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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 원인과 결과
19세기에 미국의 남부연합주와 북부연합주 간에 벌어진 전쟁
다른 뜻에 대해서는 남북 전쟁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남북 전쟁(南北戰爭, 영어: The American Civil War (The Civil War) )은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하 '남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 포격을 시작으로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결과 남부연합군이 패했고,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를 폐지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남북 전쟁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게티즈버그 전투, 북군 티드볼 야포, 아메리카 연방군 수감자들, 철갑 USS 애틀랜타, 폐허가 된 리치먼드, 프랭클린 전투날짜1861년 4월 12일 ~ 1865년 5월 9일
(4년 3주 6일)장소
미국 및 대서양
결과
연방 승리
아메리카 연합국의 붕괴
미국 영토 무결성 보존
노예제 폐지
재건 시대 개막
재건 수정 헌법
교전국 연방 아메리카 연합국지휘관
에이브러햄 링컨 (총사령관)
율리시스 S. 그랜트
윌리엄 테쿰세 셔먼
데이빗 패러것
조지 매클렐런
헨리 할랙
조지프 후커
조지 미드
제퍼슨 데이비스 (총사령관)
로버트 E. 리
조지프 E. 존스턴
피에르 보우리가드
알버트 시드니 존스턴 †
브락스톤 브라지
군대
2,220,000명:
북군
해병대
해군
미국 리브뉴-해병
698,000명
(최대)
750,000-1,000,000명:
남군
남부 해병대
남부 해군
360,000명
(최대)
피해 규모110,000명 작전 중 사망260,000명 사망
남북전쟁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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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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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노예폐지 운동은 18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775년 첫 반-노예제 모임이 필라델피아에서 만들어졌고, 펜실베이니아주 의회는 처음으로 《노예해방법》을 1780년에 통과시켰다. 이 후 4개의 다른 북부 주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으며, 1787년 북서부 영토(지금의 오하이오주 및 그 주변)에서도 〈북서부 조례〉를 통해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이로 인해 노예제를 폐지한 북부와 노예제를 여전히 법으로 인정하는 남부의 두 지역으로 나뉘게 되었다. 물론 북부에서 노예제에 반대한 이유는 북부 사람들이 인도주의자들이어서가 아니라 농업을 중시하는 남부에 있는 노예들을 분산시켜 그 세력의 힘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북부 공업에 그 노동력으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다.
남부의 자유주 확대에 대한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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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소유를 허용하는 남부와 금지하는 북부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링컨은 당시 노예제를 시행하는 주들에서 노예제를 철폐하는 법안을 제안하지는 않았지만, 1858년 "분열된 집에 대한 연설"에서 "노예제의 확산을 막고, 국민의 마음 속에 노예제의 궁극적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믿음을 심고" 싶다는 의지를 표현했다. 1850년대의 정치적 갈등은 새로 생긴 준주로 노예제를 확대할 지 여부에 대한 것들이 주를 이뤘다. 정부가 수립된 모든 준주(organized territories)는 자유주가 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남부는 연방에서 분리되고자 노력했다. 북부와 남부 모두 노예제가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그 범위가 축소되거나 결국 폐지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세력에 연방 정부의 통제권이 넘어갈 것에 대한 남부의 우려와 노예제 지지자들이 정부에 휘두르는 영향에 대한 북부의 혐오는 결국 1850년 말의 위기 상황을 일으켰다. 노예제의 도덕성, 민주주의의 범위, 자유 노동과 노예제 간의 경제적 이득에 대한 논쟁들은 휘그당과 무지당(Know-Nothing)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고, 새로운 정당(1848년의 자유지역당, 1854년의 공화당, 1860년의 헌법 연합)들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1860년에 최후로 남은 전국 정당 은 민주당이었지만, 민주당 역시 분파들로 나뉘게 되었다.
노예폐지주의자 윌리암 로이드 게리슨이나 중도 공화당 지도자 링컨 등의 북부 정치인들은 토머스 제퍼슨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선언문 구문을 강조했다. 링컨은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이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1845년 미주리 타협선의 연장은 텍사스 병합 결의문의 일부였고, 1850년 타협과 1860년의 크리튼덴 타협에서는 이 선을 태평양까지 연장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1787년 헌법제정의회에서 있었던 헌법 35조와 아프리카 노예 수입을 20년간 연장하는 데 대한 논쟁을 비롯해 이 시기 거의 모든 지역간 분쟁에는 노예제가 관련돼 있었다. 1793년 엘리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cotton gin)로 인해 하루에 가공될 수 있는 솜의 양은 50배로 늘어났고, 이런 생산 방식의 변화로 인해 남부에서는 노예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노예주인 미주리주를 연방에 편입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 끝에 1820년 미주리 타협이 이뤄지기도 했다.
