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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정말 조선 최악의 연쇄살인범인가?
사도세자는 정말 조선 최악의 연쇄살인범인가?
사도세자가 죽인 무고한 사람만 100여 명
아버지의 손에 의해 뒤주 속에 갇힌 채 죽은 비운의 사도세자-. 그 죽음의 방식이 하도 충격적이라 세인들의 동정을 받고 있는 사도세자이지만, 그가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물론 세도세자 외에도 조선조 왕자들 중 살인과 강간을 밥 먹듯 한 막장 인간들이 드물지는 않다. 그중에도 선조의 세 왕자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삼전도 굴욕' 인조의 아비) 등이 특히 악명을 떨쳤는데, 임해군은 현직 도승지의 첩을 뺏기 위해 자객을 보내 도승지를 암살하고, 그 자객들이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다시 자객을 보내 옥중의 범인들까지 죽이는 극악한 행태를 보였다.
순화군은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고 남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이 되는 이춘재급 연쇄살인마였으며, 어머니 의인왕후 상중에 빈전에서 어머니의 시녀를 겁간한 희대의 패륜아였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을 뛰어넘는 '규모의 살인'을 보인 것이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이었다. 한 나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세자가 어떤 연유로 연쇄살인범이 되어 젊은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 인생 행로를 한번 따라가보자.
사도세자 이선(李愃)은 1735년 후궁 영빈 이씨 사이에서 영조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양자가 되고, 친어머니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생후 1년 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영조 20년(1744)에는 후에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의 딸 혜경궁 홍씨를 정비로 맞아들여 둘 사이에 아들 이산(뒤의 정조)을 얻었다.
최초의 살인 기록
세자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지만, 차츰 나이가 들자 공부를 멀리하고 상궁들이 갖고 온 칼과 칼집을 가지고 전쟁놀이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전쟁놀이를 하고서도 공부를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말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했으며 사도세자에게 크게 꾸중했다.
영조는 관련된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 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가 죽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의하면 이 일로 인해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그 마음에 아버지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 영조는 호오가 뚜렷한 성격으로 자식 세자에게 거의 아동학대 수준으로 대했으며, 이로 인해 세자는 차츰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땅을 파고 들어가 눕거나, 골방에 틀어박혀 하루종일 나오지 않기도 했다.
세자의 살인 기록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해서였다. 세자는 아무 옷이나 입지 못하는 ‘의대증’이라고 하는 일종의 강박증을 갖고 있었는데, 옷을 한번 입으려면 옷이 열 벌, 스무 벌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 시중을 드는 사람을 죽여버렸던 것이다.
1757년(영조 33) 6월 어느 날, 옷을 갈아입는데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내관 김한채의 목을 베어서는 그것을 들고 궁 안을 돌아다녔다.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그때 사람 머리 버힌 거슬 보아시니."(<한중록>에서)
이날 세자는 김한채를 포함해 6명의 내관을 죽였다고 한다. 사람의 머리를 베는 잔혹성과 6명이나 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인 것으로 보아 이미 이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을 죽였을 것이라고 사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또한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사도세자의 병을 일종의 ‘분노조절장애’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노의 표적이 언제가 약자에게로만 향하는 선택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궁녀와 내시, 나인 등이 항상 애꿎은 희생자가 되었다.
1758년(영조 34) 2월 영조는 세자가 내관들을 죽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네가 한 일을 바로 아뢰거라."
"심화가 나면 견디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거나 닭, 짐승이라도 죽여야 낫나이다."
"어찌 그러하느냐?"
"마음이 상하여 그러하나이다."
"마음이 어찌 상하였느냐?"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시어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심화를 얻었나이다."
영조가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이제는 그리 않으리라."
끊이지 않는 살인의 습관
그러나 세자의 살인 습관은 그후로도 고쳐지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의 친모 영빈 이씨의 내인을 죽였으며, 물품을 늦게 가져온다고 내수사 담당 내시를 죽였고, 점친 게 마음에 안 든다고 점쟁이 맹인을 죽였고, 평양행 잠행을 수행한 중관(내시) 유인식을 죽였다.
