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원론
조성자
여기저기 부실해지다 보니 병원 출입이 잦아졌고, 약봉지가 식탁에 늘 있다. 의사의 충고인즉 면역력이 약해져서 그렇다 한다. 생전 신경 쓰지 않고 살던 면역력이란 말에 생로병사, 인생유한, 생자필멸 등을 떠올리며 철학자가 되어가지만, 할 수 있는 바를 해야겠기에 몸에 좋다는 약을 사 먹게 되었다. 오늘만 해도 일어나서 공복에 면역력 증강제 한 알 먹고, 비타민제 먹고, 식후 차가버섯 물 마시고, 좀 있다 신장에 좋다는 옥수수수염차 달인 거 한 컵 먹고, 오후에 동충하초 먹고, 비파고 한잔 먹고, 노니 주스까지 먹었다. 저녁 약속 자리에서는 거하게 한정식을 먹었다. 한 끼 몇 만 원짜리 식사를 하고 집에 와서 한약도 먹었다.
우리 역사에도 대 기근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고 이 시대에도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죄책감이 몰려온다. 집 사치 옷사치 명품 사치가 아니라 해도, 최소한 먹는 일에 호화로워질 때면 나도 모르게 반성이 된다. 나만 이렇게 잘 먹고 오래 살면 되는 건가. 자신의 건강을 생각하면 더더욱 좋은 걸 먹어서 아프지 않고 무병장수하고 싶지만, 하루 종일 몸뚱이 속에다 집어넣는 음식들을 종합하자니 지나치단 생각이 든다. 멋이라곤 없다. 통속적이다. 이기적이다.
이리 먹고 자리에 누우니 정신은 불안해진다. 때마침 유니세프에 후원하라는 티브이 광고가 나온다. 작년 한해 기아로 죽은 어린아이 숫자가 아프리카에서만 300만이라 한다. 지구 이쪽에 태어난 나는 딱히 병이 난 것도 아님에도 면역력을 높인다는 구실로 이것저것 몸 사치를 하고 있고, 저쪽에서 태어난 저 아이들은 죽 한 그릇을 못 먹어 배고프다 죽어간다. 어떤 이가 아프리카 기아 현장에 다녀오면서 오던 내내 비행기 안에서 울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아니다. 나보다 훨씬 더 사치하는 인간들이 많을 것이다. 몇 백만 원짜리 영양제나 몸보신 거리에 돈을 팡팡 쓰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일이만 원하는 감식초를 먹는 것은 죄가 아니다. 지금 내 몸을 위해 약간의 돈을 쓰는 것이 나중에 병원 다니며 큰돈 지출해야 하는 경우보다 경제적이며 현명하다. 건강식품 몇 가지 먹는 것은 결코 사치라고 할 수 없다. 몇 억씩 들여 해외 병원까지 찾아가는 인간들도 있다지 않은가. 나는 장일순 선생께서 말씀하신 ‘국민 평균 재산 소득치의 아래쪽’에 속하는데 내가 왜 죄의식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모르고 산다면 괜찮기도 했으련만 나 혼자 보약 먹으며 생기는 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언짢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불평등을 못 느끼는 것이 최고의 경제라 하였거늘 오늘날 인간이 사는 현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지나친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국가 간 개인 간의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불평등으로 인한 불만과 불안이 모든 사회에 팽배하다. 작금의 크고 작은 내란이나 전쟁도 경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도 이를 제대로 해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개인 재산의 증가를 목표로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본다. 모두들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은 재산을 갖고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일에 끝이 있겠는가. 결국은 행복해지지 못하고 끝날 일이 아닌가. 답은 있는가.
[백록원]이란 중드에 감동적이 장면이 나온다. 가뭄이 들어 온 마을이 굶주리게 되자 있는 자들이 가진 재산을 내놓아 ‘죽창’을 여는 대목이다. 머지않은 과거에 저런 식의 경제가 있었다는 사실에 흥미가 새로웠다. 그보다 더 오랜 옛날 더 멋들어진 경제판이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중 치누크 족의 경제 방식인데, 나는 이를 ‘경제학 원론’이라 부르고 싶다. 인디언들의 멋진 점이 어디 한두 가지던가. 1월, 2월... 등에 이름 붙이는 것도 철학적이고, 사람 이름 짓는 것도 문학적이다. 그들의 생활에 관한 책들을 읽노라면 역사 이래 생존한 인간들 중 가장 우수한 종족이라는 확신이 든다. 어떤 예술가가 “친구란 나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는 식의 멋진 표현 이상을 내놓은 적이 있단 말인가.