하원의 함구율(gag rule)은 1835년부터 1844년 간 노예제를 폐지하는데 대한 청원을 하원에서 논의하는 것을 금지했고, "명백한 운명"론은 노예제를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영토를 연방에 포함시키는데 대한 근거가 되었다. 1845년에 텍사스를 다른 영토와 함께 노예주로 합병한 것은 멕시코 전쟁(1846-1848)을 촉발시켰고, 새 영토에서의 노예제 시행에 대한 갈등은 1850년 타협으로 잠시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1850년 타협의 〈윌모트 조항〉은 북부 정치가들이 멕시코로부터 정복한 영토에서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노력에 따른 것이었다. 헤리엇 비처 스토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2)이 인기를 끌면서 북부에서는 1850년 타협의 결과물인 도망노예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오스텐드 성명(Ostend manifesto, 1854)을 통해 남부는 쿠바를 노예주로 합병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1854)에서는 미주리 타협이 노예제를 금지한 지역에 대한 노예제 폐지 여부를 국민주권에 따라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고, 이 법이 통과된 뒤 제2기 정당 구조는 무너졌다. 또, ‘피의 캔자스’ 논란 중 캔자스주에서의 노예제를 둘러싸고 미주리주의 노예제 지지자들인 보더 러피안(Border Ruffians)에 의해 자행된 대규모 부정 선거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 부정 선거는 친-남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피어스(미국 14대 대통령)와 제임스 뷰캐넌(미국 15대 대통령)이 캔자스를 노예주로 인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했다. 뷰케넌은 노예제 시행에 대한 구문을 포함한 캔자스주 헌법안인 르컴튼 헌법을 지지했다.
캔자스에서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은 와카루사 전쟁, 로렌스 약탈 사건, 공화당 상원의원 찰스 섬너에 대한 하원 의원 프레스톤 브룩스의 상원 의회 구타 사건, 포타와토미 학살(Pottawatomie Massacre), 블랙잭 전투, 오사와토미 전투(Battle of Osawatomie) 그리고 마래 데 시뉴 대학살(Marais des Cygnes massacre) 등의 폭력적 형태로 나타났다. 그 후 1857년 대법원의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은 캔자스를 포함하여 다수가 노예제를 반대하는 지역에서조차 노예제를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노예 반란을 시도했다 실패한 노예폐지주의자 존 브라운이 1859년 12월 2일 사형대로 끌려가는 모습을 노예 모자가 바라보고 있다
1858년의 링컨-더글라스 논쟁 중 북부 민주당의 지도자였던 스티븐 더글라스는 드레드 스콧 판결이나 국민주권의 개념에 구애받지 않고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다는 "프리포트 주의"를 주장해 더글라스가 르컴프턴 헌법을 입안하는 데 실패한 것과 더불어 민주당을 남부와 북부로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북부 노예폐지주의자인 존 브라운은 1859년에 하퍼 페리 무기고를 습격해 노예 반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1860년에 남부 민주당은 새로 합병되는 준주에 노예제를 법으로 인정하자고 요구함으로써 남부와 북부로 나뉘는 지역 간 갈등 구조를 완성시켰다.
노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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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링컨 - 더글라스 논쟁을 기념하는 우표 애브러햄 링컨, 제16대 대통령(1861–1865) 제퍼슨 데이비스 남군 대통령 (1861–1865)
연방 탈퇴를 지지하는 세력은 지역마다 존재하는 수 많은 플랜테이션 농장의 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디프사우스(Deep South)에는 플랜테이션 농장이 가장 밀집해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주들이 가장 먼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그보다 약간 더 북쪽에 있는 노예주(州)인 버지니아주와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칸소주, 테네시주에는 더 적은 수의 플랜테이션 농장이 존재했고, 이 주들은 섬터 요새 전투 이후 탈퇴를 결정하기 전까지 연방 탈퇴를 계속 거부했다. 경계에 위치한 주들은 더 적은 수의 플랜테이션 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끝까지 연방 탈퇴를 하지 않았다.
1860년경 남부에 노예를 소유한 백인가족들의 비율은 남부 중에서 남쪽 지역이 43%, 남부 중 북쪽지역이 36%, 그리고 남부와 북부의 경계 지역에서는 22%였다. 노예 소유주의 절반은 한 명 내지 네 명의 노예를 가지고 있었다. 1850년에 8,000여명의 농장주들은 50명 이상의 노예를, 그 중 1,800명은 100명 이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100명 이상을 소유한 1,800명의 노예 소유주들 중, 85%는 최남단 주에 살았고, 1% 정도만이 경계 지역에 살고 있었다.
