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4월의 두번째 집단상담 시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든 성인이라지만 일만하며 살 수 있나요?
'사랑하며 일하며' 제목처럼 살아갈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기를 기다립니다.
줌으로 만나요.
사랑하며 일하며
문은희_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 소장, 심리학박사, 계간 「니」 편집장
첫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그 순간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는 말은, 남달리 유난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뱃속에서 자라는 동안 온갖 증상들과 발길질까지 신비롭게 느끼면서도 정작 볼 수 없어 궁금했던 아기를 처음으로 대면했으니 말이다. 내 몸의 일부였던, 가장 익숙한데도 내가 아닌 새로운 존재,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에 오랜 진통도 곧바로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런 황홀경에 잠겨 넋을 놓고 있을 때 아기의 아빠가 곰곰이 들여다보다가 불쑥 말했다. “얘가 나중에 뭐 하면서 살게 될까?”
내 남편만 그랬을까? 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처음 교회에 나온 갓난아이를 안고 기도해주는 순서를 예배시간에 넣었었다. 복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내용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은 “이 아이가 자라서 무엇을 하든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주소서”였다.
일에서 성취해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세상의 문화에 매여있어서 아기 때부터 경쟁하여 이길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욕심을 부추기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런 기도를 기대하는 그리스도인 부모들도 문제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는 행동의 변화와 성취에 온통 마음을 쓴다. 아기가 언제 뒤집고, 얼마나 다른 아기들보다 빨리 자라는지 조급하게 기다린다. 낯가림할 때도 아기가 평균월령에 맞추어줄 것을 기대하고, 첫 발을 떼는 거나, 언제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게 되는가 하는 것에도 경쟁이 붙는다.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 우리 아이들은 더욱 심각한 전쟁(경쟁)터에 내몰리게 된다. 아니, 학교에 가기 훨씬 전부터 조기교육이라는 미명으로 너무나 일찌감치 경쟁의 쓴맛을 맛보게 한다. 마치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오직 경쟁하기 위해서라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심리학은 우리같이 이렇게 사는 것은 사람답게 건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공부만 하고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사랑하면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사람 아담이 혼자만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서로 돕고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사람 하와를 창조하여주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기능인 노릇하는 일은 혼자라도 되겠지만, 사람관계를 맺는 일은 혼자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사회관계가 필수인 것이다. 그러기에 모든 심리학은 사회심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감있게 자라서 독자적으로 성취하는 훈련을 거쳐 온갖 자격증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으로 좋은 남편이 되고 어진 아내가 되고 자애로운 부모가 되고 우애 깊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를 살릴 능력이 있다고 뽑힌 정치가가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정치에 실패한다. 보이지 않는 자기의 마음이 자라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읽을 줄 모른다. 공부를 아주 잘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문제를 쉽게 푸는 사람이 교사가 되면 어려운 문제를 쉽게 풀지 못하는 학생의 심정을 모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우리가 하는 어떤 행동에도 느낌을 짝지워 공유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혼자 느끼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것을 표현하고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느낌을 더욱 키워가야 한다. 느낌이 살아있는 어른이 아이를 대할 때 처음부터 느낌을 담은 눈빛으로 보아주고 품어주면, 그 아이는 어른의 느낌에 맞장구치는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 만든다. 아이가, 자기 느낌을 소중히 여겨주는 어른의 양육을 받으면 자신의 삶을 함부로 성의없이 낭비하지 않는다.
같은 일을 해도 즐겁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잘 할 수 있다. 지루하게 하면 힘만 더 들고 효과도 없게 된다. 그러기에 일과 사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면 즐겁게 하고 또 잘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아이가 건축학을 하고 자기가 정말 원하는 미술을 다시 공부했는데 그 아이 말이 바로 이것이다. “건축학 하며 밤새울 때는 ‘일(work)’로 했는데 미술 하면서 밤새울 때는, 밤새는 것은 같아도 ‘재미(fun)’로 했다”고 말이다.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기 위해 7년을 일하면서 그 긴 세월이 그냥 몇 날 같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일과 사랑이 겹쳐질 때 삶이 기쁘고 보람찬 것이 된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고개를 푹 떨군 채 일(과 공부)의 노예가 되어 재미없이 살고 있는 것 같아 슬프다. 일과 사랑의 느낌이 늘 함께 있어야 하는데, 일만 남고 사랑의 느낌이 사라진 탓이다. 어른들에게 느낌이 없으니 그 어른에게 양육받는 아이들의 느낌을 알아주지 못하고 살려주지 못하고 있다. 학교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아이답게 충분히 놀이시기(play stage)를 즐기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어른들은 그 기회마저 앗아가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아주 먼 훗날 어른이 되어 해야 할 “처자 먹여 살릴 걱정”을 벌써부터 주입한다. 미리 준비시킨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일찌감치 경쟁으로 몰고 간다.
우리말도 잘 하기 전에 영어를 시키고, 수의 개념이 생기기도 전에 구구단을 외우게 하여 오히려 공부에 질리게 만든다. 발달된 언어와 근육을 써서 지치지 않고 노는 것을 충분히 즐겨야 하는데 말이다.
마음껏 몸과 마음을 활용하여 온갖 실험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이들의 놀이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노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활동의 목적을 세우고 실험하고 결과를 즐기는 온 과정의 책임운영자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 호기심에 따라 활동의 자료가 선택되고, 놀이의 전체 과정의 주체자 역할을 아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파티를 기획한 사람이나 진행자의 지도를 받아 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진 장난감만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되어있는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달란트, 몸과 마음 그리고 온 영혼을 다 쏟아 스스로 환상의 놀이를 펼치는 것이다.
이렇게 놀아본 아이들은 학교교육이라는 훈련을 받아도 자신의 몸과 머리가 따로 분리되지 않는 공부를 스스로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장성하여 일과 사랑을 통합해서 뜻을 잃지 않고 살게 된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겨 혼자만 출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기적인 성취를 원하지 말아야 함을 성경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자(엡 2: 10)”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질로 잘 사는 것(doing well)보다,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선한 삶(doing good)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자 방식이어야 한다.
많든적든 우리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기쁘고 활기차게 키우면서 살아야 하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문제는 받은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열의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일에 대한 느낌을 가지지 못한 것이 바로 그의 문제였다. 느낌이 없으면 고인 물같이 정체되어 바뀌고 자라지 못하고, 궁극에는 썩게 된다. 그러니 그가 겨우 생각해낸 것이 땅에 묻어두는 짓거리였던 것이다. 주인의 뜻을 자기 나름으로 알고 있었다고 여겼던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던가. 일이 필수이고 사랑은 덤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랑이 필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추신) 내 큰아이는 지금 가난하지만 음악을 사랑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