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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5·6월호 특집 기사 중 한 꼭지인 윤상혁의 <전환을 위한 사유>를 깊이 공감하며 잘 읽었다. 그는 “여전히 많은 벗들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란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박복선 전 편집위원장과 ‘교육 불가능의 시대’의 화두를 처음 꺼내 보인 이계삼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다.
‘후쿠시마 재앙은 우리에게 탈핵을 요구하고, 탈핵은 우리에게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다. (....) 자연과 인간의 공멸이 현실화된 우리 시대의 최고의 비전은 ‘생태 사회로의 전환’이다. 교육은 ‘당연히’ 이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생태 수업만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 그러나 모든 교육 내용이나 활동은 생태론의 관점에서 이루워져야 한다.’(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위하여/박복선)
‘오늘날 학교교육이 맞닥뜨린 교육 불가능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리고 전환을 위한 사유를 시작하자. ’기도와 노동’,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번역인 ‘인문학과 농업’을 고민하자.(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이계삼)
그런 뒤에 윤상혁은 ‘데카르트적 사유의 세계’, ‘근대교육의 기회, 계몽주의’, ‘교육은 학교교육을 의미하는가?’라는 소제목만 보아도 대강 내용이 짚어지는 글들을 통해 지금의 학교 교육이 결국은 우리가 극복해야할 근대의 산물임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물론 그 일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님을 그는 잘 알고 있다.
“데카르트에 의해 시작되고 뉴턴에 의해 완성된 기계적 세계관은 수많은 현대 사상가로부터 비난을 받은 처지에 이르렀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여전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하며 예측 가능하고 무엇보다도 꼭 들어맞는다. 우리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직교 좌표계와 뉴턴의 미적분이 작동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교육의 ‘생태적 전환’은 고사하고 교육의 ‘전환’조차도 망설이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34쪽)”
이어서 윤상혁은 ‘데카르트 사유로부터의 탈피’, ‘생태적 사유의 탄생’, ‘생태적 사유, 우리 공동의 미래를 묻다’라는 소제목의 글을 통해 향후(근대 이후) 우리(인류)가 지향해야할 세계관(사상)은 근대 세계에 중대한 위기를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한 기계적 세계관이 아닌 체계론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생태학(Ecology)임을 시사한다. 그가 인용한 인도의 녹색환경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쿠마르의 생태학의 정의가 퍽 인상적이다.
에코스(Ecos)는 그리스어로 집이라는 뜻이다. 로고스(Logos)는 지식을 뜻하고. 노모스(Nomos)는 다루다라는 뜻을 가진다. 만약 우리가 지구를 집(Ecos)으로 인식(Logos)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둘(Nomos)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생태학(Ecology)는 경제학(Ecology)에 우선한다.(40쪽)
이어서 그는 1972년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 출간 소식을 언급하면서 생태학과 탈성장을 연결시킨다. “지금과 같은 추세로 세계 인구의 산업화, 오염, 식량 생산, 자원 약탈이 변함없이 지속된다면 지구는 앞으로 100년 안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되고, 아마도 그때가 되면 인구의 산업의 생산력이 가장 먼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급락할 것”이라는 것이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다.
그 후 30년이 지난 뒤에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그들의 예측은 거의 일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추세 역시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파국을 막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게 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도 있듯이 생태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관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기가 임박해왔다는 말도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생태적 사유의 실체는 뭘까? 그리고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윤상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세계관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계관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행동을 유발하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든다는 뜻이다. 인간의 사유와 실천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구조와 체제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사유해야한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 사유해야한다. 이를 위해 정치, 경제, 교육을 분절적이 아닌 통합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생태적 사유이다.”(42쪽)
“그럼 교육을 생태적으로 전환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우리가 생각하는 교육이 근대적 사유의 틀 속에 갇혀 있었다는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데카르트적 사유와 기계적 세계관으로부터 배태된 인간의 정치·경제 행위들은 결과적으로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불러왔다. 근대적 사유는 한계에 봉착했고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 학교는 계속 존재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내용 등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44쪽)
“피크 오일과 지구 온난화의 추세를 볼 때 ‘탈성장’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볼 때 탈성장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히 탈성장이 결핍, 불행, 파국의 동의어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지역사회가 되살아나고 문화가 다시 생명력을 얻을 기회가 될 수 있다. 탈성장 시대의 교육은 해방적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과 삶의 터전으로서의 장소 인식을 바탕으로, 생산적 탈성장과 두 없는 가치라는 생태적 규범을 제시하고,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는 자급자족적 삶의 기술을 전수하게 될 것이다.”(46쪽)
끝으로, 그는 탈성장 시대의 교육의 원칙에 대하여 데이비드 오어의 제안을 빌어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원칙 1. 모든 교육은 생태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원칙 2. 교육의 목표는 어떤 과목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정통하는 데 있다.
원칙 3. 지식에는 그것이 세상에서 올바로 쓰이는지 지켜볼 책임이 따른다.