경제학 원론은 이렇다. 치누크 족에 여러 마을이 있었을 것이다. 10개 마을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한 해 추수량을 계산해서 1등부터 꼴등까지 성적을 맨다. 이때 1등 마을은 내년 일 년 먹을 최소량의 식량만 남겨두고 모두 꼴등 마을에 주어야 한다. 법이 그랬다. 상상해 보라. 열심히 일했는데 “재수 없이” 일등을 하는 바람에 일 년 치 농사를 거의 고스란히 꼴등에게 바쳐야 하다니. 울고불고 했을 수도 있다. 1등 난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하고 저주했을 수도 있다. 재미있지 않는가.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꼴등 마을은 또 어땠을까. “아, 다행이다. 9등이나 8등 할 뻔했잖아. 꼴등 나서 너무 좋다”라며 희색만면하여 신바람을 냈을 것이다.
아마 추수감사절 정도에 ‘증여’식을 치렀을 것이다. 이를 포트래치(Potlach)라 불렀는데, 오늘날 미국식 포틀럭(potluck) 파티의 어원이다. 일 년 중 부족이 치르는 가장 성대한 잔칫날이었다. 치누크족 족장님이 이때 떠억 하니 등장하신다. 지혜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신 족장께서 축사를 하신다. 요지인즉, 일등을 한 마을(이를테면 ‘다퍼주’ 마을이라 이름 붙이자)에 대한 극진한 찬사다. 다퍼주 마을 사람들의 근면과 자비를 칭찬하고 당신들의 명예는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 칭송한다. 이에 온 부족들이 즐거워한다. 꼴등을 한 ‘암시랑토’마을 사람들은 자기들도 내년엔 꼭 일등을 하여 빚도 갚고 명예도 누리겠다고 단체 결심을 한다. 주는 자 받는 자가 서로 당당하다. 피 터지는 경쟁 사회가 아니다. 재산이 많다고 거만할 수 없고, 없다손 비굴하지 않다. 밥 먹고 사는 일 이외의 소중한 가치를 경험한다.
자, 어떠한가. 현대의 우리네와는 이미 아득히 멀어져있는 동화 속 이야기 같은가. 집단 공동체에서만 가능할 법한가. 개인 재화의 최대화라는 자본주의 경제와 한참 다른가.
이런 식으로 수천 년을 살다 보니 그들의 후손들은 무의식중에 1등이란 꼭 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관념이 자연스레 고정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식들이 학교에 다닐 때도 혹시 성적이 1등으로 나왔을 경우 그 근심은 컸을 것이다. “아이고, 어쩌다 일등을 한 거니? 걱정이네” “일등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타일렀건만 왜 엄마 말을 안 듣는 거니?”등등.
조그만 사치에도 마음이 언짢아지는 나에게 인디언의 피가 섞여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험악한 경제 뉴스를 읽을 때마다, 벌어져가는 빈부의 격차를 실감할 때마다, 마음속에 늘 떠오르는 게 나의 경제학 원론이다. ‘스카이 캐슬’?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2020년 10월 발간된 [에세이스트 연간집] 수록작품임.
첫댓글 잘 있제?
나도 쩌기 중에서
몇가지라도 먹어야겠네~
경제적으로 살라믄...ㅎㅎ
ㅋㅋ작년 봄에 쓴 글인데, 청탁에 낸 글이네.요즘은 저리 안묵네.삼시세끼 코리안스탈 밥만 묵고사네.잘지내다 보세,은교.
아프면 찾게 되는 게 있지..나이 드니 건강이 젤로 걸림돌이란 걸 느끼네
나도 늦은 밤 티비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이 굶주린 모습을 모면 훌쩍거리며
아메리카노 대신 믹스 커피를 마시며 차액 후원을 하게 되더라고..
반노회동해봄세나 우리.
밥이 보약이라 하지만 남이 해주는 밥이 아니라 밥맛이 없어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려면 여러가지 알약을 찾게 되어요
암튼 갖가지 예방접종만이라도 빠짐없이
하고있음
이번꺼 맞았쑤?
지금까지몸에좋다는거한번먹은적없고
먹던것도이게어디에좋다하면그날부터딱먹기싫어지는나는특이체질인가?
건강검진,예방접종한번안했으니경제적인건가?
아프면그때치료하고아님말고.
나먹고싶은거먹고가고싶은데가고그때그때재밌게살고 ㅎ
진정한 자연인이시!
“일등 하면 안 된다고 그렇게 타일렀건만 왜 엄마 말을 안 듣는 거니?”
이런 세상은 존재할까
점점 우울해지네~
그나 조작가 사진이라도 올려보세
얼굴이 가물가물
2020.10.28.A.M1:19 라벤다여~~
ㅎㅎ선경이여전하구만. 폰을새로사서 나도한번 셀카를찍어보았어
뺀안해지면 셀카 찍음세.못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