1760년(영조 36) 7월에는 세자빈 혜경궁 홍씨에게 바둑판을 던져 눈알이 빠질 뻔할 정도로 다치게 했다. 이것이 어쩌면 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타가 된 듯하다. 아내와 장인으로부터 세자는 버려졌다.
1761년 1월에는 더욱 엽기적인 살인을 저질렀는데,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후궁 빙애를 손으로 때려죽인 것이다. 더욱이 둘 사이에 난 돌 지난 아들 은전군을 연못에 내던졌다. 다행히 아기는 연잎에 얹혔고 시중들이 급히 건져내어 목숨은 잃지 않았다. 이 정도면 거의 살인마의 호러물 수준이다.
세자는 이윽고 변태적인 면모도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와 비구니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성폭행하기도 했다. 때로는 때려서 피가 철철 흐르는 궁녀와 성관계를 해서 온통 공포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것이 혜경궁 홍씨의 증언이다.
"그 사이 내인들을 갓가이 하오시니 그 내인들이 슌죵티 아니하면 치오셔 혈육이 님니(줄줄 흐르는)한 후라도 갓가이 하오시니 뉘 됴화하리오."(<한중록>에서)
세자의 광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나중에는 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못된 짓을 하고 칼을 들이댔으며, 생모인 영빈 이씨를 죽이려까지 했다.
"세자가 중관, 내인,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박하원의 <대천록>에서)
이래저래 세자가 죽인 사람의 수는 거의 1백 여 명에 달한다고 하니, 조선조 최악의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도세자 제거 작전? ..나경언 고변 사건
세자의 살인과 기행은 1762년(영조 38) 일명 ‘나경언의 고변’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세자가 죽기 한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나경언은 대궐의 별감인 나상언의 형으로, 별감은 궁궐에서 호위나 수송 등 각종 심부름을 담당하는 직업이다. 나경언은 고변의 글을 희한하게도 세자의 장인 홍봉한에게 먼저 바쳤고, 홍봉한은 그것을 받자마자 영조에게 곧장 달려가 아뢰었다.
나경언은 영조가 연 친국에 불려나가 열 가지에 이르는 세자의 죄상을 담은 고변서를 영조에게 직접 바쳤다. 영조가 고변의 글을 읽다가 말고 "내 이런 변이 있을 줄 미리 염려하였다"고 하자 홍봉한이 "그 글을 두어 어디에 쓰겠습니까? 청컨대 불태우소서" 하여 영조는 그 말에 따랐다고 <실록>은 전한다. 증거 인멸일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경언 고변의 자세한 내용은 홍봉한과 영조 외에는 아는 이가 없으며,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고변자 나경언을 충직한 자로 보아 살려주려 했으나, 신하들이 나경언이 세자를 모함한 대역죄인이라는 주장을 하여 결국 그를 참수했다. 나경언의 고변에 대해 억울함을 느낀 사도세자는 나경언과의 대질을 요구했으나 영조는 이를 거부했다.
의문점은 더 있다. 세자가 반역을 도모했다면 그 배후와 관련자들에 대해 수사가 의당 따라야겠지만, 영조는 물론 어느 누구 하나 그 배후를 캐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세자만이 고변서의 배후를 캐보려 했지만 애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조는 세자를 꾸짖을 때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하고,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으니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할 일이냐?”하며 네 가지를 들었다. 절반이 넘는 고변서의 나머지 조항이 전해지지 않지만, 나경언이 처음 형조에 고변서를 바칠 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세자의 반역 혐의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일로 세자는 부왕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고, 영조와 세자 사이의 긴장이 극에 달했다. 1762년(영조 38)결국 세자의 친어머니인 영빈 이씨가 영조에게 나아가 세자의 죄상을 낱낱이 아뢴 후 “성궁과 종묘를 보존하기 위해 차라리 세자를 대처분하소서”라고 일렀다. 이때 영빈 이씨가 아들의 일을 고하며 한 말이 <한중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볼수 없는 일을 행한 것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으로 한도 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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