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발생한 6월부터 경과를 쭉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사건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치게 됩니다.
이 추위 속에 나가 있는 시위자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을 몇 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 여중생 2명이 그런 끔찍한 사고로 목숨을 잃고 명확한 형사 책임자가 법정에서 가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고에 대한 미군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며 누구보다도 미국 정부 쪽에서 책임을 지고 나섰습니다.
주한 미군 사령관, 주한 미국 대사, 미국 국무장관, 국방장관, 그리고 미국 대사를 통해 전달된 미국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있었습니다. (미국 대사 사과문의 경우, 미국 대사관 홈페이지에 가면 지금도 게재되어 있습니다.) 일본이나 북한이 종군 위안부나 서해 교전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사과를 했던 적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효순이와 미순이게는 각각 2억원 씩의 보상금이 지급되었고 이와 별도로 주한 미군에서는 5만 달러의 성금을 걷어 전달했습니다.
현재 대통령 후보들이 SOFA 전면 개정을 외치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선거철의 전형적인 空約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굴욕적인 사대주의자들이어서가 아닙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한미 SOFA는 다른 나라들의 SOFA에 비하여 불평등하지 않습니다. 또한, 문제를 개선하는 데 있어 SOFA 개정 보다도 효과적인 방법들이 있습니다.
미국은 현재 한국을 포함해 80여 개국과 SOFA 협정을 맺고 있습니다. 나라들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지만 이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은 공무 수행시 발생하는 사건과 미군들 사이의 사건에서는 파견국인 미국측이 재판권을 갖는다른 것입니다.
이는 미국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들 사이에 통용되는 원칙입니다.
우리 나라도 현재 대테러전 지원의 일환으로 중앙 아시아의 키르기즈스탄이라는 나라에 지원 부대를 파견하고 있고 따라서 키르기즈스탄 정부와 SOFA 협정을 맺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와 키르기즈스탄 정부간에 맺어진 SOFA에서도 한국군이 공무 중에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한국군이 재판권을 행사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무 외의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측이 재판권을 가집니다.
또한, 과거 월남전 중에 파병된 우리 병사들에 대해서도 그 당시 월남 정부와의 사이에 비슷한 SOFA를 맺은 예가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한미 SOFA는 미일 SOFA, 미독 SOFA와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 나라 다, 공무 외에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파견국(미국)이 아니라 주둔국(한국, 일본, 독일)에서 재판권을 행사합니다.
실제로 흉악 강력 범죄의 경우 우리측이 재판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1992년의 악명높은 윤금이씨 살인 사건에서는 한미 합동 수사로 범인 케네스 마클 이병이 체포되었고 한국 법원에서 1심에서는 무기징역, 2심에서는 15년 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입니다.
SOFA 규정에는 미국측에서 재판권 이양 요구가 있을 경우 "호의적"으로 고려하도록 되어 있지만 말그대로 호의적으로 고려하고서 거절하면 그만입니다. 다시 말하면, 굳이 개정할 필요없이 현행 SOFA에서도 우리측이 마음만 먹으면 100%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우리가 1차 관할권이 있을 때에도 미군 측에 재판권을 이양할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이 중 70% 이상이 신호 위반과 같은 교통 위반이기 때문에 굳이 이들 전부를 재판에 회부할 필요를 우리 측에서 느끼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재판 행사권이 낮게 나오는 것도 그런 부분이 큽니다.
이에 반해 살인 등과 같은 중범죄에 대해서는 대부분 우리측이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외의 다른 사항들에 있어서도 한미 SOFA는 미일 SOFA, 미독 SOFA와 대동소이합니다. 주둔국 쪽에 재판 관할권이 있을 때, 미군 피의자 신병 인도는 우리 나라와 일본의 경우에는 기소 시점, 독일의 경우에는 후에 유죄 판결이 내려질 때입니다.
