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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제목 : 복음의 시작
본문 : 마가복음 1장1~20절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후에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 요한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직계는 아니지만 베드로의 제자로,
베드로는 그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벧전 5:13절).
*벧전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또한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제1차 전도여행을 하다가 중단한 사람이기도 한데(행13:13), 결국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행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대게 학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벗은 몸에 배 홑이불을 덮고 따르다가 무리에게 붙들리자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 청년을 마가로 보고 있습니다(14:51~52).
*막14:51~52 “[51]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A.D. 65~7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을 일컬어 '사복음서'라고 합니다.
특히 그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같은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공관복음서'라고 하며,
이 세 복음서는 전체 구조나 내용이 아주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각 복음서는 쓰여진 대상과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세부적인 순서나 내용, 그리고 사용된 단어들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내용이 압축되어 있고 문제도
직설적이며 간결한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족보라든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약간의 기록들이 있는 데 반하여,
마가복음은 그러한 설명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서들 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지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복음서들이 쓰여 진 궁극적 목적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20:31절에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일 뿐 아니라,
전체 복음서의 기록 목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1)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 자 이심을 믿게 하고,
2) 그 예수님을 통하여 진정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복음서가 기록된 궁극적 목적입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의 삶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보다 깊이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온전하게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의 곁에는 마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마가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마가복음을 가리켜서 “로마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로마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이와 같은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예컨대 마가복음은 유대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
반드시 그 말을 번역하거나 따로 설명을 더합니다.
가령 “보아너게”는 “우레의 아들,”
“달리다굼”은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등입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유대인들의 관습,
가령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일이나 밖에 나갔다 오면 물을 뿌리는 일, 또는 유월절이면 양을 잡는 일 등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로마에 사는 이들은 유대인들의 언어나 관습에 생소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복음에는
로마의 화폐인 “고드란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또한 로마의 직명인 “시위병”이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마가복음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1. 복음의 시작(1절)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러면 마가복음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의 첫 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마가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중앙에는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 고백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의 전반부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심을 통해서, 그리고 후반부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입증되고 있습니다.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
원문에는 1절의 동사가 없습니다.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단순히 마가복음의 한 구절이라기보다는 마가복음의 주제 또는 제목이요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이 동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소식’ 또는 ‘기쁜소식’을 의미하는 복음의 내용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뜻입니까?
그 결과 그 때부터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와 같은 개념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아들의 개념”과
우리가 생각하는 “아들의 개념”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위로의 아들”입니다.
이는 요셉의 부모가 “위로”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요셉 자신이 “위로”의 대명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그만큼 다른 사람들을 잘 위로했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말의 개념이,
출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동등하다, 똑같은 수준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도 바로 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을 붙여서,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님의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요한복음 5:18절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 이러라”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요한복음에서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처럼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2) 예수님은 그리스도 이십니다.
여기서 예수는 무엇이고, 그리스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는 성이고, 그리스도는 이름입니까?
아니면 예수가 first name이고, 그리스도는 last name입니까?
그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는 인명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직명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이씨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태조는 왕명입니다. 그리고 이성계는 인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예수는 예수님의 인명에 해당하고,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왕명에 해당합니다.
⓵ 예수님
누가 예수님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까?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가 지어주었습니까?
아니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지어주었습니까?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라는 인명은 예수님에게만 사용되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천사가 요셉에게)
눅1: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천사가 마리아에게)
이와 같이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에,
천사는 요셉에게도 또한 마리아에게도 각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도록 일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라는 인명은 예수님이 나시기 전에, 이미 지어진 이름으로서 천사에 의해서 그 이름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그와 같은 이름이 주어진 것은, 예수님의 사명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인명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호수아라는 인명과 똑같은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식 이름을
헬라식으로 표기한 것이 바로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인명이 예수님에게만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도 같은 이름이 나오고, 신약 성경에도 같은 이름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서 모세의 후계자도 같은 이름인 여호수아였고,
스룹바벨 당시의 대제사장도 같은 이름인 여호수아였습니다.
골4: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
이와 같이 신약 성경에도, 예수라는 인명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분명 이외에도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때로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며,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릅니다.
