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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에페 1,15-23
복 음 : 루카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언젠가 아는 지인이 좋은 포도주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자그마치 30만 원이 넘는 고급 포도주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들 모임에서 이 포도주를 내놓았습니다.
인터넷 검색 결과를 보여주면서 아주 좋은 포도주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포도주의 맛을 본 신부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맛이라고 칭찬하더군요.
만약 이 포도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포도주잔이 아닌 종이컵에 따라 주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맛을 음미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훌륭한 맛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싸고 귀하게 여기면 그만큼 대접받습니다.
그러나 싸구려로 취급하면 다른 사람 역시 싸구려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일부러라도 귀한 물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상술이라고 하지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생각납니다.
유리창이 깨진 차가 길가에 세워져 있으면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망가뜨리기가 쉽지만,
멀쩡한 차는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아집니다.
사람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귀하게 대접해야 남들도 귀하게 생각합니다.
비하하고 함부로 대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주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보고, 다른 이 역시 주님을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이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남들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주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거슬러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준엄한 말씀을 하신 다음,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장차 당하게 될 박해 속에서 이 유혹을 물리치고
진리의 말씀으로 항변하는 지혜와 용기를 성령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성령 모독죄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죄를 말합니다.
진리는 권력과 폭력 앞에서 자칫 꺾이기 쉽습니다.
제자들은 곧 스승 예수님의 비참한 세속적 패배를 목격할 것이며,
그들 자신도 박해받으며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의 진리가 세상에 퍼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고의로 외면하는 성령 모독죄가
바로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삶입니다.
이 성령 모독죄는 다른 이에게도 전달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하면 그 모습 역시 전달되어서
다른 이들도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귀하게 여기는 우리가 됩시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역시 모두 귀하게 될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삶
-참행복-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10월15일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지역명을 붙여 ‘아빌라의 데레사’로 부르기도 하고,
동명의 데레사와 구별하기 위해 ‘대 데레사’로 부르기도 합니다.
16세기 활동하다 만 67세에 선종한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자이자
제2의 창립자이며 스페인의 수호성인입니다.
참으로 풍부한 일화들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감동을 선사하는 성녀입니다.
성녀는 중세 시대의 힐데가트르 폰 빙엔,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여성 수도자의 대모로서 존경받고 있으며,
기도의 스승이자 신비체험 및 영성의 대가인 성녀를
교황 바오로 6세는 시에나의 카타리나와 함께 여성으로는 최초로 교회학자로 선포합니다.
성녀에 의해 개혁된 남녀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리지외의 데레사’와 나치 독일의 학살로 순교한
성녀 ‘에디트 슈타인’을 배출한 명문 수녀회이기도 합니다.
성녀의 시대적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성녀가 활약하던 16세기는 천주교의 타락과 더불어
개신교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던 시절이었고,
이런 도전에 직면하여 성녀는 교회의 내부 개혁과 쇄신을 추구 하는데 앞장섰으며,
이런 역할은 앞서 역시 예수회를 설립하여 교회 개혁에 앞장섰던
스페인 출신의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흡사합니다.
성녀와 함께 교회 개혁의 조력자이자 동지였던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와의 영적 우정도 참 각별합니다.
성 요한 사제보다 27세 연상의 성녀였지만 영적 우정은 나이와 무관함을 깨닫습니다.
두 분 성인의 영적 우정 관계는 성 베네딕도와 성녀 스콜라 스티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와 비슷한 경우로
하느님 섭리의 배려가 참 놀랍고 감사하게 됩니다.
성녀의 사후 성녀의 성무일도에서 발견되었다는 다음 아름다운 시도 감동적입니다.
“아무것도 너를 흔들지 못하리라.
아무것도 너를 놀라게 하지 않으리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하리니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는
아무런 부족함 없고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
<아무것도 너를>이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가 남긴 시에
김충희 수녀가 곡을 붙인 노래가 널리 감동을 선사하며
지금도 여전히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시간 되시면 이 곡을 찾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성녀는 1582년 여행 도중에 병으로 쓰러지고, 1개월 만인 10월 4일,
“주여, 저는 거룩한 교회의 딸 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긴 채 향년 67세로 선종합니다.
성인의 특징은 사랑과 감사입니다.
성녀는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듯 교회를 사랑했고
매사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또한 이런 성녀를 교회에 선물하신 하느님께 저절로 감사하게 됩니다.
찬양과 감사는 참신자들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어제 수도 형제들과의 휴게시간 중 대화가 생각납니다.
예전 10여 년 이상 수도원 직원으로 일했던 형제가
참으로 성실하고 착했는데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상처에 아파하며 늘 불평 중에 어둡게 지냈다는 것이며 이에 대해 제 의견을 첨부했습니다.
“아, 감사도 발견이며 선택하여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저절로 감사가 아닙니다.
평생 날마다 발견하고 선택하여 배우고 훈련해야 하는 감사입니다.
이래야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눈만 열리면 널려 있는 감사의 발견이요,
이런 감사를 의식적으로 선택하여, 또 배우며 훈련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사랑을 발견하고 선택하고 배우고 훈련하듯
감사도 발견하고 선택하고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제 고백성사 중 늘 뉘우쳐 고백하는 것이 감사의 부족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편 구절과 행복기도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 중에
주님이신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찬양과 감사가 한 영성 셋트입니다.
찬양의 삶, 감사의 삶을 살 때 참 행복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참 좋은 이의 모범입니다.