미일 SOFA와 달리, 한미 SOFA에 기소시 구속 수사 항목을 살인, 강간, 강도, 약취, 마약거래, 방화, 폭행 및 상해 치사,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 치사 등 12개의 중대 범죄로 제한한 것도 미군측에게 별다른 "특혜"가 아닙니다. 우리 사법계의 잘못된 관행 중 하나가 도주나 증거 인멸의 위험이 없는 경우에도 구속 수사를 남발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저는 우리 나라도 피의자 인권 보호 차원에서 불구속 수사 위주로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기소 후에 미군 피의자를 심문하지 못 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는데 이건 형법의 기본 상식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피의자를 심문하는 것은 재판 전에 하는 거지 재판 중에 하겠다고 하면 이건 웃음거리도 아닙니다. (지난주 KBS 토론에 외대 법대학원장 하고 있다는 이장X이라는 교수가 이런 기가 막히는 소리를 하기에 사족으로 붙입니다)
사건이 공무 중 또는 공무 외에 발생하였는가의 판별 문제의 경우, 우리 나라와 독일은 미군 장성이 결정하고 일본에서는 일본 법원이 정하는 걸로 명목상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세 나라 모두 양국간의 협의를 통해 결정됩니다. 이번 장갑차 사건의 경우, 누가 보아도 분명 공무 중에 발생한 사건이었습니다.
피의자 심문시 미국측 대표를 한 명 배석하게 한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독일이나 일본 SOFA에는 없기 때문에 불평등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경찰이나 검찰에서 구속 수사를 받을 경우 피의자가 변호사를 요구하면 피의자의 인권 보호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피의자는 강압 수사나 고문에 시달릴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권 선진국에서는 구속 수사를 할 때 피의자가 원하면 변호사를 배석시켜야 하고 우리 나라에서처럼 피의자의 자백만으로 유죄 판결이 나고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지난 달에 검찰청에서 발생한 살인 용의자 고문치사 사건만을 보더라도 이것이 왜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이나 일본에 없는 이 제도가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우리 나라의 인권 상황에 대한 불신이 많이 작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수사에 그렇게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군 대표는 변호사도 아니기 때문에 말그대로 그냥 옆에 앉아서 가만히 있는 게 전부입니다.
물론 운영 과정에서 미군측 대표가 자리에 없어서 수사가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때때로 발생하여 왔지만 이번에 한국과 미국 양국 정부가 마련한 SOFA 운영 개선안에서 이를 상설화하도록 실행 규칙을 고치기로 합의했습니다.
사실은 운영상에 문제 중에는 우리측의 준비 미비 문제도 있습니다. 미군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여도 우리 경찰에 통역이 없어서 일단 부대에 귀환시켰다가 다음 날 다시 소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한미 SOFA는 결코 한국에게만 불평등한 주권 침해 조약이 아닙니다.
판이하게 다른 법문화를 가진 우리 나라와 미국 사이의 조정 역할을 위해 만들어진 SOFA인 만큼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우리도 이해를 해야 합니다.
판사가 아닌 일반인들이 평결을 내리는 배심원 제도나 한 번 유죄 판결이 내려진 피의자를 같은 죄목으로 다시 재판할 수 없게 한 일사부재리 원칙은 이번 재판을 통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처음 접하였겠지만 영국이나 미국계 법을 따르는 나라들에서는 수백 년 동안 지켜져 내려온 사법계의 대원칙입니다. 또한, 다른 범죄들도 대체로 그렇지만 미국의 경우 과실치사의 경우도 유죄 요건이 우리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정부가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1994년 북부 이라크 지역에서 유엔 관리들을 호송 임무로 파견 중이던 미군의 블랙호크 헬기 2대가 미군 전투기들에 의해 격추 당하여 미군 26명의 사망자가 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격 명령을 내렸던 항공 관제사가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렸습니다. 결국 이 일로 형사 처벌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998년 이탈리아에서는 훈련 비행 중이던 미 해병대 소속 정찰기가 스키장 케이블카의 줄을 끊는 바람에 케이블카가 추락하여 20명의 탑승자들이 전원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공무 중에 발생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미군 법정에 정찰기 조종사 2명이 서게 되었는데 미 해병대에서 이들을 안전 규정 위반자들로 공개 선언하고 기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려 버렸습니다 (물론, 이번 장갑차 사건도 그렇지만 복잡한 사건 정황들이 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만).