⓶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헬라어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메시야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라는 말이나 메시야라는 말이나 실상은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메시야는 히브리어일 뿐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에게 기름이 부어졌습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메시야가 강림하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신약 성경은 예수님이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의 직분을 동시에 가지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그 자체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영원토록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왕이시기에,
예수님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사장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선지자로 묘사되는 경우에도, 그저 간접적으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제사장이나 선지자로 묘사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셔서, 새로운 시대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예수님에 의해서 복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인명과 예수님의 직명이 합쳐진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시는 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며,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서 마가복음은 왕으로서의 직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임하셔서, 새 시대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사용된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왕명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예수님이 바로 왕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임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 시대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와 복을 풍성하게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으로 나아가, 감사함으로 그를 경배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의 다스리심을 받읍시다.
그리해서 왕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사하시는 구원과 평화와 축복을 날마다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 미래에 한 이상적인 왕이 태어나 이상적인 나라를 이룰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들에 근거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소위 ‘메시아 대망 사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이상적인 왕이 와서 그들을 직접통치하실 것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선포는 예수님께서 바로 다윗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말씀합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마가복음의 핵심 내용이요 목표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역하며 가르치실 때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숙식을 같이 하면서 직접 예수님께 배웠던 제자들조차도 나중에 엉뚱한 소리를 하고 다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조명해 주심으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기쁜 소식을 온 천하에 알렸습니다.
우리가 마가복음을 함께 상고하려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마가복음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만났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감격과 감사가 우리의 감격과 감사가 되어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땅 끝까지 모든 족속에게 알리고자 하는 열정으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의 시작
1절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표현은 ‘복음의 시작’입니다.
먼저 ‘복음의 시작’에서 소유격은 기원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시작’은 ‘복음(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시작’ 또는
‘예수님을 통한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시작’은 헬라말로 ‘알케’인데 창세기 1:1의 ‘태초에’라는 말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바로 이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요1:1의 ‘태초에’라는 말도 역시 ‘알케’입니다).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이는 “좋다”를 뜻하는 “유”와 “소식”을 뜻하는 “앙겔리온”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 복된 소식,” 말하자면 영어의 “good news”입니다.
좋은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복음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시작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같은 새로운 시작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새 창조”라고 하고,
구원받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사52: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여기에도 “좋은 소식”이라는 표현이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앙겔리온,”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복음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평화와 복과 구원이 자동적으로 따라 오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복음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새 시대가 열립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축복이 임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임하셔서 다스리시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당시의 상황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해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해야만 했습니다.
“신의 아들 가이사 아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바로 이와 같은 때에, 마가는 그가 기록한 마가복음의 첫 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바로 이 신앙 때문에,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또한 바로 이 신앙 때문에, 바울도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마가도 로마에서 순교할 각오를 하고서, 그가 기록한 복음서의 가장 첫 머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고도 담대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신앙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새 시대를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평화와 축복을 풍성하게 내리실 것입니다.
마가복음과 더불어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새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생애에 근본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애초에 원하셨던 삶의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기를 원하고 기대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마가복음 강해를 통해서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가 인생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의 새로운 장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2. 세례 요한의 사역(2~8절)
1) 예수님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세례요한(2~3절)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
그런데 복음을 통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 전체를 통하여 예언되고 준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여실 예수님을 예비하고 그이 길을 평탄케 준비할 사람 또한 예언되었습니다.
예언된 바와 같이 우리 예수님을 위해서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세례요한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서도 세례 요한의 출현이 복음서의 서론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그의 탄생 기사까지 실려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예비하는 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등장과 사역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 사역이 예언의 성취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확인시켜 주고 확실하게 하기 때문에 복음서의 처음에 기록되었습니다.
2) 세례 요한의 사역의 의미(4~5절)
“[4]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마가복음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는 ‘죄 사함에 관한 회개의 세례’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죄 사함을 베푸는 효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을 상징하는 의식적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 표시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세례는 유대인과는 상관이 없었고 오직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만 세례를 받았는데, 요한은 유대인들에게도 회개의 세례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례 요한의 외침과 사역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새롭게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에 들어가기 위해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이 개종한 것과 같은 마음과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요한의 선포는 새롭게 시작되는 복음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혈통적이고 민족적인 특권이 유효하지 않고 그들에게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와 철저한 삶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과 선포는 엄청난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입니다. 5절입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마태복음을 보면 바리세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도 몰려왔다고 합니다.
사실 요단강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40킬로미터 정도 되는 가깝지 않는 거리이고 광야라는 지리적 위치는 찾아가서 세례 받기가 쉽지 않은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스라엘은 세례 요한을 찾아갔습니다.
