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베짱이 노크>/ 구연식
입추가 다가오니 폭염이 시샘을 하는지 위세를 더 부린다. 요사이는 아침저녁으로 입추가 기웃거리며 슬그머니 마실을 다닌다. 나이 든 세대들은 옛날의 책력(冊曆)을 뒤적거리고, 신세대들은 최첨단의 컴퓨터 기후 자료를 분석하여 계절의 흐름을 감지한다. 그러나 미물(微物)들은 조물주가 내장(內藏)해 준 칩(chip)에 의하여 염량(炎涼)의 시기를 용케도 알아채고 생애의 삶을 본능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가을의 최첨병으로 야생 풀벌레들을 들 수 있다. 베짱이류 등은 한해살이 곤충으로 여름부터 종족 번식을 위하여 촌음(寸陰)을 다투고 있다. 서식지는 강변 둑이나 논두렁의 초지를 즐겨찾는다. 새벽 4시쯤이다. 요즈음은 전에 없던 열대야와 올림픽 심야 방송 등으로 잠을 설치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시골집처럼 베란다에서 느닷없이 풀벌레 소리가 가느다란 가로등 불빛을 따라 처량하게 들려온다. 여러 가지 의문 들이 나를 일깨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20층 가운데 15층이어서 30여m의 높이인데 가냘픈 날개와 연약한 다리로 여기까지 어떻게 날아왔을까? 기어 왔을까? 이런저런 확인을 위해 불을 켜고 살펴보니, 울음소리는 금방 딱 그쳤는데 베란다 화분의 파피루스 줄기에 연초록색의 베짱이가 붙어 있다. 불빛과 나의 모습을 보더니 잠을 깨워 미안했는지, 파피루스 줄기를 보듬고 뒤쪽으로 숨고 있다.
우는 베짱이는 수놈인데 서리가 내리기 전에 부지런히 영역 확보의 경고음이 아니면, 정녕 암컷을 유인하여 종족 보존을 위한 세레나데인 게 틀림이 없다. 그런데 여기 베란다에서는 수컷 베짱이 혼자여서 종족 보존은커녕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이 인다. 작은 상자에 베짱이를 잠시 가두어 들고 내려가서 인근의 숲속에 놓아주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불을 켜고 부스럭거리는 나를 보고 아내는 볼멘소리로 투정을 한다. 베란다에 베짱이가 들어와 불쌍해서 숲속에다가 데려다주고 왔노라고 설명을 하고,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정신이 오히려 말똥말똥하여 잠을 내쫓는다. 베짱이는 울음소리가 베틀을 움직이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중국에서는 직조충(織造蟲)이라 이름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한자음을 훈으로 풀어서 순수 우리말인 ‘베짱이’라고 했다. 참 예쁜 이름이다. 그리스의 이솝(Aesop)은 인격화한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풍자와 교훈으로 인간 삶을 우화화(寓話化)하였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평생 일만 하는 개미와 향락만을 즐기는 베짱이를 대조적으로 비유하여 근면을 장려하고 향락을 억제하라는 바른 삶의 지침으로 제시했다. 거기에 덩달아서 후속편 동화도 많이 나왔다. 추운 겨울에 개미집을 찾아가서 구걸하다가 문전박대를 당하는 베짱이 모습 등등. 그러나 개미는 여러해살이 곤충으로 봄에서 가을까지 일하지 않으면 겨우살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조물주의 칩(chip)대로 얼굴은 까맣게 타고 허리는 잘록하게 굶어가며 사는 것이고, 베짱이는 한해살이 곤충으로 겨울 식량 준비가 필요 없으므로 지천으로 널려 있는 먹이를 포식하면서 연두색 연미복에 바이올린을 걸치고 자기영역을 지켜가며 종족 보존을 위하여 마지막 삶의 모습을 견지해 온 곤충이다. 멋모르고 베란다에 찾아온 베짱이에게 본래적 조물주의 삶대로 옮겨줘서 조금은 마음이 편안하다. 아파트 창문을 열어젖히고 아침 맑은 가을 공기로 채워봐도 조금 전에 가을을 달래주던 베짱이 소리와 그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 불현듯 1970년대 외신 언론 보도가 갑자기 떠 올랐다. 중국에서는 베짱이나 귀뚜라미를 풀줄기로 만든 곤충 집에 넣어주어서, 현대인들의 무미건조한 시멘트 정글 문화에 찌들어 살아가는 그들에게, 살아 있는 작은 애완용품에 착안하여 베짱이집 수출을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미국인들은 동양의 신비롭고 아기자기한 작은 생명체 문화에 매료된 채로 주문이 쇄도하여 미국에 베짱이 집을 수출하고 있다는 기사가 생각이 떠오른 거다. 그렇다! 아무리 최첨단 문명이 발전하여도 인간 본래적인 자연의 정서는 달리 돌려놓을 수는 없나 보다. 그런데 15층 베란다에 베짱이가 찾아와서 나에게 베짱이 나름의 한 해가 저물어감을 알리는 메시지 같아 반갑기는 하였지만, 나 몰래 앞서가는 세월이란 놈이 야속하기만 했다. 어찌 생각하면 만물의 영장이라던 인간이 하층 곤충인 베짱이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는 미래는 생각하지 못하면서 현재의 불만으로만 가득찬 내가 오히려 부끄럽다. 불만은 순간이고, 인내는 영원인 것을 짧은 베짱이 삶에서 배워야 할 것 같다. 요즘 신세대 문화는 ‘개짱이(개미+베짱이)’가 등장하고 있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며 베짱이와 같이 삶의 여유와 낭만으로 즐겁게 살자는 젊은이들의 퓨전 문화의 셈인 것이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개미처럼 살아왔던 나에게는 공감이 가는 생활철학이다. 그 옛날 어머니가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는 어머니가 쓰시던 손때 묻은 베란다의 길쌈 도구들이 오늘따라 어머니의 얼굴처럼 아른거린다. 어쩌면 베짱이가 어머니 대신 나에게 삶의 모든 것을 추슬러 보라는 성찰의 계기를 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2024.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