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대하러 온 시민방위군들, 코만도 꼼씨의 에스코트를 받아 최전방으로 간다.
최전선으로 가는 길에 이런 사태를 여러 번 만났다.
작년 5월 3일 마니푸르폭동으로 산화된 105인이 묻혀 있는 쿠가댐 앞의 마티어스 묘원.
하나님께서 "꼼"씨에게 정말 그리하셨을까?
작년 3월부터 실맛신학교 방문 30주년 기념행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학장과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우선 나는 신학교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 오랫동안 많은 기여를 해주신 장장로님과 김권사님 그리고 비전아시아의 이사장님과 이사님들을 모시고 가서 함께 기쁨을 나누며 30주년 기념으로 동북아선교에 불을 붙이는 첫 모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꿈은 5월 3일에 마니푸르폭동으로 말미암아 산산조각이 났다.
학장님과 나는 2개월 동안 30주년 행사와 학교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신명이 났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학교와 그 쪽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담합이나 한듯이 연락을 뚝 끊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말씨름을 할 수 없는 노릇!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당시 5월에 시작되는 새 학기를 위해 긴급 송금을 해야 하는데 신학교에서 가타부타 말이 없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는가? 하며 혼자 화를 내다가 내 풀에 내가 지쳐 나도 연락을 포기해버렸다.
그렇게 20여일이 지났을까? 마니푸르 지리밤에 살던 지인이 아쌈으로 피신을 나와서 연락한다며 마니푸르폭동 소식을 전해주었다.
마니푸르폭동!
메조리티인 메이테이가 마이너리티인 쿠키-미조족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은 총칼로 무장하고 소수부족민 거주지로 물밀듯이 쳐들어가 학살, 방화,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였다.
마니푸르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메이테이가 소수부족민인 쿠키-미조족이 누리는 교육과 취업과 거주지역의 혜택을 빼앗고자 주의회를 통해서 주법을 바꾸었다. 이에 힘없는 쿠키-미조족 수만명이 임팔에 모여서 생명을 건 평화시위를 단행하여 법 개정을 막았다.
그러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개정된 법의 선포를 기다리고 있던 메이테이들이 분노하여 평화시위대를 향해 무력행사를 시작하였다.
마니푸르폭동 이야기를 듣는 순간 30주년 행사가 물건너 갔다는 생각이 들면서 행사에 대한 미련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리고 연이어 들어오는 교회 방화와 희생자 그리고 난민들 소식에 충격을 받아 현장이 필요로 하는 난민구호를 시작하였다.
돼지고기. 쌀과 부식 그리고 겨울옷을 보냈다.
24년 새해 들어 폭동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 하였다.인도 중앙정부군 2만 명이 토이붕과 곽따 사이에 있는 버퍼존에서 도로를 차단하고 철저하게 검문검색하여 폭도들이 이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그래도 안심할 수가 없어서 소수부족민들은 안전을 위하여 자원하는 시민방위군들을 최전선에 배치하였다.
4월이 되자 신학교로부터 졸업식에 오라는 초청이 왔다. 졸업식에 참석도 하고 30주년 기념행사도 함께 하자는 취지였다.
졸업생들의 졸업을 축하하고 장도를 축복해야하는 자리와 시간을 빼앗아도 안되고
인도 중앙정부의 방치속에 있는 마니푸르 화약고는 언제든지 터질 수 있으므로 가지 않겠다고 확실하게 대답하였다.
5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 학장이 8월에 방문 30주년 기념행사를 꼭 성사시키겠다며 오라고 하였다.
마니푸르 상황이 좋아졌으므로 기념행사가 가능하다며 뉴델리에서 미조람의 수도 아이졸까지 오면 자기가 직접 픽업을 나오겠다고 하였다. 문제는 아이졸에서 추르찬드푸르까지 짚으로 2박3일을 달려야 하는데 그 길이 너무 험악한 것이었다. 지난 3월에 2박 3일의 여정으로 아이졸에서 씨아하보다 먼 방글라데쉬 국경 가까이에 가는데 허리를 삐긋해서 혼이 났기로 방문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말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만약에 임팔공항으로 들어가서 짚을 타고 테딤로드로 갈 수 있으면 가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작년 5월 3일 이래로 임팔공항으로 입국해서 추르찬드푸르에 온 사람이 한 사람도 잆다고 하였다. 또한 추르찬드푸르에서 출발하여 임팔공항으로 출국한 사람도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소수부족민들은 자기들의 최전선인 토이붕을 넘어서는 순간 메이테이에게 포로로 잡히고 만다.
메이테이들은 자기들의 최전선인 비슈느뿌르를 넘어서는 순간 소수부족민들의 포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조람으로 에돌아가는 길로 가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메이테이들의 주거지인 임팔을 거쳐서 그들의 검문과 조사를 받으며 소수부족민들의 지역으로 가겠다고 하는 내 주장은 가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다.
