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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3일(주현절 후 일곱 번째 주일)
요한복음 13:31~38
주님이 주신 새 계명
하늘사랑교회 주일오전예배 설교문
4페이지 설교형식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모범을 보이신 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설교 목적: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을 지켜야 한다.
*초안: 2024년 3월 17일
*수정: 2025년 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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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이라는 유튜브 영상이 있습니다. 이 영상을 보면, 한 인사 담당자가 구직자들과 인터뷰를 합니다. 그런데 담당자는 그들에게 터무니없는 조건을 요구합니다. 일주일 내내 일해야 하고, 24시간 내내 마음대로 쉴 시간도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어떤 급여도 없다고 하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건 부당하고 미친 짓이라고 외치며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과연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인사 담당자가 답합니다. 존재한다고, 그것도 아주 많이…. 그들은 바로 ‘엄마’였습니다.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며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부모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지금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출처: 조재욱, 「물음에 답하다」(두란노, 2022); 「생명의 삶」(두란노, 2025년 1월호), 43쪽에서 재인용.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마시기 위해 카페를 들렀다가 우연히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엄마와 어린 딸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아마도 엄마의 몸속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장면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가 울먹이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 때문에 많이 아팠지. 엄마 많이 무서웠지. 엄마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었겠다.”
엄마가 대답합니다. “아니야. 엄마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어. 우리 딸의 얼굴이 보인 그 순간, 엄마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 우리 딸 때문에 엄마는 도망가지 않고 이길 수 있었어.”
여러분은 이 둘의 대화를 듣고 무엇을 느끼십니까?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출처: 김성경, 「안심하라, 하나님의 타이밍은 완벽하다」(토기장이, 2021);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2년 3월호), 203쪽에서 재인용.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던 중에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를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괴로운 마음으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절). 제자들이 수군거리자, 예수께서는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 사람이라(2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떡 조각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는데, 그때가 곧 “밤”이었습니다(30절). 여기서 ‘밤’은 시간상으로 늦은 시간을 뜻하기도 하지만, 가룟 유다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돈궤를 맡았던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으로 예수님을 팔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에 빛이 들어올 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번 가룟 유다의 어두운 마음을 지적하시면서 그가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신 여러 번의 소중한 기회들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마음은 마치 어두운 “밤”과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의 이야기도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는 바람에 여러 번 예수님의 꾸중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의리가 있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3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절).”
베드로가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말했을 때, 저는 이 말속에 그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8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철저히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받으실 때, 베드로도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습니다.
모닥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사람들은 두 번째, 세 번째 “너도 그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번번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급기야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곧 닭이 울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연약함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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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연약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제자들과 같은 연약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이 자기가 경험한 일을 솔직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친구들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연말이니 거국적으로 모여 ‘술 주(酒)’ 자(字), ‘주(酒)님’을 섬기자는 거였죠. 어둠에 빠진 저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이 피어올랐습니다. 약속한 날, 한 상 거하게 주문하려는 친구들을 말리며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했으면 좋겠다.”
친구들은 진지하게 제 말을 들어 주었어요. 예전의 저는 절대 남 앞에서 신앙이나 종교에 관해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 사람이 한 달 만에 완전히 바뀐 거죠. 그런데 그중 딱 한 사람, 지금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이러는 거예요.
“네 이야기 잘 들었다. 너무 좋은 이야기네. 그런데 우리 다들 모처럼 시간 내어 이렇게 모였으니 딱 한 잔만 하고 가자.”
맞는 말 같았어요. 그러자고 했죠.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밤새 술을 마시고 말았어요. 전도 대상자들이랑 밤새 술판을 벌인 거예요. 술에 잔뜩 취해 집에 들어간 때가 다음 날 새벽 네 시였어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정말 기분이 참담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하나님, 전 정말 안 되는 놈이에요. 솔직히 저 술 담배 못 끊겠어요. 죄송해요. 그래도 교회는 다닐게요.”
-출처: 김용준, 「미리 보는 기쁨」 (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17); 「생명의 삶 플러스」 (서울: 두란노, 2019년 1월호), p. 57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때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두려움’이라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꼴지였다.” 전 경북대 총장인 박찬석 교수의 자기 고백입니다. 그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었습니다.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학업도 못 따라가는 아들을 대구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아들은 대구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1학년 때 8반, 석차는 68명 중 68등, 결국 꼴찌를 했습니다.
