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지구여행 - 북극점의 정복 북극 탐험에 종지부를 찍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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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7. 23:54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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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지구여행
북극점의 정복
북극 탐험에 종지부를 찍어라
유럽인들에 의해 지구의 대륙과 바닷길이 대부분 밝혀졌지만, 북극과 남극은 18세기 말까지 미지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극에 대한 관심이 보다 고조되었다. 흔히 북극 지방(또는 북극권)이라고 일컫는 이곳은 얼음이 얼어서 땅같이 보이는 바다와 동토를 일컫는다. 2500만~3000만 ㎢의 동토 중 1400만 ㎢ 정도는 바다(북극해)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는 그린란드, 스피츠베르겐 제도 등의 섬과 알래스카, 캐나다 북부, 아이슬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 북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극 탐험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은 난센(Fridtjot Nansen, 1861~1930)으로, 그는 1861년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 바이킹호를 타고 그린란드 동쪽 바다를 항해하면서 풍향, 해류, 생물 분포 등을 조사하는 일에 참여했는데, 이 시기에 북극해의 빙산과 해류, 백야 현상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1888년 8월 난센은 5명의 대원과 함께 그가 고안한 난센 썰매를 타고 그린란드를 탐험하였다. 52일 만에 그린란드의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탐험을 끝내고 노르웨이로 돌아온 난센은 영웅이 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난센은 북극점을 탐험하기 위하여 배를 건조하고 프람호(Fram, 420톤)라고 이름 지었다. 프람호는 길이가 짧고 옆 부분이 볼록하여 사방에서 얼음 덩어리가 조여 와도 배가 얼음 위로 떠오르게 설계되어 있었으며, 동력과 키를 배 안에 끌어들이고 보온을 위해 짐승의 가죽을 바닥에 깔았다. 1893년 6월 3년 계획으로 6년분의 식량과 8년분의 땔감을 싣고 13명의 대원을 태운 프람호가 오슬로를 출항하였다. 항해 도중 엄청난 조수와 해류에 밀려 선체가 얼음 밑으로 깔릴 위험도 겪었지만, 프람호는 매끄럽게 빠져나오곤 하였다.
그러나 바다 전체가 얼어 버리자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어, 난센은 요한슨과 함께 배를 떠나 개썰매로 얼음 위를 달렸다. 배를 떠난 지 24일 만에 북위 86° 14′까지 도달하였지만, 그들이 올라가 있는 얼음이 극점의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파악하고 가까운 섬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이듬해 6월까지 지내다가 영국의 탐험대를 만나 1896년 8월 13일 노르웨이로 되돌아왔다. 배를 떠날 때 남겨 둔 대원들도 무사히 귀국하였는데, 이때부터 북극 탐험의 길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난센의 북극 탐험로
난센은 1893년 오슬로를 출발하여 극점 부근까지 도달하였다가 3년 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또 한 사람의 북극 영웅은 미국의 피어리(Robert Edwin Peary, 1856~1920)이다. 해군의 토목 기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 그는 1886년과 1891년 두 차례에 걸쳐 그린란드의 북극권 2천 ㎞ 이상을 탐험했다. 1902년에는 북극해의 84° 17′까지 나아갔으나, 동상 때문에 발가락 8개를 자르고 탐험을 포기하고 말았다. 1905년 루스벨트호를 타고 다시 도전하였으나, 북극점을 300㎞ 남겨 둔 북위 87° 06′에서 식량과 연료 부족으로 다시 포기하고 돌아왔다. 두 번에 걸쳐 실패한 피어리는 늘 ‘북극점의 정복’이라는 무거운 짐에 짓눌려 살았다.
마침내 나이 50이 넘은 피어리에게 20년 북극 탐험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1908년 7월 6일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22명의 탐험대 대원과 함께 뉴욕을 떠나 7월 26일 북극권인 66° 33′을 넘었다. 8월 1일에는 그린란드 북서쪽의 요크 곶에 닻을 내리고 에스키모 22명과 개 썰매를 동원하여 본격적인 탐험에 나섰다. 9월 5일에는 북위 82° 30′에 위치한 세리단 곶 북쪽 끝에 있는 콜롬비아 곶에 전진 기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겨울을 났다.
거기서부터 북극점까지는 직선 거리 660㎞로 얼음 산과 골짜기, 살을 찢는 추위, 출렁이는 바닷물과 빙산 등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었지만, 전 여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도전이었다. 1909년 3월 1일 피어리는 대원들을 재정비하고 ‘극지법’이란 공격 방법을 고안하여 출발하였다. 전 대원을 6팀으로 나누어 1조가 길을 개척하여 캠프를 설치하고 나머지 다섯 조는 뒤를 따르며, 다음은 2조가 길을 열면 나머지 네 조가 바통을 잇는 식으로 마지막 공격조가 힘을 아꼈다가 북극점에 도달한다는 계획이었다.
3월 27일 피어리는 3년 전에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섰던 87° 06′에 도달하였다. 4월 1일에는 87° 47′에 다다라서 마지막으로 버틀렛 선장이 이끄는 팀도 돌려보내고 자신의 개인 조수인 핸슨(Marthew Henson)과 에스키모 네 사람으로 극점 공격 계획을 수립하였다. 공격조 여섯 사람을 태운 개 썰매는 남은 94㎞를 하루 20~25㎞씩 전진했으며, 4월 6일 오후에 북극점에 도달하였다. ‘조국이여! 마침내 북극점에 왔소이다. 300년 동안 사람들의 경쟁 표적이었던 북극!’이라고 일기를 적은 피어리는 15년 전 부인이 만들어 준 성조기를 극점에 세움으로써 북극 탐험에 종지부를 찍었다.
추후 이 일기는 피어리가 북극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사용되는 등 여러 의혹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극점의 정복 - 북극 탐험에 종지부를 찍어라 (대단한 지구여행, 2011. 8. 1., 윤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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