물론 본문에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들이 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갈급해 하고 몰려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의 소위 ‘암혹기’ 동안에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함으로 인해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고, 정치적 핍박과 사회적 혼란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있었는데, 그러한 칠흑 같은 암흑의 시기에 세례 요한이 그들이 소망했던 메시아가 오시고 그들이 기대했던 이상적인 나라가 도래한다는 메시지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름 떼처럼 광야의 세례 요한에게로 몰려갔습니다.
이렇게 그의 메시지가 능력 있게 선포됨으로써, 그는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메시아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3) 세례 요한의 자세 - 겸손함(6~8절)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6절).
“[6]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광야에서의 그러한 삶의 모습은 선지자의 전통에 속하는 것 이었습니다
(왕하 1:8; 슥13:4).
*왕하1: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스가랴13: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그가 처음 부름 받았을 때의 모습 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자기의 자리를 잘 지켰습니다(7절)
“[7]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신발끈을 푼다’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스승을 위해 마치 종이 주인에게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할 정도로 최선의 봉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발 끈을 푸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레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서 그러한 것조차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진 모습입니다.
또한 요3:30을 보면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 송두리째 다 드리고도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세례 요한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고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하면서도 얼마나 높아지려 하고 또한 얼마나 사람에게 대접받고 인정받기를 원합니까?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대접해 주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해 합니까?
결국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도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다가 예수님께서 주실 상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잘하다가 나중에 스스로 높아져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세례 요한의 겸손한 모습입니다(8절)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그는 자신이 할 일과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는 여러 각도에서 비교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물 세례는 죄 사함의 상징인데 반하여, 성령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죄 사함을 받고 복음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는 것이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고 인생의 진정한 변화도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듯 세례요한의 낮아지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삶의 자세는 그의 일생을 흠 없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하는 칭찬을 들었습니다(눅7:28).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마치 자신이 그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착가하고 교만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분의 길을 예비하고 그분에 의해 쓰임을 받는 자들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날도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감추고 예수님께서 온전히 역사하시기 위해 길을 닦는 사람들입니다.
말없이 뒤에서 예수님을 위해 궂은일을 도맡아 감당하다가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려드리는 낮은 자세를 가지신 분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을 때 주의 복음은 효과적이고 능력 있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세례와 광야의 시험(9~13절)
1)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9절)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그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는 언제입니까?
'세례 요한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에'입니다.
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그 때에' 온 유대와 예루살렘이 다 나아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는데, 따로 혼자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고 군중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말해 당시 세례를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눅3:21).
세례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표시로 주었기 때문에, 죄도 없으시고 죄 사함의 필요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마태복음(3:15)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시자 세례 요한이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왜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하면서 세례를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신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그분의 사역의 목적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죄를 짊어지셔야 했고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 서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믿음으로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죄인 된 인간의 자리에 들어오셨음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너무 황송하고 자신의 분에 넘치는 일인 줄 알기에 거절했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례 요한의 모습 속에서 진정으로 겸손한 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때로는 나에게 맡겨진 일이 하나님과 삶 앞에서 너무 과분하게 여겨져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고개를 많이 숙이고 뒤로 빼는 것이 반드시 낮아지고 겸손한 모습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을 보면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서 끝까지 우기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바로 불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것이 자기의 분에 넘치는 것이라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면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 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주어질 때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겸손이고 믿음을 가진 자의 자세입니다.
2) 하나님의 인정하심(10~11절)
"[10]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달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이 처음으로 예수님께 임하신 것을 의미하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성령과 함께 계셨고 본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께 임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확인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 후에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인정하신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길로 예수님께서 가고 계심을 예수님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인정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대적하고 오해했지만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요4:3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원하시는 길로 갔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면서 늘 신경 써야 할 것도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확인하심입니다.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인지를 늘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소신과 확신이 필요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확인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우리의 생애 동안에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의 시험 당하심과 그 의미(12~13절)
(1)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12~13절)
"[12]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 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예수님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계시면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곳으로 예수님을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단에게 시험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받으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서 시험받게 하셨겠습니까?
이것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단과의 싸움은 예수님께서 하실 사역의 방향에 대한 밑그림을 보여 줍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전체 사역은 사단과 끊임없는 전쟁이었고 그 궁극적 목적은 사단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보여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단과 싸움을 하고 승리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자신을 죄의 용서가 필요한 백성들과 동일시하신 것처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으로 마귀와 싸우고 시험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세 가지 시험의 내용은 인류 역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우리 모두가 늘 당하는 시험입니다.