아들이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성적표를 내밀 자신이 없었습니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낸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적표에서 석차를 1로 고쳐서 아버지께 보여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못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당시 그의 집은 동네에서도 가장 가난했습니다. 당연히 돼지는 재산목록 1호였습니다.
-출처: 김병태, 「하나님의 퍼즐」(브니엘, 201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0월호), 23쪽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때로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거나, 대충 둘러대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비록 저와 여러분이 가룟 유다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신하거나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연약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예수님께 큰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장차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도 알고 계셨고,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셨겠어요?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과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혹시 얽히고설킨 매듭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듯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들지는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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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한 배신을 믿음으로 극복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밖으로 나가자, 예수께서는 남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1절입니다.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31절).”
이 말씀에 보면, 두 가지 “영광”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영광은 ‘인자가 받으신 영광’입니다. 두 번째 영광은 인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신 영광’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나간 일은 예수님께도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자가 받으신 영광’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자기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광은 권력과 명예와 재물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추구하는 영광은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12: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실 영광은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듯이, 장차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일이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됩니다.
31절에서 우리가 주목할 표현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과거형으로 말씀하신 일입니다.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갔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 많은 열매를 거두는 일은 미래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미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장래에 확실히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과거형으로 강조해서 표현한 것입니다(다벨보크, 「복음서를 통해 본 예수」, 솔로몬, 2012, 820쪽; 김은신,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0년 2월호, 222쪽에서 재인용).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한 배신을 믿음으로 극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당할 때 부정적인 감정에 얽매여 자신의 본분과 사명을 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 어려운 일을 당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여러분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함부로 관계의 끈을 잘라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아픔이 오히려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마치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가룟 유다를 보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셨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은 68명 중 68등을 하고도,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버지를 속이고 성적표에 1등이라고 적어 놓았던 아들을 기억하십니까? 아버지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아들은 달라졌습니다. 항상 그 일이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년은 드디어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박 교수가 45세가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부모님 앞에서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요….” 순간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알고 있었다. 그만해라. 손자가 듣는다.”
아버지는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여셨습니다. 박사이고 교수이고 대학 총장인 아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아들의 나쁜 행동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땐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기다리시며 슬그머니 눈을 감아 줄 줄 아는 아버지, 한때의 실패와 실수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활용할 줄 아는 소년, 이 이야기는 우리네 가슴을 짠하게 만듭니다.
-출처: 김병태, 「하나님의 퍼즐」(브니엘, 2014);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10월호), 23쪽에서 재인용.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한 배신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비결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내 곁에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있더라도,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만 분명하다면 더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분명한데, 그 사이에 무엇이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새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35절).
과연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요 13:1). 과연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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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의 주님을 따를 때,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1900년, 의사이자 캐나다 선교사인 올리버 에이비슨은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선교 대회에서 한국 땅에 병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언더우드 등과 조선 최초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운영했는데, 인력도 턱없이 부족한 데다 시설도 형편없어 후원금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발표를 듣고, 한국 땅에 와 본 적도 없던 한 사업가가 병원 건립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후원했습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약 5천억 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어진 병원이 연세대학교 의료원 산하 세브란스 병원이었습니다. 그때 헌신했던 그리스도인 사업가가 바로 ‘루이스 헨리 세버런스’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평생 번 돈을 다 나누면서 살았고,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 한 채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헌신은 한 나라의 의료와 교육의 기틀이 되었고, 병원과 학교는 복음이 정착하는데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그의 가문에 큰 명예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상식이나 합리성을 따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주고 또 주고도 더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늘 계산하며 살고 계산에 밝은 인생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산을 포기하고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을 책임져 주시며 그에게 끝없는 복을 부어 주십니다.
-출처: 서정오, 「첫 마음으로 걷는 길」(두란노, 2022);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6월호), 143쪽에서 재인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실 정도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받고 살아갈진대,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을 우리의 가슴에 새기고, 오늘도 형제를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제자 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