 전문화의 추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18세기는 조선 후기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이며, 지리학에서도 지리지, 지도, 실학적 지리학이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16세기 이후 지방 단위로 개별, 분산적으로 편찬되었던 읍지들을 국가가 종합하여 18 세기 중엽에
전국 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로, 18세기 말에는 『해동읍지(海東邑誌)』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의 전국 읍지들은 공시적(共時的)인 지리지로서 전국 각 지역의 사정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중요한 수단이
었다. 그 밖에 『추관지 (秋官志)』 『탁지지(度支志)』 등의 관서지(官署志), 『호구총수(戶口總數)』 『도로고(道路考)』, 『산수고(山水考)』 등 다양한 주제별 지리서가 활발하게 편찬되었던 것도 동일한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다.
18세기는 조선의 지도 발달사에서도 획기적인 전환기였다. 지도의 정확성 등 지도 제작 기술의 발달, 양적인 증가가 전국
지도, 도별도, 군현지도, 관방도와 같은 특수도 등 다양한 종류의 지도에서 이루어졌다. 또 이 시기에는 17세기의 이수광,
한백겸, 유형원에서 싹튼 실학적 지리학이 체계화되고 발달하고 성숙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사회변화와 함께
국토·지역의 구조가 변화함을 인식하고, 지리학의 중요성과 실용성을 주목하여 지리에 관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러나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1712∼1781)처럼 방대한 지리학 저술을 남기고, 자신의 지리적 지식을 인정받아 국가
적인 편찬사업으로 연결시켰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많은 실학자들이 재야에서 활동하였음에 반하여 그는 국가적인 사업
에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 실천적 지리학자라는 점에서 다른 실학파 지리학자들과
구별된다.
묻혀진 지리학자, 신경준
신경준은 전라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고령 신씨가 순창에 거주한 것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가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한 15세기 부터였다. 신경준은 서울, 강화 등에서 수학하였으며,
한때 소사, 직산 등에 옮겨 살았으나 1744년에 다시 순창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관직에 나아간 것은 43세 때인
1754년(영조 30)에 실시된 증광향시에 급제하면서 부터였다.
늦은 나이로 관계에 진출한 그는 승문원 기주관,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서산 군수, 장연현감, 사간원
헌납, 종부시정 등을 거쳤으나 관직생활은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어서 15년만인 1769년(영조 45)에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영의정 홍봉한이 울릉도의 영유권에 관한 외교관계의 문건으로 삼을 수 있는 책을 편찬할
것을 청하여, 이 때 홍봉한의 천거로 비변사의 낭청(郎廳)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영조는 신경준이 편찬한 『강역지(疆域誌)』를 보고 그로 하여금 『여지편람(輿地便覽)』을 감수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여지편람』을 본 영조는 그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文獻通考)』와 비슷하다 하여 『동국문헌비고』로 이름을 바
꾸어 새로 편찬하게 하였다.
770년(영조 46)에 찬집청을 설치하여 문학지사 (文學之士) 8인을 선발하고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도록 함에 따라,
신경준은 「여지고(輿地考)」 부분을 관장하였다. 역대국계(歷代國界), 군현연혁(郡縣沿革), 산천( 山川), 도리(道里),
관방(關防):성곽(城郭)·해방(海防)·해로(海路)로 구성된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그의
해박한 지리 지식을 종합하여 편찬한 것이었다.
그는 당대에는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였던 뛰어난 지리학자였으나,1) 20세기의 지리학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지리학보다도 국어학자로 일찍부터 평가를 받았으나2) 그의 주요 저작은 지리학에 관한 것이
었다.
그의 저서 중에 시문과 성리학적인 글들과 『훈민정음운해』 외에 대작(大作)은 『산수고(山水考)』, 『강계고(疆界考)』 『사연고(四沿考)』 『도로고(道路考)』 『군현지제(郡縣之制)』 『가람고(伽藍考)』 「차제책(車制策)」 등 대개 지리
학적인 것으로서, 여암만큼 다방면에 걸친 지리학 저술을 남긴 사람은 없다.
여암이 저술한 지리에 관한 장편의 글들은 그가 세상을 뜬 뒤 홍량호의 서문을 붙여 편찬한 『여암집(旅庵集)』(규장각
소장, 8권 4책, 필사본)과 1910년에 후손들이 목판으로 간행한 『여암유고(旅庵遺稿)』(13권 5책)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문집에는 그가 남긴 시문(詩文)만 묶여져 있다.
