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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류열풍 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꼬마니체
1944년 6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발동하여 독일 중앙집단군을 섬멸합니다
독일군의 전선에는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고 소련군은 그곳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기 시작하죠
7월에 이르자 바르샤바에 소련군의 포격소리가 들릴정도로 진격해 들어옵니다
바르샤바의 민중들은 이것이 독일에게서 해방될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하지만 폴란드인들의 독일의 지배뿐 아니라 소련의 지배도 원치 않았습니다
오래된 역사문제뿐 아니라 소련이 바로 몇년전 카틴숲 학살을 통해 폴란드의 지식계층 15000명을 학살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영국에 피난가 있던 폴란드 임시정부는
폴란드 국내에 저항운동을 벌이던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에게 봉기를 지시합니다
스스로 독일군을 몰아내서 소련의 입김을 차단하려는 생각이었죠
그리하여 1944년 8월 1일 폴란드 국내군은 바르샤바 시내에서 봉기를 일으킵니다.
폴란드 국내군 사령관 볼 코모로프스키(Tadeusz Bor Komorowski) 소장
8월 1일 5시를 기하여 바르샤바의 국내군은 볼 코모로프스키장군의 지휘하에 독일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합니다.
또한 수많은 시민들이 이에 가세합니다
순찰대에겐 총격이 가해졌고 차량에는 화염병이 날아들었으며 시내에 바리케이트가 만들어져 독일군을 고립시키기 시작합니다
이 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3시간만에 시내의 독일군들은 소규모 부대단위로 포위당했으며
주요 시가지의 대부분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죠
바리케이트 건설을 돕는 여성들
처음에는 소총이 모자라서 애를 먹지만 봉기 2일째에 독일군 보급창을 터는데 성공하여
제대로된 무장을 하기 시작합니다(이 과정에서 시민군 2500명이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소총과 기관총뿐 아니라 군복, 판터전차 2대와 Sd.Kfz 251 하노마그 장갑차 2대도 포함이었습니다
다만 군복이나 무기가 독일군과 동일하다보니 피아식별을 위해 팔에 적과 백 두가지색의 폴란드 국기를 두르죠
1944년 8월 5일 바르샤바에서 촬영된 폴란드 국내군
노획한 독일군복의 팔에는 폴란드국기를 두르고 있다
이에 스탈린은 좀 기분이 찝찝한 상태였습니다
폴란드는 전쟁의 전리품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영국에 있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는 폴란드 국내군의 봉기는 눈엣가시였죠
왜냐면 자기도 폴란드를 위성국가화하려고 벌써 임원까지 다 뽑아놓은 상태였거든요
마침 부대들도 재편이 필요하다고 하고 그러니 8월 2일 진격을 멈춰 버립니다.
게다가 영국정부가 바르샤바의 봉기군에게 보급을 해주기 위해
수송기가 소련의 공항을 경유할수 있도록 요청하지만 스탈린은 그것도 거절합니다.
이걸로 사실상 봉기군의 운명은 끝났다고 봐야겠죠.
소련군이 진격을 멈추자 여유가 생긴 독일군은 바르샤바의 봉기군에 대한 진압에 들어갑니다.
"폴란드 돼지들의 도시를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고 인정사정 없이 여자건 아이건 다 죽여라"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지시하에
시내에 아직 고립되어 있던 독일군을 구출하고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인근에 있던 SS부대들이 시내로 진입합니다
SS딜레방어와 SS카민스키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29 SS무장척탄병사단 "러시아 1(1st Russian)" 혹은 "카민스키 여단" 사단마크
이들은 소련군 포로중 전향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소련군과 독일군의 나쁜점은 모두 모은 부대로 유명했다
바르샤바 공방전에서 전투는 안하고 약탈과 강간만 일삼다 카민스키 여단장이 총살되었다
그리고 공방전이후 해체되어 30 SS무장척탄병사단 "러시아 2"로 재편되는데
역시나 도찐개찐이라 사단장을 맡은 장성이
"이 인간쓰레기들이 군인인지 산적때인지 도저히 알수가 없다" 라고 병력인수를 거부 할 정도
36 SS무장척탄병사단 딜레방어(Dirlewanger)사단마크
이 부대는 강도,강간,절도,살인등의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부대였고
심지어 정신병력자까지 받아들인 말그대로 "미친"부대였다.
수많은 학살과 전쟁범죄를 저지른걸로 유명한데
애초에 사단장이던 "오스카 딜레방어"도 전쟁전부터 연쇄강간마였다.....
전후 사단장 오스카 딜레방어는 폴란드에 인도되어 구타,고문후 살해되었다.
예...이 사단 설명에서 볼수 있듯 막장 of 막장 부대였습니다...
진압군 총사령관을 맡은 에리히 폰 뎀 바하 SS중장은 그나마 좀 상식이 있는 상황이었죠
그는 일단 시 외곽의 시민 60만명을 소개시킨뒤 위의 두 사단을 선봉으로 시내에 진입시킵니다.