이 판결에 대해서 이탈리아 정부는 즉각 유감을 표시했고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측에서 이 일을 가지고 SOFA 개정이나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의 케이블카 추락 사고와 우리의 장갑차 사고를 비교하면 몇 가지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 정부의 리더십 부재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그랬듯이 우리 대통령이나 총리가 상징적으로라도 재판 결과에 대해 강한 유감 성명 하나 내지 않은 게 저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우리 정부가 자국민 보호보다는 미국의 눈치 보기에 바쁘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물론 국민들이 SOFA 개정을 요구하고 이것이 불가능한 현실에서 정부의 운신이 좁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건 발생 당시부터 적극적으로 나서고 정부는 국민들의 편에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행동하고, 이와 동시에 SOFA 개정이 왜 불가능한가를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했다면 (물론 우리의 국민 정서를 가만할 때 쉽지 않았겠지만) 결과는 많이 다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판결이 처음 나왔을 때 법무부에서의 짧은 유감 표명이 아니라 외무부나 청와대에서 강한 유감 표명을 했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정반대로 대선 정국이라 그런지 모든 정치인들이 SOFA 개정을 외치고 있고 국회 차원에서 SOFA 개정 결의안을 통과시키려 한다고 합니다. 리더십을 발휘해 국민에게 설명과 설득을 해야 할 국민의 대표들이 대중에 영합해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지키지 못할 일을 추진하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합니다. 법무부 관리가 하는 한 마디와 국가 원수가 하는 말은 그 무게가 다릅니다. 김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SOFA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매우 민족주의적이고 감정적인 대응 방식입니다.
이번 판결에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고 이에 대해 항의를 표시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도 해외에서 가지고 있는 형사 재판권을 포기하도록 미국에 요구하는 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정부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데 이런 불가능한 요구 사항을 시위의 전면으로 내세웠으니 미국 측으로서는 이를 거부하던지 주한 미군을 철수하던지 두 가지 선택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미국 측에서 아무리 성의를 가지고 사과를 하거나 SOFA 운영 개선에 노력한다고 해도 미국은 한국을 우습게 본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사법 제도나 SOFA에 대한 기본적인 비교 분석도 없이 만들어진 요구 사항들을 온국민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한국이나 미국 정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초동 수사권 강화나 미군 훈련시 사전 통고 등의 SOFA 운영 사항 개선 등 보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요구를 했었더라면 양측 간에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 사촌 동생이었을 수도 있을 나이의 여중생 둘이 그렇게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가슴아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치에 맞는 접근을 하려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미군측의 엄격한 항공 규정 준수를 약속받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피해 의식과 열등감을 벗어 던지고 현실을 바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분단 국가이긴 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를 "우습게 보는"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전세계 12대 경제대국이고 우리가 전략 요충지에 위치해 있는 동아시아에서의 중요성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 합니다. 2년 동안 아시아 지역을 대표해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을 맡은 적도 있었구요.
제가 너무 법리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간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사실 맞습니다. 제가 시시콜콜해 보일 수도 있는 조약 세부 조항들에 대해서 일일이 법적인 논리로 설명하는 것은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을 개정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주장하기에 왜 그렇지가 않은가를 설명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저도 SOFA 개정론자들의 생각이 딴 데 있다는 것쯤은 압니다.
제가 보기에 진짜 문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대외 콤플레스에 있습니다. 우리도 이만큼 잘 살게 되었고 올림픽, 월드컵까지 치렀으니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 달라.. (마치 지금까지 다들 우리를 무시해왔다는 듯이) 이런 식입니다.