신경준의 업적과 그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1939년부터 『여암전서(旅庵全書)』를 간행하였는데,
3) 원래 계획했던 신경준의 저작을 다 싣지는 못하였으나 『도로고』를 제외한 지리에 관한 글들이 대부분 실리게 되
었다.
1976년에, 기존에 출간되었으나 구하기 어려운 『여암유고』와 『여암전서』, 그리고 여암전서에서 간행하지 못하였던
『도로고(道路考)』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海)』, 연보, 후손댁에 전하는 『강화도전도』 『팔도지도』 등을 합
해서 다시 『여암전서(旅庵全書)』(경인문화사 간)라는 이름으로 간행함으로써 여암의 저술이 대부분 망라되었다
조선 역사지리학의 체계화
1756년에 편찬한 『강계고』는 신경준의 저작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동국문헌비고』 편찬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역대의 강계와 지명 등을 고찰한 역사지리서로서 일본, 대만,
유구국(오키나와), 섬라국(태국) 등도 별도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역사지리학은 당시에는 지명의 고증, 영토 국경 수도
와 도시의 위치 및 그 변화 등을 고찰하는 것을 지칭하였으며 , 오늘날의 역사지리학의 개념과는 상이하다.
조선의 역사지리학을 체계화하였다고 평가받은 『강계고』의 서술체제는 대체로 국가적 단위를 중심으로 각국의 국도
(國都)와 강계(疆界)를 정리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도와 강계 항목에서는 각 조항마다 관련이 있는 지명이나
산천, 국가들을 덧붙였다. 서술방식 및 자료이용과 관련된 특징을 보면, 문헌실증적인 입장이 관철되고, 내용적으로는
주로 강역에 대한 비정과 지명고증이 특징이다. 특히 언어학이나 금석학 지식을 역사연구에 적극 응용하였으며, 역사
지리고증에 방언을 활용하거나 음사(音似 ) 이찰(吏札) 등의 자료를 적극 활용한 점도 발전적인 면모이다.
또한 많은 다양한 자료, 기존의 문헌자료 외에도 금석문이나 사찰자료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였다. 문헌
자료에서도 사료의 인용범위를 넓혀, 야사자료, 그리 고 만주일대를 조선과 삼한의 지역으로 비정하였던 『요사』
『성경지』와 같은 자료도 요동과 요서지역에서의 열국들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용하였다.
『강계고』에 나타난 강역인식은 주로 기자조선 및 한사군, 고구려 등 국가들의 초기 중심지를 요동일원으로 비정함으
로써 확대된 영역관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동시기의 이익이나 이종휘의 영역관보다는 상대적으로 좁으나, 조선 전기의
영역관에 비해서는 구체적이고 확대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강계고』는 당시까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룩한 우리나라 역사지리에 관한 가장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인 연구서 중의
하나였다.4) 옛 국가, 영토, 지명의 변천 등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였던 역사지리학의 탐구는 주체로서의 국토의 중요
성과 자국(自國)의 역사성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신경준 이후 한진서, 정약용 등으로 이어졌다.
사회와 공간의 변화 인식:유통과 유통로의 파악
신경준은 유통과 유통로에 관한 저술로 『도로고』와 『사연고』를 남겼다. 『도로고 』(4권 4책)는 어로(御路)와 서울
부터 전국에 이르는 육대로(六大路), 팔도 각 읍에서 사계(四界)에 이르는 거리, 그리고 사연로(四沿路), 대중소(大中小)
의 역로(驛路), 파발로(擺撥路), 보발로(步撥路), 봉로(烽路), 해로(海路), 외국과의 해로, 조석(潮汐), 전국 장시의 개시
일 등 각종 도로 즉 육로와 해로, 정기시장이 망라된 글이다.