어제 제1독서 에페소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베풀어진 은총에 대한 우리의 “찬양”이었다면,
오늘은 전형적인 “감사”기도입니다.
온통 깨달음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가득한 참 아름답고 깊은 내용들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주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주님의 부르심과 우리가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떤 것이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주님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부한지
깨달아 알게 하시는 하느님 은혜에 대한 감사요,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주님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깨달아 알게 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선물인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텅 빈 공허를 텅 빈 충만으로 바꾸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답도 그리스도뿐임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믿음이요 감사에 대한 깨달음이 참 중요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 믿음의 여정은 감사의 여정이자 깨달음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날로 주님을 깨달아 알아 갈수록 감사와 믿음도 더해질 것이며
참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가 되어 자유로운 빛의 삶을 살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믿음에는 참 좋은 자산입니다.
찬양과 감사의 영혼의 양 날개를 달고 하느님 창공을 나는 자유로운 영혼들입니다.
찬양으로, 알렐루야로 살다가, 감사로, 아멘.으로 마치는
긍정적 낙관적 믿음의 여정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바로 이런 감사하는 믿음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참으로 감사로 충만한 견고한 믿음이라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저함 없이 주님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며,
결코 용서받지 못할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곤경이나 역경 중에도 어떻게 무엇을 말할까 걱정 하지 말라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진리이자 성령입니다.
감사하는 믿음의 사람들과 늘 함께하시는 성령이자 주님이십니다.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것 없노라.”
감사의 고백 중 ‘아쉬울 것 없노라’ 대신 ‘두려울 것 없노라’,
‘걱정할 것 없노라’, ‘부러울 것 없노라’, ‘부족할 것 없노라’ 무엇을 넣어도 다 통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날마다 할 수 있는 참 좋은 영성훈련은 하느님 찬양과 감사뿐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온 마음을, 온 힘을 다해 바치는 찬양과 감사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의 찬양과 감사에 응답해 무궁한 축복의 선물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진리 치유의 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음악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가를 부르면 2번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는 단순히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스리 친모이라는 유명한 인도의 수행자이자 명상의 대가는
‘수련 중의 으뜸은 소리요, 음악은 명상’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가를 부르고 난 후 성가대원의 혈액을 검사하니
자연면역세포(NK세포)의 면역력이 1,000배나 증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성가, 염불, 자연과 함께하는 소리와 음악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소리와 음악은 고막에 진동 파장을 만들어 뇌의 활동 파장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공부한 하버드 대학생의 성적이 놀랍게 향상되어
의학적으로 모차르트 효과라는 말도 생겼다고 합니다.
또한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준 미숙아들은 신체 발달이 훨씬 빠르고,
부모님의 사랑 가득한 목소리 파장은 자녀들의 뇌 파장에도 긍정적인 자극을 주었다고 합니다.
음악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은 감소하고, 성장 호르몬의 생산을 증가시켜
동식물의 성장을 촉진 시킬 뿐만 아니라 식품의 면역력을 높여줍니다.
물론 유전인자도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악이 생명 활동에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바탕으로 음악치료라는
새로운 치유법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저는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가 많습니다.
묵주기도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운전하면 피곤함을 줄일 수 있고, 졸음도 막을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산보를 할 때도 강의를 듣는 경우도 있지만,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산보는 음악과 함께 하면 즐거운 시간이 되곤 합니다.
음악이 건강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러워 할 때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며 진정시켰습니다.
한국의 BTS는 음악으로 많은 젊은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음악이 우리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는 기능이 있다면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전통은 그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형식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건물, 제도, 교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의 모습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형식이 없는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화려한 건물인 교회가 있지만, 제도와 교리가 신앙생활의 울타리가 되지만
영성이 채워지지 않으면 공허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교회는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면 모래 위에 세운 건물처럼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영성입니다.
겉모습이 화려한 사람보다는 영적으로 빛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재물, 명예, 성공과는 다른 삶이 있으며 그것이 인류의 지혜와 문화의 힘입니다.
행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해와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앞을 보고 달리기보다는 어디에서 왔는지 성찰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돌아보는 것이 영성입니다.
나와 인류는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 묻는 것이 영성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푸른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함께 하는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2000년 전 로마는 당시 세계의 기준이었습니다.
로마가 법이었고, 로마가 길이었고, 로마가 문화를 선도했습니다.
로마라는 법을 채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로마가 만들 길로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로마의 문화는 교회의 조직과 교회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21세기는 새로운 산업과 새로운 문명이 법과 길을 만들어 갈 겁니다.
그것을 거스르기도 힘들고, 외면하기도 힘들 겁니다.
법이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채우는 건 정신과 영성이어야 합니다.
플랫폼과 빅데이터가 새로운 시대의 길이라면 그 길의 종착점은 복음이어야 합니다.
산업, 경제, 재물이라는 잔은 믿음, 희망, 사랑을 채울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날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 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시련과 고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겨드리며, 주님과 함께 충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우리 신앙인들이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언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은 아주 짧지만 아주 강력한 당부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2,10)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있다.하시니 말입니다.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인간 편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고 모욕한 바람에 초래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란,
우선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고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거나,
혹은 성령의 활동을 사칭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완고함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과 ‘완고함’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이는 ‘고집’이 성령을 거스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항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 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1)
이는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할 모든 것을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영을 따라 살게 하소서.
더 이상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주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는데, 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빛으로의 초대 하시는데,
제 제 스스로가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당신의 영을 모독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수락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땅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