학살당한 바르샤바 시민들
이 두 막장단은 바르샤바에 진입한 첫날인 8월 5일부터 살육과 약탈,강간을 개시하는데
딜레방어사단은 볼라와 오코타지구에 진입한 첫날에만 38000명의 시민을 학살합니다.
특히 볼라지구의 세인트 라차루스병원에서만 1380명의 환자와 의료진이 처형될 정도였죠
그런데 정작 진격한 거리는 겨우 1킬로였습니다.
말그대로 전투는 뒷전이고 모두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하는게 목적인 상황이었죠
그렇게 봉기 초반에 학살된 바르샤바 시민만 65000명에 달했습니다.
바르샤바 봉기에는 폴란드인도 유대인도 없었습니다.
공중에는 독일공군의 폭격기들이 폭격을 퍼부어대는등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독일군이 애썻지만
그러는 가운데 독일군의 만행을 목격한 수많은 시민들이 국내군에 가담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바르샤바시내에 있던 게토와 강제수용소를 개방하여 유대인도 봉기군에 합류합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국내군을을 위한 무기를 맨손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수류탄, 박격포,화염방사기, 심지어 장갑차까지 자체적으로 만들어 냈죠
붉은색으로 감싸진 곳이 시민군이 8월 4일까지 장악한 지역
8월 8일 봉기군은 자체 라디오 방송 "섬광"을 개통하고 국민들에게 독일군을 폴란드에서 몰아낼 것을 촉구합니다.
8월 둘째주에 접어들자 독일군의 진압작전은 본격적이 됩니다
독일군 19기갑사단이 진압군에 증원되었으며
전차까지 동원한 진압작전은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차와 장갑차 9대가 격파되며 실패로 끝났는데
이에 독일군은 전차와 장갑차에 바르샤바시민들을 묶어 인간방패로 사용하는 악독한 짓까지 저지르죠
봉기군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공군과 기갑부대까지 동원한 독일군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정수시설을 빼앗겨 시내로의 수도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러자 봉기군은 시내에 우물을 파서 버티는데 9월까지 90개의 우물을 만들어냅니다
남녀노소 모두 봉기에 참여해 독일군과 싸웠습니다.
8월 14일에 이르자 양군의 최전선이던 시외곽의 구시가지에서 봉기군은 거의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정석적으로 포병과 기갑, 보병이 연동하여 건물 하나하나를 아예 박살내가며 봉기군을 조여오고 있었죠
결국 구시가지를 포기한 봉기군은 하수도를 이용해 탈출했는데 독일군들은 시가에 남아있던 시민들을 모두 처형했으며
특히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야전병원의 부상자와 의료진들은 산채로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 구 시가지의 전투에서 봉기군은 7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독일군은 39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8월 17일에 다다르자 독일군은 완전히 바르샤바를 가루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합니다
바로 칼-마우저 600mm 자주박격포와 150mm 브룸베어 자주포, 로켓발사기를 단 하노마그 장갑차,
그리고 원격조종 대전차폭탄 골리아테를 동원한 것이었습니다
600mm 칼-마우저 자주박격포의 일격으로 격파되는 건물
9월에 접어들어 영국과 미국은 폴란드 국내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합니다.
뭐 사실 영국,미국과 함께 싸우던 자유폴란드군과 소련군과 함께 싸우던 동방군단을 합치면
미국,소련,영국에 이어 4번째로 참전 규모가 큰 국가였지만 말이죠..(자유프랑스군은 폴란드군보다 더 적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향후 폴란드를 먹는데 문제가 생길수도 있는 관계로 인정을 거부합니다.
이때 독일군도 몸이 달아있었습니다
언제 소련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데 후방에 몇개사단이나 발이 묶여 있으니 답답할만도 하죠
그래서 독일측 사령관인 폰 뎀 바하 SS중장은 유화책을 겸용하기로 결정하고
폴란드 적십자와 협의하여 9월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무고한 시민은 도시를 떠나라는 포고를 내리고
이에 따르는 수천의 시민이 탈출하는 2시간동안 사격을 멈춤니다
또한 봉기군에게 항복을 권하지만 봉기군은 항복을 거부합니다.
9월 11일 소련군에 속해있던 폴란드1군이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바르샤바 외곽을 지키던
독일 19기갑사단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정면으로 뚫고 들어갈수 없게되자
야음을 틈타 수일에 걸쳐 수천의 병력을 바르샤바시내로 침투시키려 하지만 얼마후 발각되어 격퇴당하고
일부만이 바르샤바로 진입하여 봉기군에 가담할수 있었습니다.
바르샤바시내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SS"딜레방어"의 병사들
소련은 이제서야 생색을 내며 연합군의 공항이용을 허락하였지만 이미 봉기군은 핀치에 몰린 뒤였습니다
미공군소속의 폭격기 110대가 9월 18일 바르샤바 시내에 보급품을 투하하지만
이미 바르샤바시내의 많은 지역이 제압당한 상태라 20%만이 봉기군의 손에 들어올수 있었습니다.
