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04/200305]고교 은사님과 45년만의 통화
1975년 고등학교 3학년 문과시절, 한문漢文 과목을 ‘재미나게’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그동안 평생 잊지 못할 그 선생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지난주 토요일, 고향인 남원으로 귀향하여 제대로 된 전원주택을 짓고 우아하게 살고 있는 친구 부부와 즐거운 저녁자리를 가졌다. 그때, 그 친구(호 근봉槿峰)가 학창시절을 회고하다 그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얘기했다. 그때 배운 이백, 두보 등의 당시唐詩 10여편을 지금도 외우고 있다고 했다. 본인이 동양철학과 서예 등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선생님의 영향 때문인 듯했다. 유명 건설사 고급인력으로 사우디 등 해외에서만 온전히 직장생활을 했는데도 필력筆力이 20년이 넘는다했다. 잘은 모르지만, 글씨가 힘이 있고 좋았다. 지난해 고향집 상량上梁을 새로 올리며 부탁을 했는데, 선선히 들어줘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짝짜궁’ 난리가 났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은 언제나 진리이다. 선생님에 관한 이런저런 일화逸話를 얘기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삼국지三國志에서 유래된 고사성어故事成語들을 어찌 그리 재밌게 얘기해주던지, 지금도 귀에 박힌 듯 생생하니, 요즘에 뜨는 역사강사 ‘설민석’같은 스토리텔러storyteller였음이 분명하다. 어디 당시 뿐이랴.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 등 고전古典이 되어버린 명문장名文章들도 그분한테 배웠다.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시작하여 ‘오장원五丈原의 별’로 끝나는 삼국지 전체의 줄거리를 ‘읽지 않았어도’ 비디오를 본 것처럼 머리에 박힌 것은 순전히 그분의 구수한 입담 덕분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모습 하나. 귀거래사의 구절 ‘風飄飄而吹衣’ ‘引壺觴以自酌하고 眄庭柯以怡顔이라’ ‘倚南窓以寄傲하고 審容膝之易安이라’ ‘時矯首而遐觀이라 雲無心以出岫하고 鳥倦飛而知還이라 景翳翳以將入하고 撫孤松而盤桓이네’ 등을 설명할 때면,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되어 ‘머리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게’ 되고, ‘해가 뉘엿뉘엿’하는 석양 노을에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고 있는 듯했다. ‘倚南窓以寄傲’를 풀이할 때는 작달만한 키에 교실 창가에 뻐기듯 기대던 절묘한 제스처에 탄성이 나왔다. ‘술 한잔을 홀짝거리며 얼굴에 절로 피어나는 미소’도 그림이 충분히 그려졌으니. 원문 삼국지를 세 번이나 독파하셨다는 선생님의 내공은 완전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조차 외워 낭송할 때였으니, 위에 언급한 세 개의 명문장을 외워 선생님 흉내를 내며 읊어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친구들은 기가 질려 했지만. 지금은 ‘똥멍청이’가 되어 한 줄도 외우지 못하지만, 아-아- 그때가 그립다. “壬戌之秋 七月旣望에 蘇子與客으로 泛舟遊於赤壁之下하니 淸風은 徐來하고 水波는 不興이라 擧酒屬客하야 誦明月之詩하고 歌窈窕之章이러니 少焉에 月出於東山之上하야 徘徊於斗牛之間하니 白露는 橫江하고 水光은 接天이라 縱一葦之所如하야 凌萬頃之茫然하니 浩浩乎라 如憑虛御風하야 而不知其所止며 飄飄乎라 如遺世獨立하야 羽化而登仙이라…(후략)” ‘강을 비껴가는 흰 이슬과 하늘에 맞닿은 물빛’의 동양화 한 폭의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시라. ‘세상을 등지고 홀로 서서 날개를 돋치고 신선이 된 듯한’ 소동파와 감정이입이 되어보시라. ‘浩浩乎호탕하다. 허공에 기대어 바람을 부리니憑虛御風’ ‘飄飄乎표표하다. 날개가 돋친 신선羽化登仙이 되니’ 자자字字이 비점批點이요, 구구句句이 관주貫珠가 아닐런가. 세상에 어디 이만한 절창絶唱이 또 있으리오.
그래서 그때 결심했었다. 소식蘇軾에게서 문학文學과 낭만浪漫(멋과 맛)을, 도잠陶潛에게서 늙어가는 지혜智慧를 배우고, 제갈공명에게서 충성忠誠과 신의信義를 몸에 익혀, 이들을 평생의 멘토로 삼겠다고. 이제 와 생각하면 결국 반거들충이가 되었지만, 포부만큼은 거창했거늘. 이제부터라도 다시 그 꿈을 되살려, 이들의 삶을 살아볼까나. 아서라 말아라.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했거늘.
선생님이 자작自作 한시漢詩를 게재하신 고등학교신문 창간호(75년 11월 발간. 총 4면의 신문크기. 모교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를 최근까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사 도중에 잃어버린 것이 너무 아쉽다(소생의 최초 작문인 ‘어린 왕자’ 독후감도 실렸는데). 낚시광狂 선생님의 소회를 쓴 것으로 기억되는데, 만나뵐 때 45년 전의 그 신문과 그 한시를 보여드리면, 얼마나 기뻐하고 놀라실까. 아무튼, 나에게, 친구에게 10대 시절 “꿈”을 불어넣어주신, 훌륭한 선생님을 이제껏 찾아뵐 생각조차 않했다니, 우리는 ‘불량제자不良弟子임을 인정하며, 조만간 모시자고 의견 일치를 봤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그 자리에서 선생님의 근황을 안다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날(3일) 아침, 공원에서 운동하는 선생님께 우리의 얘기를 전했다며 휴대전화번호를 보내왔다. 참 좋은 세상이다.
어제 오후 처음으로 전화를 드렸다. 45년만에 듣는 은사님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하셨다. 물론 우리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무척 반기며, 전염병으로 온나라가 난리이니, 좀 가라앉으면 만나자 하셨다. 친구와 나눈 대화의 내용을 얘기하니 “그렁가? 그것 참.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안만나도 되네. 이렇게 가끔 전화만 해줘도 얼마나 반갑고 좋은데” “자네들은 어떻게 어디서 사시나?” “그런 것까지 기억하시나?” 제자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셨다. 우리보다 딱 스무 살 위로 37년생, 건강에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하신다. 반주도 한두 잔 하신다는데, 술 한잔 올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럼 그때 30대 후반이었을 터인데, 왜 그렇게 큰 어른으로 보였을까. 어떻게 늙으셨을까? ‘낭만의사’도 있다지만 ‘풍류風流선생님’으로 늙어가셨으리라. 일각여삼추 一刻如三秋. 만나뵐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