1770년에 쓴 『도로고』 서문에 나타나 있는 신경준의 사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로의 공익적(公益的) 성격을
뚜렷이 부각시켰으며, 도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로를 최초로 본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인식하여 도로고를
저술하였다. 사회와 경제 가 발전함에 따라 그 중요성이 가장 먼저 점증되는 분야가 도로임을 간취하였으며, 환경지각
(environmental perception)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
중국 고제(古制)를 바탕으로 현실문제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정밀한 이론의 추구를 기했으며,
도로 이정(里程)에서도 정확한 측정을 요구하였다. 또한 도로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치정(治政)의 기본으로 치도
(治道)를 내세웠다.5)
『도로고』는 유통경제, 시장경제,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육로와 수로 등 도로의 중요성이 증대되고 있던 당시의 사회
상을 가장 잘 정리하여 반영하고 있는 책이다. 특히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공간적인 변화의 상호작용, 그리고 양자의
관계의 중요성을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18세기 후반 이후 『도로표(道路表)』 『정리표( 程里表)』 『도리표(道里表)』 등의 책자들이 많이 제작되고, 도리표를
함께 그린 지도들이 출현하는 것도 이 책의 영향을 반영한다. 『사연고(四沿考)』는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과
팔도해연로(八道海沿路), 그리고 중국과 일본으로의 해로(海路), 조석간만 등 바다를 낀 연안지역을 정리한 글이다.
자원이나 도로의 측면에서 바다와 해안 도서가 지니는 경제적인 효용성, 연해 지역에 대한 국가 민간의 관심의 증대,
바다가 지니는 국방상의 중요성 등을 깊이 인식한 데서 출발한 글이라는 점에서 신경준의 사회와 지역에 대한 통찰력과
체계적 정리를 보여 주는 저술이다.
지도 제작
우리 나라 지도 발달의 전환기였던 18세기 중엽에 신경준은 지도 제작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동국여지도발(東國
輿地圖跋)” “동국팔로도소지(東國八路圖小識)” “어제여지도소서(御製輿地圖小序)” 등의 글을 보면 그가 지도 제작에
일가견을 가지고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지도 발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던 농포자 정상기(1678∼
1752)와 아들 정항령, 손자 정원림까지 삼대에 이어졌던 지도 제작의 기법을 정항령과 친교가 있었던 신경준도 나누어
가졌음을 지도에 관한 그의 글에서 살필 수 있다.6)
1769년 국왕 영조가 『강역지』 편찬에 관해 물었을 때, 신경준은 36 0주의 각읍지도를 따로 만들 것을 건의하였으며,
『동국문헌비고』 편찬을 진행하면서 영조의 명에 따라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제작하였다. 『여암유고』 권5,
「발(跋)」 ‘동국여지도발(東國輿地圖跋)’에 의하면 신경준은 정 항령(鄭恒齡)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게 하고, 신경준에게 별도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만들 것을 명하자, 신경준은
공부(公府)에 있는 지도 10여건을 검토하고, 여러 집을 방문하여 소장된 지도들을 살펴보았으나 정항령이 그린 지도
만한 것이 없어 정항령의 지도를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지도에 약간의 교정을 가하여 6월 초6일에 시작하여 8월 14일에 지도 편찬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리하여 열읍도
(列邑圖) 8권, 팔도도(八道圖) 1권, 전국도(全國 圖) 족자 1축을 임금께 올렸다.
이 지도는 주척(周尺) 2촌(寸)을 하나의 선으로 하여 세로선 76, 가로선 131개의 좌표 방안 위에 그렸던 방안지도(方眼
地圖)였다. 방안지도(또는 경위선표식(經緯線表式) 지도)는 모든 군현지도를 같은 축척으로 그림으로써 군현지도들
사이의 분합(分合)을 가능하게 한 지도이다.
이로써 전국의 각 군 현지도를 연결시켜 지역별, 도별, 나아가 전국지도로 합해 볼 수 있고, 나누어 볼 수도 있다. 동
일한 축척을 가진 군현지도들은 대동여지도와 같은 대축척 전국지도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일정한 축척을
적용함으로써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려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도 안에 1리, 혹은 10리, 20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리게 되면, 지역과 지역 간의 거리 파악이나 방위,
위치 등이 더욱 정확하고 정교하게 된다. 축척의 적용, 대축척지도, 전국을 포괄하는 공간적 범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18세기 중 후반에 여러 종 제작된 방안지도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신경준은 회화식지도의 전통과는 다른 방안지도
를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의 제작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자연인식의 체계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산천(山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였으니, 여암 신경준의 『산수고』가 그 선구였다.
『산수고』는 우리 나라의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의 분(分)·합(合) 체계로 파악한 한국적 지형학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산수(山水)를 중심으로 국토의 자연을 정리하였으나, 그 속에는 인간 생활과 통합된 자연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산수고』는 국토의 뼈대와 핏줄을 이루고 있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지리서이며, 한국적인 산천 인식
방식을 전해 준다.7) 『산수고』는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산(山)이요, 만 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은 물(水)이다.