이런 자신감을 갖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2000년대의 자신감을 가진 우리 국민의 국제 감각은 아직도 60,70년대 수준이라는 데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을 "this man"이라고 부른 것을 놓고 우리를 우습게 본다고 거품을 무는 사람들을 보면 열등 의식의 발로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5년을 살았지만 그 말이 욕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동계 올림픽의 김동성 선수 금메달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직접 게임을 지켜보던 저로서도 짜증이 나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심판의 오심이었고 그것도 미국 심판이 아니라 호주 심판이었습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올림픽 경기에서의 오심은 누구 말마따나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고 마지막도 되지 않을" 정도로 흔한 일입니다. 그런데 멍청이 호주 심판의 실수를 가지고 (미국 선수가 득을 보았지만) "올림픽 테러"라고 규정하며 전국적인 미국 상품 불매 운동을 벌인 것은 제3자가 볼 때는 블랙 코미디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있지도 않은 "오노 인터뷰"들을 만들어내 사실인 양 인터넷에 유포시키는 인간들을 보면 할 말이 없습니다.
경기 후에 레노 쇼에 나가서 한 오노의 싸가지 없는 발언이나 이에 대한 미국 사람들의 호응이 기분 나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입장을 바꿔 우리 선수가 그런 식으로 금메달을 땄었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금메달을 내놓으라고 했을까요?
이번 장갑차 사건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사과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직접 한국에 있는 자국 대사를 통해 사과를 표했으면 그게 곧 직접 사과입니다. 95년에 오키나와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 클린턴이 일본의 자국 대사를 거치지 않고 사과를 한 것은 그때 그가 정상 회담 참가차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걸 놓고 마치 우리의 주권은 일본만큼 국제 사회에서 존중을 받지 못 한다던지 부시 더러 다시 한 번 "직접" 사과를 하라는 것은 외교 관례상 납득하기 힘든 생떼입니다. 국가 원수가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것보다 더한 사과가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미군 문제만 해도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미국과 꾸준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국민 전체가 얄미우리만큼 조용히 움직이면서 원하는 것을 얻어가는 일본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도 미군 쪽의 입장을 생각하고 때때로 배려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 반대일 때가 않습니다.
작년에 경기도 파주시에서 있었던 독극물 파동 같은 경우, 독극물 추정 물체를 미군이 발견한 후, 미군측에서 자기들만 대피한 채 한국측에게는 몇 시간 후에나 통지를 했다고 해서 우리 언론에서 크게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미군측에서 독극물 발견 1시간 후에 우리측에 이를 알렸지만 우리 공무원들의 늑장 대응으로 주민 대피가 늦어졌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식으로 정정문을 실은 신문은 제 기억에는 없었습니다.
용산 기지 이전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실 작년에 용산의 미 8군 기지를 서울 외곽 쪽에 위치한 송파 쪽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 중이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하기도 전에 한국군 쪽에서 언론에 정보가 새는 바람에 계획을 접어야 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실을 아는 우리 국민은 몇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외교라는 것은 어느 한쪽에서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피하며 천천히 타협해 나가는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이 전세계에서 욕을 먹는 것도 이런 상식을 무시하며 자국내 여론만을 고려한 일방 외교를 펴기 때문입니다.
불행히, 우리도 이번 장갑차 사건이나 중국과의 마늘 분쟁을 보면 상대편 처지는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비슷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군 범죄는 분명히 감소 추세에 있습니다. 1967년 SOFA가 처음 제정되기 전까지는 우리가 미군 측에 대해 재판권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통계조차 내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언제 북한이 다시 쳐들어올 지 모르고 60년대 초까지 정부 예산의 9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우리가 주한미군 범죄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하지만 우리 나라의 국력이 신장되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상황은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SOFA가 두 차례의 개정을 통해서 우리 측의 요구가 많이 포함되었고, 1970년 대에 연 2,000건에 달하던 미군 범죄가 현재 500건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미군 "범죄"의 구성도 많이 바뀌어 절반 이상은 속도 위반 같은 교통 법규 위반이고 또다른 20%는 교통사고법 위반입니다. 나머지 중에서 폭력이 연관된 범죄는 100건 정도 됩니다.