첫째로는 말씀의 순종에 대한 시험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시험며,
셋째로는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기는 것을 막는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사단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셨던 약점을 이용해서 먹을 것으로 예수님을 유혹했는데,
그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8:3절을 인용하여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신명기 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굶기시고 어렵게 하신 이유가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첫 번째 시험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면에서 어렵고 힘들 때도 얼마나 말씀대로 사는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러한 시험은 오늘날 우리도 늘 경험하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어려움이나 물질적인 손해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장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필요에 대한 충족보다는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할 것을 원하십니다.
물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이 필요 없거나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받아 줄 것이기 때문에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1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에는 이스라엘이 맛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여 모세에게 물을 달라고 요구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지켜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고 일종의 불신앙입니다.
이것도 오늘날 우리에게 늘 있는 시험입니다.
예를 들어 병원이나 약국에 가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을 믿음으로 낫는다고 약을 사먹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에게 얼마든지 기적을 베푸실 수 있지만, 우리가 기적을 요구하는 목적이 자신을 극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라거나 기적이 필요 없는데도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시험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사단은 지극히 높은 산에 올라가서 자신에게 절을 하면 천하만국과 영광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신명기 6:13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만 온전히 경배하고 섬기는 것에 대한 시험입니다.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만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과 함께 다른 신들을 올려놓았습니다.
오늘날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 위에 돈이나 명예 등을 오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물질이나 명예 앞에 굴복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시험은 아담이 겪었던 것이고 이스라엘이 겪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우리에게도 계속해 있는 시험들입니다.
사단은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도록 유혹합니다.
또한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단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하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결코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고 예수님처럼 승리해야 합니다.
(2) 사단의 시험에 승리하기 위해서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단의 시험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사단, 즉 악한 영의 세력이 실재하고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늘 삼키려고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간첩을 그리라고 하면 아주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람으로 그렸지만 실제로 간첩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뿔 달린 괴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귀는 교묘하게 천사의 모습을 가장해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마지막으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한 번 승리했다고 해서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유혹은 끊임없이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 가지 시험 이후에도 예수님과 사단의 사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마귀가 잠시 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단과의 싸움이 40일 간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았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계속될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애가 다하는 날까지 계속해서 사단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단과의 싸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싸우면 늘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되 시험과 고난을 친히 겪으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결코 내버려두시지 않는 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승리 후에 오는 행복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오는 행복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천사가 예수님의 수종을 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천사가 어떻게 수종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히브리서 11:4절을 보면 천사의 사명 중에 하나는 성도를 돕는 일이고, 또한 엘리야도 광야에서 천사에 의해 수종 받을 때 먹을 것을 공급받은 것으로 보아서(왕상19:5~7), 예수님께서도 시험을 이기신 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 주심과 위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도 계속해서 오는 시험을 이기면 이렇게 천사가 수종을 드는 채우심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사역(14~20절)
1) 세례 요한의 체포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14~15절)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
마가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은 15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선포의 관점에서 이해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장의 주동사는 수동태로 쓰였는데, 이것은 이른바 신적인 수동태로서 하나님이 정하신 구체적인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도래시킬 성취의 시기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선포 중에 논란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엥기켄 헤 바실레이야 투 데우)는 표현입니다.
‘엥기켄’이라는 표현은 ‘도착’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가까움’을 의미하는가?
이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논의는 마가복음의 문맥 전체에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완성되어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현 속에서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 땅에 ‘이미’ 임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통치를 언급하면서도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서, 이를 이은 제자들의 사역을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최종적인 성취를 향해서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와 네 제자를 부르신 사건(16~20절)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알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서 무엇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게 되지만, 예수께서는 단순히 자신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구약의 관점으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 적인 통치는 어마어마한 모습으로 임할 것이라고 기대되었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알리는 사건으로 악과 악에 동조한 세력을 심판하고 의로운 자들을 신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알리고 난 후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같은 묘사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통치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효적으로 수행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제자공동체의 출현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됩니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어부였습니다.