(우리 나라) 山水는 열 둘로 나타낼 수 있으니, (산 은) 백두산으로부터 12산으로 나누어지며, 12산은 나뉘어 八路(팔로)
가 된다. 팔로의 여러 물은 합하여 12水가 되고, 12水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와 나누어지고 합함의
묘함을 여기에서 가히 볼 수 있다.”고 하여 『산수고』를 쓰게 된 동기와 산수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 서문에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산과 강을 분합의 원리로 파악하여 대칭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음양의 구조로 이해
하였던 저자의 생각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의 주요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로 파악한 점도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연의 운행을 보면 1년은 열 두 달로
완결되며, 우주 만물에는 양과 음이 있다.
우리 나라의 산천도 일반 자연법칙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어 12개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있으며, 산수의 흩어짐과 합함,
우뚝 솟아 서 있음과 아래로 흘러내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를 소우주로 이해하여 완결적인 존재로 파악하던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산 중에는 삼각산을, 물은 한강을 으뜸으로 쳤으니, 이는 京都(수도)를 높이는 것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서문에서는
백두산에서 조선의 산들이 시작하는 것으로 기록하였으면서도 실제 산의 분포를 서술할 때는 한양의 삼각산에서 시작
함으로써, 그가 백두산 중심의 사고와 수도 중심의 사고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산수고』는 이와 같이 우리 나라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 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18세기 후반에 조선의 산천을 산경(山經)과 산위(山緯), 수경
(水經)과 수위(水 緯)로 나누어 파악하였던 사실을 신경준의 『산수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산줄기와 강줄기의 전체적
인 구조를 날줄(經)로, 각 지역별 산천의 상세하고 개별적인 내용을 씨줄(緯)로 엮어 우리 국토의 지형적인 환경과 그에
의해서 형성된 단위 지역을 정리 한 것이다.
신경준의 우리 나라 산천에 대한 이와 같은 체계적인 파악은 전통적 지형학 또는 자연 지리학의 체계화로 평가할 수 있
으리라 생각된다. 자연현상을 주제로 하여 전문적으로 접근하였던 『산수고』에서 우리는 지리학의 다양화와 계통지리
학적인 요소, 나아가 근대지리학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8)
지리학의 종합화와 공유화
신경준은 왕명에 의한 『동국문헌비고』의 편찬에 참여함으로써 당시까지의 문물과 제도를 정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지리 관련 내용을 총정리한 「여지고」 부문을 담당하여, 그의 지리에 관한 저술을 「여지고」에 종합해 놓았다.
『동국문헌비고』는 상위(象緯), 여지(輿地), 예(禮), 악(樂), 병(兵), 형(刑), 전부(田賦), 재용(財用), 호구(戶口), 시적
(市選), 선거(選擧), 학교(學校), 직관(職官) 등 13고 10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가운데에서 「여지고」는 17권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핵심적인 위치를 구성하였다.
『동국문헌비고』「여지고」는 신경준의 여러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저술들을 종합 정리하는 차원에서 편찬된 것으로,
고려와 조선전기 자료와 연구성과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전문적으로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던 한백겸, 유형원, 홍만종,
임상덕 등 관련 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종합 정리하였다. 따라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한백겸 이후 일련의 역사
지리 연구를 집대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비고 「여지고 」는 전장 제도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백과전서학
적 연구에, 개인들이 발전시켜 온 역사지리학의 연구성과를 정부적인 차원에서 최대한 결집시키면서 이룬,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발전의 중요한 결과물이자 발전의 지표라고 평가할 수 있다.9)
그러나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는 역사지리학뿐만 아니라 교통, 시장, 군사, 방어, 산천과 같은 경제지리학, 국방
지리학, 자연지리학, 문화지리학 등이 종합된 책으로, 신경준의 사상이 결집된 책이다. 또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
는 개인적인 수준의 학문 연구를 사회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 저술이며, 사회적인 검증을 거친 실천적 지리서라 할 수
있다. 이는 신경준이 지식의 사적 소유를 넘어 이를 공유화하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지리적 공간
적 지식의 공유화는 개인과 사회의 공간 인식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사회 경제 변화를 촉진한다는 점에서 신경준의 저술
들은 더욱 빛을 발한다.
16. 신속(申洬, 1600~16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