전체 사건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미군의 교통 위반에 대해서 일일이 우리 법정에서 재판을 하면 우리의 주권이 신장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한미 관계는 분명 대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우리의 주권과 목소리도 강화되고 있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우리측의 초동 수사 참여 강화와 같이 SOFA 개정 없이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서도 개선할 수 있는 사항들이 있고 뒤늦게나마 정부에서도 여기에 착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 2의 장갑차 사건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SOFA 협정 개정 말고도 얼마던지 있습니다.
이에 비해 공무 수행 중의 사건에 대한 재판권 이양과 같은 SOFA 개정은 불가능하며 근거가 약합니다.
혹자는 현재의 반미 시위를 잘 이용하여 미국을 압박하면 미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불만을 표시하고, 항의할 것에 대해 항의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것이겠지요.
문제는 미국 정부로서는 이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했다는 것입니다. 부시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정부가 나서서 공식 사과를 하였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재발 방지를 위한 대비책 마련과 SOFA 운영의 개선을 약속했고 현재 우리 정부와 협의 중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국 측에서는 SOFA 개정을 제외한 가능한 행동을 다 취했고, 우리로서도 미국에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였어도 받아들이기 힘든 SOFA 개정을 계속 요구하는 반미 시위가 계속되고 CNN을 통해 미국에서 중계될 경우, 이것을 바라보는 미국의 사회 지도층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우리 나라에 반미 감정이 있다면 미국 쪽에도 반한 감정이 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워싱턴에 반한 감정이 확산되면 우리에게도 좋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눈치 챈 사람들이 있을까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부시 행정부 각료가 북한을 비난한 적은 많아도, 공개적으로 우리 정부의 햇볕 정책을 비판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 외교 결례를 통해서 우리를 무시하거나 자극한다고 해서 미국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대북 문제만 봐도 한미일 간의 정책 공조가 없으면 일이 잘 풀리기 힘듭니다. 미국이 북핵과 관련해 대북 경제 제재책을 아무리 발표해도 좀처럼 먹히지 않는 것은 우리 정부가 대북 지원을 계속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북한이 진짜로 개방 경제 정책을 펼 생각이 있다고 해도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마찬가지로 미국의 협조가 없으면 일이 잘 풀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한국과 미국은 상호 협력이 필요한 관계입니다.
바꿔 말하면 한국내의 반미 감정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날아올 수 있다는 겁니다.
효순이와 미순이의 목숨을 앗아간 사고는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각종 시위대에서 요구하고 있는 SOFA 개정 사항들 중 재판권 이양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번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사항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광화문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책임있는 시민이라면 적어도 무엇 때문에 시위를 하는건지, 요구하는 게 뭔지 정도는 제대로 공부하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람들의 인터뷰를 보면 막연하게 SOFA가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생각만이 느껴집니다.
이번 촛불 시위가 과연 언제까지 갈까요? 몇 달, 아니 몇 주 후에도 그 행렬이 계속될까요?
결과는 생각지도 않고, 뒷감당도 못할 구호와 요구들만 남발한 채 슬그머니 사라질 대다수의 시위자들은 우리가 늘 무책임하다고 욕하는 정치인들과 뭐가 다른 거죠?
제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재판권 이양과 같은 SOFA 협정 개정에 매달렸다가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할 것이고, 다들 얼마 후에는 자포자기하고 잊어버리던지 우리 나라는 강대국들의 식민지라는 식의 열등감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중국의 탈북자 처리 문제, 일본의 왜곡 역사 교과서 문제 등에서 실용적인 전략을 짜기 보다는 한동안 시끄럽다가 우리 국력 탓만 하며 끝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