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외 4편)
김경인
모든 것을 잊고 그는 읽기 시작했다. 김종삼 좋지? 좋아. 김춘수는? 그도 좋지. 봄이군. 전봉래도 전봉건도 다 좋아. 그는 담배를 물었다. 산등성이에 왜가리들이 하나 둘 돌아와 앉았다. 산이 드문드문 지워지고 있었다. 죽은 왜가리 소리가 들렸다. 미래의 소리 같군. 그러나 새들에게 영혼을 물을 수는 없어. 나도 알아. 한 단어와 다음 단어 사이에서 그는 잠시 숨을 멈춘다. 왜가리가 활짝 날개를 폈다 접었다. 그렇지만 새들에게 영혼은 없다고. 비유가 익숙한 세계에 그는 있다. 그는 다시 읽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들은 어쩐지 아름다워. 그래. 그렇지만 이제부터 물의 비유는 절대 쓰지 말자. 그래. 그래. 아무 것도 잊어서는 안 돼. 정말 봄이라며? 응. 우리는 여기에 있지? 그래, 여기에 있지. 산으로부터 어스름이 몰려온다. 봄이군. 그가 울기 시작했다.
반반
양념 반 프라이드 반
가장 아름다운 조합
모가지와 다리가 평등하게 잘려 버무려지고
바싹하게 튀겨져 목구멍 너머로 꿈결처럼 사라지는 날개들
반반은 내가 아는 최초의 얼굴
자정에 얼굴을 가리면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라는
반반은 내가 아는 가장 유쾌한 비밀
오른뺨은 어둠으로
왼뺨은 희미한 빛으로 서로를 향해 아코디언처럼
부풀다 터지는 울음주머니
반반은 그러니까, 제법 슬픈 주름
내려가도 끝이 없는 계단
오른쪽과 왼쪽 사이좋게 닳아가는 무릎들
1월과 7월의 달력에서
따로따로 죽은 채로 발견되는 너무 작은 신들의 이름
정성껏 고를수록 실패하는 선물들
그러니까 반반은
내가 출근할 때 두고 오는 그림자들
너는 정말 시인 같지 않아,
동료들이 이런 말로 나는 칭찬할 때
나 대신 술 마시고 욕을 하고 울며 시 쓰는 하찮은 마음들
한 짝은 고독 쪽으로 한 짝은 환멸 쪽으로 팽개쳐버린 구두
반반하게 낡아가는 심장들
너는 정말 시인 같지 않아,
내가 무심코 시집을 펼칠 때
여름의 할일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또하나는 허공이라는 투명한 벽을 깨며
죽음을 향해 날아오르는 낡은 구두 한 켤레 속에,
그가 준 불꽃을 식은 돌의 심장에 옮겨 지피는
여름, 꿈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러니까 올여름은 꿈꾸기 퍽이나 좋은 계절
너무 일찍 날아간 새의
텅 빈 새장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여기에 남아
무릎에 묻은 피를 털며
안녕, 안녕,
은쟁반에 놓인 무심한 버터 한 조각처럼
삶이여, 너는 녹아 부드럽게 사라져라
넓은 이파리들이 환해진 잠귀를 도로 연다
올여름엔 다시 깨지 않으리
빛과 함께
봄은 어둡고 커다란 교실 안에 있었다
닫힌 블라인드 사이로 이따금 햇살이 파고들었다 빛이 강의실로 스며들어와 길고 희미하게 퍼지면서 누군가의 눈썹 위에 잠시 내려앉으면서 사라진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같은 질량의 밀가루로 낮과 밤을 빚으면서 지루한 문장과 그다음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더 지루한 주어처럼 강의 기계의 녹슨 스위치를 켜고 다시 끄고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젊어서 죽은 시인의 시를 읽어주면서
그는 젊음 아닌 것은 영원히 모르겠구나 질투하면서
뒷문으로 하나둘 빠져나가 듬성듬성해진 강의실 안에서
블라인드 내려진 창문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쌍둥이 무채색 건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마음의 견고함에 대해
누군가는
쓰고,
듣고,
떠들고,
영원히 자고,
남은 아이들과 함께 나는 물속에 잠긴 듯 견딜 수 없이 긴 잠의 복도를 함께 걷다가, 허우적거리는 아이들과 죽은 듯이 빠져 있는 아이들을 깨우면서, 얘들아, 이제 강의 끝났어. 누군가의 목소리에 반짝. 나는 되돌아와서.
강의가 끝나고
한 아이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저 왔어요, 조금 늦게요.”
출석 체크가 끝나고
그애가 불쑥 말했다.
“선생님, 저는 이 년 전에 처음 배를 탔어요. 마지막 배를요. 예상보다 긴 여행이었죠. 그리고 거기에서 너무 많은 걸 보았어요.”
누군가 블라인드를 열었다 순간 빛이 교실 가득 퍼졌다.
그애는 거기 잠시 머물러 있었다.
*윤동주, 「팔복(八福)」에서.
숲
오래도록 여기를 걸었다
때때로 유령처럼 우는 없는 꼬리를 높이 쳐들고
넓은 이파리들은 종 치듯 소리를 흘려보내고
순례, 꼬리가 완전히 나를 잊을 때까지
나는 네 번 돌아온다, 세 번 실패한 후에
모든 걸음들을 기록하러
썩은 뿌리 냄새에 취해 구르는 돌처럼
나는 꿈에서조차 뿌리가 자랄까 두려운 나무
영영 분실되지 않는 단추
나라는 이름을 달랑거리기
꼬리가 잘린 자가 연주하는 무조의 밤
엉망진창 더 걸어야 하리
시드는 낙엽 얼굴을 무심히 쓰다듬으며
헛간에서 혼자 썩어가는 쥐처럼
감정이 차곡차곡 죽어가는 밤
너에게로 가는 기차— 망가진 뒤축처럼
진창에 처박힌 악취 나는 씨앗처럼
무덤 위의 상한 백합처럼
흔들리는 숲
산책, 더 많은 죽음에 실패할 때까지
내가 토해낸 끈적거리는 얼굴들
어떤 아름다움과도 무관하게
제7회 형평문학상 수상 시집
⸺시집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2020년 11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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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 1972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시를 공부함.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현재 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육원 교수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