또한 소련도 공수로 보급해주겠다고 선언하고 수송기를 날리지만
실상 이건 보여주기식의 선언이었고 한줌밖에 안되는 보급품을 공수해줬는데
당시 봉기군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나마도 낙하산도 안달고 떨궈서 총기류는 모두 고장이 났고 총탄은 모두 흩어졌으며
빵은 마른빵을 보내서 땅에 떨어지자 마자 가루가 되버렸다고 합니다.
건물안에서 저항하는 봉기군을 화염방사기를 동원해 진압하는 독일군
9월 중순이 지나자 독일군은 핀치에 몰린 봉기군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위한 공세를 펼칩니다
9월 27일 3일간의 전투끝에 모토코프를 함락시키고 야전병원의 국내군 부상병과 의료진을 모두 처형합니다
모토코프에서 탈출하던 150명의 봉기군 병사들은 길을 잘못들어 독일군진지로 들어갔다가 생포되어 총살당했습니다.
이러한 공세를 펼치면서 폰 뎀 바하 사령관은 항복하면 제네바협정에 의거하여 처우를 해주겠다고 방송합니다
다음날인 28일 드디어 항복에 대한 양자간 협상이 시작되는 가운데
29일에는 촐리보르츠가 함락되면서 봉기군은 절벽끝으로 몰리게 됩니다.
10월 2일 부터는 모든 교전이 중지되고 최종 협의에 들어가는데
이러는 가운데 봉기군은 항복의 준비를 합니다
바로 전사자들의 신분증등을 소련군소속인 폴란드1군 병사들에게 맡기고 탈출시켜서
그들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게 하고 함께 싸웠던 유대인들에게 위조신분증을 만들어주기 시작한것이었죠
폰 뎀 바하 SS중장에게 항복하는 코모로프스키 소장
고통과 분함 그리고 좌절감이 사진만 봐도 느껴진다..
그리고 10월 5일 조건부로 완전히 항복을 합니다
항복조건은
1. 항복한 시민군은 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로서 대우할 것
2. 포로들의 관리는 친위대가 아닌 독일 육군에서 담당할 것
3. 비전투원인 일반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
이었습니다.
사실 시민군들은 군복만 벗으면 일반 시민과 다를바없었지만 시민군들은 스스로 포로가 되는 길을 택하고.
그렇게 포로가 된 시민군은 15000명에 달했습니다.
시내에서 나온 일반시민 33~55만명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으며
그중 9만명은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일부 국내군 병사들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채 하수도에서 전투를 벌이다
화염방사기를 동원한 독일군의 소탕작전에 스러져 갔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은 전 도시에서 시민들을 소개시킨뒤 모든 건물을 돌면서 남김없이 약탈하고
약탈이 끝나자 히믈러의 지시에 따라 바르샤바 시내에 폭약을 설치하여 폭파...
바르샤바라는 도시를 말그대로 지도상에서 지워버렸습니다.
(당시 약탈물은 화차 3만 3천대 분량에 달했습니다)
다음해 1월 7일 폴란드1군이 바르샤바에 진입했을때
바르샤바는 도시의 85%가 파괴된 아무 생명도 없는 돌더미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에서 희생된 시민은 총 20만에 달했으며
이렇게 폴란드의 저항세력은 뿌리뽑히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5년뒤인 1970년 12월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바르샤바의 위령탑 앞에 무릎을 끓고
자신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걸로 희생자들의 원혼도 조금은 위로 받았을까요....
이봐 친구들이여 총검으로 무장하자
길고 먼 길로
뜨거운 가슴에, 손엔 카빈소총을 들고.
총검을 들고 포탄 속으로 가자
여명이 밝아온다. 바람이 불어온다.
폐가 펌프질하고 피가 뜨거워진다.
노래가 우리사이로 퍼져나간다.
앞으로 전진 하는 행군 속에. 하나, 둘, 셋.
머리 위로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반짝인다.
흰 견장은 먼지투성이의 길 위에 있다, 긴 밤과 낮 동안.
새로운 폴란드의 승리가 우리에게 달려있다.
앞으로 전진하는 행군속에. 하나, 둘, 셋.
친구들이여....
-봉기당시 시민들이 부르던 노래중에서...
ps 바르샤바 봉기를 다룬 영화로는 "피아니스트"와 "업라이징"이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봐두시는 것도 좋겠네요
그리고 대한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도....
실시됐더라도 잘못되면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만 그런걸까요...
첫댓글 정말 존경스럽네요...
구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몰락이 폴란드 자유노조 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봐도...
폴란드인의 자주정신은 존경스럽습니다...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고 한국 전쟁으로 무너지고...그러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민중 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성취한 한국인들에게는 더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잘 봤습니다....그당시 독일의 광기는 정말 지금의 독일 모습을 보면 상상이 안갑니다만 엄연한 현실이고 그들 스스로 받아들였죠...섬나라 원숭이들과는 달리....자유를 위해 싸운 폴란드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와....일본놈들이나 독일놈들이나....진짜 인간이 할짓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