학장은 거듭 내가 임팔공항으로 오더라도 소수부족민 중에는 마중 나갈 사람이 없고. 자기들이 간다 해도 버퍼존에서 잡힐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이드 없는 외국인은 결코 검문소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며 그러면 되돌아가게 될 것이 너무 뻔하다고 하였다. 하여튼 학장은 나 혼자서 추르찬드푸르에 안전하게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를 임팔에서 추르찬드푸르로 데려 올 가이드를 최선을 다해 찾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 일 없이 5월이 가고, 6월이 지나 갔다.
행여하는 마음으로 인도행 항공권을 구입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임팔 뉴델리 구간의 티켓이 없었다.
티켓을 취소하려는데 신학교에서 임팔에서 추르찬드푸르 통행허가증이 있는 사람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학장의 말을 반신반의하며 임팔뉴델리 구간을 다른 항공사 티켓으로 구입하였다.
드디어 임팔공항에 도착하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랬다.
"진정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메이테이도 사람이야. 괜히 트집 잡지는 않을거야. 겁내지 말고 태연하자.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서 그냥 돌아가게 하겠는가? 그리고 만약에 입국 거부당하면 그대로 돌아가면 되지. 뭔 걱정여!"
외국인이라고는 나밖에 없으니 꼼꼼하게 체크할 수 밖에! 더구나 그 외국인이 임팔에서 추르찬드푸르를 들어 간다니 묻고 또 물을 수 밖에!
입국 카드에 아는 현지인 이름을 '꼼'씨로 적었다. 이민국 직원이 '꼼'씨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대충 둘러댔다.
공항 밖에 꼼씨가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
그는 출입 허가증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운전도 잘하고 침착하고 태평한 기질이어서인지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버퍼존의 검문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나는 차가 검문소 앞에 서거나, 총을 든 군인만 보면 얼른 고개를 숙이거나 잠자는 척하며 대면을 기피하였다.
추르찬드푸르에 살면서도 임팔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꼼씨의 정체가 궁금하였다.
자기네 꼼씨는 금번 마니푸르폭동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들은 크게는 미조족에 작게는 마을족에 속하지만
최종적으로는 2만 명 밖에 되지 않는 꼼씨 커뮤니티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들도 처음에는 메이테이들의 법 개정에 반대하여 평화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평화시위가 무산되고 메이테이들이 마을들을 습격하게 되었을 때 공동체 지도자들이 중립 쪽으로 기울었다. 가장 큰 이유는 모든 꼼공동체 마을이 메이테이와 이웃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숫자적으로 막강한 메이테이들이 밀고 들어오면 마을이 순식간에 초토화되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보전을 위해서 중립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꼼씨 공동체가 중립을 택한 것이 나머지 14개 쿠키-미조족의 눈에 배신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14개 부족들이 차후에 꼼씨를 어떻게 처리할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사회적, 정치적 약자들의 생존을 위한 어쩔수 없는 선택이 서로에게 이해가 되며 의미있고 유익하기를 빌었다.
30주년 기념행사를 비롯한 모든 일정을 마치고 추르찬드푸르에서 임팔공항으로 가는 차안에서 꼼씨의 가이드와 운전에 대하여 거듭 감사를 하였다. 그 때 그가 말했다.
"처음에는 우리 꼼씨가 중립에 서게 된 것이 우리 생존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선생님께서 하신 일을 보니 하나님께서 선생님을 추르찬드푸르로 안내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 같아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려고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마지막 날, 버퍼존 최전선에 들어갈 때 우리 일행을 에스코트 하는 짚이 있었다. 사람들이 군복을 갖추어 입은 그를 "코만도"라고 불렀는데 그는 "꼼"씨였다. 그 버퍼존 일대가 꼼씨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산과 들이어서 꼼씨들은 지형지물을 다 파악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른 부족들의 시민방위군들은 입소와 퇴소, 교대하는 일 등에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는다. 산길을 달릴 때 산사태와 쓰러진 나무들 때문에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런 일처리도 무전기를 가지고 있는 코만도 꼼씨의 몫이었다.
꼼씨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하여 중립을 택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자기 마을과 집들을 잃지 않았고 그로 말미암아 최전선에서
시민방위군을 에스코트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중립 덕분에 임팔에서 티딤로드를 타고 여러 검문소를 지나 추르찬드푸르에 들어긴 용감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신학교 방문 30주년 기념행사를 사랑하는 학생들, 교수들, 여신도회 지도자들, 목회자들, 난민들, 이사들과 함께 치루며 위로와 치하를 분에 넘치도록 받았고 나의 사명이 끝난 자리에서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은밀한 새사명을 받았다.
꼼씨가 아니면 방문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방문하지 않았으면 지옥불에 그을린 난민들과 폭동의 좌절을 딛고 일어선 학생들, 시민 방위군들 그리고 에스더처럼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여신도회원들과 여성 결사대와 희생자 105인의 영령과 가족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살 수 없다고 절절하게 고백하는 교회 지도자들과 교우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내려가야하는 사명을 받지 못했을 것이니 꼼씨의 말대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2024년 9월 5일 목요일 축시
우담초라하니
최전선에 있는 작은 초소.
시민방위군들이 새를 잡아서 구워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