원칙 4. 우리는 지식이 사람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할 때까지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원칙 5. 교육자와 교육 기관은 자신의 이상을 철저하게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원칙 6. 학습의 과정과 결과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여기까지 거칠게(하지만 나로서는 죽을힘을 다해서^^) 윤상혁의 <전환을 위한 사유>를 요약해보았다. 왜 나는 이 어쭙잖은 글을 쓰기 위해 죽을힘을 다 했을까? 그 이유를 나도 잘 몰랐는데 오늘 아침 카페에 올라온 오미(윤상혁)의 글을 읽고 나니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에드라 모랭이 제시한 <미래의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7가기 원칙>을 올려놓았는데,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이런 댓글을 달아놓았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에 대한 상이 잘 그려지지 않는 벗들이 많을 줄로 압니다. 그런데 과연 생태적 전환만 그럴까요? 쉬운 예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해결방안은요? 문제가 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하지만 그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교육의 생태적 전환도 이와 같습니다. 아니, 교육의 생태적 전환이 다른 모든 것에 선행하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왜 그는 이런 댓글(댓글을 본래 남이 달아 줘야하는 건데^^)을 달아놓은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남다른 절박감 때문일 것 같지만 그런 표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의 가슴 속 그림을 잘 묘사해놓은 문장을 오늘 아침 우연히 만났다. 그가 벗들에게 소개해준 파커 J 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 나오는 글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어려운 날을 겪지 않은 교사라면,
그런 날이 아도 무신경한 교사라면
이 책은 당신에게 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학생과 교직을 사랑하기 때문에 늘 열린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 교사들,
교직의 아픔과 환희를 동시에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교직의 아픔과 환희를 동시에 느끼는 사람! 아마도 윤상혁이 그런 사람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아픔보다는 환희를 더 많이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근대 교육의 한계나 모순이 조금은 덜 드러나는 전문계고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령, 나의 낭만적인 성격 때문이랄까?
아무튼 그의 글(편히 읽기에 좋은 군더더기 없이 글이지만 그도 죽을힘을 다해서 썼을 지도 모를)을 잘 읽어가다가 울컥 걸린 대목이 있었다.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 바로 이 말이었다. 언젠가 이계삼 선생님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을 때의 심정보다는 조금 약했지만 나는 한참 동안을 멍하게 앉아 다음 활자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는 말은 앞에서 소개한 이계삼의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에서 처음 등장한다. 아마도 윤상혁은 이것을 자신의 견해라기보다는 이계삼의 기존 주장을 간접화법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굳이 인용부호를 붙이지 않은 것은 이계삼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혹은 크게 이의를 달지 않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전제하다 보니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렇다고 학교가 의미 있는 공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지금 내 관심의 결은 조금 다르다.
갈수록 입시교육이 심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다수 인문계 고등학교가 학교로서 의미 없는 공간이 된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물론 여기서 ‘의미가 없다’는 말은 ‘그 정도가 심각할 정도로 상당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몇몇 개개인의 교육적 성취를 내세워 교육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대한민국 대다수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 불가능의 주된 원인이 ‘근대적 사유의 한계’인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데카르트적 사유와 기계적 세계관으로부터 배태된 인간의 정치·경제 행위들은 결과적으로 지구적 차원의 위기를 불러왔다. 근대적 사유는 한계에 봉착했고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
윤상혁과 윤상혁이 인용한 학자들의 이런 문제의식에 대해서 나는 충분히 공감한다. 또한 이런 진단을 바탕으로 교육의 생태적 전환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내게(아마도 모든 인류에게도) 복음과도 같다. 하지만 나는 이런 틀 속에서의 사유가 조금은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윤상혁이 미래세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근거가 되고 있는 기계적 세계관과 유사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물론 지나친 기우일 수도 있고, 그의 주장이 지면관계상 한 가지 진실을 말하다보니 다른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결과일 수도 있다. 그의 다른 글을 읽어보면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모든 교육담론은 결국 실천을 위한 담론이 되어야한다는 점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학교가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 원인을 제거하고 학교를 의미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등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인 논의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구체적인 실천담론이 제대도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사유는 한계에 봉착했고, 근대적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는 의미 없는 공간이 되었다”는 식의 거대 담론이 놓치기 쉬운 미세한 부분과 영역들은 섬세하게 포착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 사례를 발굴하는 일에도 주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그가 권해서 다시 읽고 있는 파커 J 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만난 두 대목을 소개하고 ‘죽을힘을 다해 쓴’ 리뷰를 갈무리할까 한다.
“진실된 진술의 반대는 거짓된 진술이다. 그러나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또 다른 심오한 진리가 될 수 있다.-닐스 보어”
“많은 교사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때,
교사의 내면 풍경을 파고드는 나의 시도는
엉뚱하고 부적절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교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요령과 기술을 말해주는 것이 더 실용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가르치는 행위는 인간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칠 것인가만 이야기했다.
이제 그 ‘누구’를 이야기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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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와 그로부터 분리된 객체인 세계라는 이분법이 지배하는 근대 인식론 의 한계를 지적한 것에 공감하구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신경생물학자 움베르토 마뚜라나의 주장을 인용한 대목이 눈에 뜨였는데, 몸으로 체화된 지식을 강조한 유교와 불교의 이야기와 통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생태학이나 생명사상으로 본 인간론이나 인식론을 우리의 전통사상으로부터 가져오면 어떨까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을 하늘이라고 주장한 최시형 같은 이 때문에 어린이날이 생겼거든요.
우리의 전통사상에서 생태적 사유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라다크에서 '오래된 미래'를 발견한 것을 교훈 삼아 저희도 생명사상의 인간론과 인식론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좋은 말씀이네요. 자연인다운.....
부족한 글에 이렇게 장문의 리뷰를! 죽을 힘을 다해 쓰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ㅎㅎ
죽을 힘을 다해서 쓰고 났더니 홀연 자유로움이 느껴지네요 이 맛에 길들여졌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