어부를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들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당시 팔레스탄에서 어업은 매우 중요한 산업이었고, 이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것은 인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천지가 창조될 때와 같은 새로운 시대가 우리에게 열렸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은혜를 사모하며 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과 같이 낮아지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자세로 복음의 새로운 시대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의 두 사건에 관한 내용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에 대한 밑그림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우리 죄인의 자리에 온 것을 보여 주셨고, 다음으로 광야에서 사단에게 시험 받으심으로 앞으로의 그분의 사역이 사단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싸우셨던 싸움은 우리에게도 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면 우리도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늘 승리하시를 바라며, 또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고 위로하시는 것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말씀 가이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새 시대 새 나라를 가져오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복음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 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며,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떤 종류의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복음과 그 복음의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의 삶, 생명의 삶을 결정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소식이다.
로마 황제 가이사가 아니라 그가 통치자이며 구원자라는 소식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다스린다는 사실이 복음이 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수 있다.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 세례 요한은 예수를 전하며, 예수와 제자들이 살아갈 삶을 미리 사는 존재다.
조인들이 세례를 통해 죄 용서를 받게 하여 주의 길을 예비한다.
아합 시대에 엘리야처럼 타락한 성전 체제에 저항하였으며, 예수를 흥하게 하고 자신은 쇠하다가 사라지는 사명을 알고 감당하였다.
세례와 시험으로 드러난 복음- 예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인과 하나 되어 그를 대속하는 사명을 수용하셨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시고, 친히 자신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해주신다.
그의 광야 시험은 세례 시의 하늘의 음성처럼 그가 받을 수난과 그 후에 그가 누릴 영광을 모두 보여 준다.
무엇이 복음인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다는 소식이다.
그는 박해를 받는 로마의 1차 독자들처럼 수난을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하여 왕으로 등극하시는 사명을 받고 오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나에게도 복음이 되고 있는가?
묵상 Point
1)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복음을 시작한다.
그 복음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사실이다.
그가 통치자이며 구원자라는 선언이다.
그가 통치자이며 구원자라는 선언이다.
그 복음의 시작을 알리며 마가복음은 시작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다스린다는 사실이 복음이 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들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올 수 있다.
2)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
세례 요한은 예수를 전하며, 예수와 제자들이 살아갈 삶을 미리 사는 존재다.
죄인들이 세례를 통해 죄 용서를 받게 함으로써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한다.
제사장 집안의 사람이면서도 타락한 성전 체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요단강 세례를 통하여 백성들이 죄 사함을 받게 해준다.
아합 시대에 엘리야가 있었듯이, 이 시대에는 요한이 엘리야처럼 낙타 털옷을 입고 석청을 먹으며 광야의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
오직 예수를 흥하게 하고 자신은 쇠하다가 사라지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감당한 사람이다.
3) 세례와 시험으로 드러난 복음
예수는 요한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는다.
죄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다.
세례를 받는 순간 시각적으로 성령이 내려오고, 하늘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고난의 죽음까지 순종하여 하나님께 기쁨이 될 거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그것은 우산을 통해서만 온전히 그 왕적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공적으로 임명을 받고 나서 드디어 때가 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다.
4) 제들을 만든 복음
고기 잡는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사명을 주신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를 부른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두고 떠나올 만큼 예수와 그의 나라를 환영한다.
제자란 다 두고 떠나는 존재이며, 부르신 곳으로 나아가 부르신 분과 동행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절 복음의 시작이십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고통 받는 세상을 구하시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누구라도 소리 높여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까?
9-11절 죄가 없으시지만 죄인인 우리와 같이 되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참조. 시 2:7; 사 42:1)이시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어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12,13절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기 위해 오신 ‘새 아담’이시며, 광야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기 위해 오신 ‘새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분은 사탄이 넘볼 수 없는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사탄의 유혹과 맞서며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가 사탄의 시험에서 승리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에 시험이 닥쳐오겠지만, 이미 주께서 먼저 승리하신 길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갑시다.
14,15절 정치, 종교, 경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닌, 저항과 고난의 땅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루살렘에서 환영받지 못했지만, 지금도 변함없이 전 세계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향해야 할 이 시대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8절 요한은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엘리야였고(사 40:3; 말 3:1), 메시아의 새 출애굽을 준비하는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는 한순간도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내기 원했습니다.
우리 삶과 사역도 온전히 그리스도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16-20절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은 지체하지 않고 따릅니다.
믿음으로 투신하고,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새 백성입니다.
지금 내가 주님을 따르는 데 머뭇거리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기도]
공동체-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을 내려놓게 하소서.
열방- 이란에서는 이슬람을 떠나 기독교로 개종하는 이들이 크게 증가하면서 지하교회가 부흥하고 있다.
이란의 지하 성도에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