95%의 흑인이 남부에 살았고, 남부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했지만, 북부에서는 흑인 인구가 1%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뉴욕과 필라델피아 같은 대도시에 살고 있었다. 따라서 노예들의 완전한 해방에 대한 걱정은 북쪽보다는 남쪽에서 훨씬 클 수 밖에 없었다.
1857년 드레드 스콧 대 샌포드 사건에 대해 미 대법원이 내린 판결은 논란을 더욱 가속화했다. 연방 대법원장인 로저 토니가 집필한 판결문에서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노예들은 굉장히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백인들이 가진 권한을 동일하게 가질 수 없다.
— 1857년 연방 대법원 판결문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북위 36˚ 30' 위에 위치한 북부의 영토 내에서 노예제도를 금지한 미주리 타협도 역시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판결문에서 로저 토니는 "북위 36˚ 30' 위의 북부 영토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노예 소유를 금지하는 의회의 결정은 헌법에 근거하지 않은 사항이기에 이를 무효로 한다"고 판시했다. 이러한 태니의 판결에 대해 민주당원은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공화당원들은 이 결정에 '자의적인 헌법의 왜곡'이라고 반발했다. 공화당원들은 드레드 스콧이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 하지 못한다면 대법원은 미주리 타협의 합헌성에 대해 논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링컨은 "또 다른 드레드 스콧 판결"이 북부의 주들을 노예제도로써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제와 관련된 문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고, 이제는 이 사안이 너무 중요해졌기에 다른 어떤 국가적 문제도 지금은 심리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노예제 문제는 준주의 지배권 획득을 위한 민주당 내 파벌 경쟁과 관련이 있었고, 이 준주에서 노예 소유 규정을 명시하는 데 대한 남부 노예 소유주들의 요구는 민주당을 둘로 나누기위해 남부의 정치인들이 사용했던 쟁점이었다. 하지만 둘로 나뉜 민주당은 링컨의 당선과 연방 분리라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연방 분리가 화두로 떠올랐을 때,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대농장 지주이자 상원의원인 존 타운샌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의 적인 공화당이 정부를 그들의 손아귀에 넣기 직전이다. 공화당은 변덕스럽고 광적인 이론과 노예제 폐지라는 목적에 따라 우리를 지배할 작정이다.”
위와 비슷한 의견들은 논평과 정치적 연설 그리고 연방 탈퇴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선언문을 통해 남부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비록 링컨은 노예제가 이미 존재하는 주에서 이를 비합법화 하려는 계획이 전혀 없었지만, 남부 전역에 걸쳐 백인들은 노예제도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남부군이 걱정했던 것들은 노동력을 잃음으로써 겪게 되는 경제적인 손실뿐만 아니라 인종 평등의 두려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텍사스주는 연방 탈퇴의 이유로 아프리카 민족이 백인의 하위 민족으로 정당하게 여기어지고 있어서 반노예를 추구하는 주들이 백인의 평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앨라배마주의 분리론자 에드먼드 다르간은 백인들과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절대로 같이 살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만약에 흑인들이 자유의 몸이 되어 남부지방에서 살아갈 경우, 결과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가 직접 우리의 노예에 대한 형벌 집행자가 될 것이다. 북부지방의 정책은 이런 결과를 초래할 것이며, 우리는 더 가난해질 뿐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1830년대 초반부터 미국 우정 공사 총재는 남쪽으로 보내지는 노예제도 폐지의 관한 모든 우편물을 전송하기 거부하였다. 남부지방에 사는 북부지방 출신의 선생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지지하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쫓겨났고 또 노예제도 폐지론에 관한 책들은 모두 금지되었다. 그리고 남부지방의 백인들은 공화당이 노예제도 폐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부 주들도 위협을 느꼈다. 에릭 포너에 의하면 북부지방 사람들이 노예제도를 정의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또한 그들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관심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마찰들과 의심들과 근심들은 전쟁이 터지는 데에 아주 큰 기여를 하였다.
링컨은 현재 노예제가 존재하는 주에서의 노예제 시행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은 《코윈 헌법 수정안》에 찬성했지만, 분리주의자들은 그마저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분리주의자들은 자유의 땅을 주창하던 북부주에게 캔자스주를 빼앗기자, 캔자스에 인접한 주에서 노예가 부족해져 노예 해방을 이끌고, 결론적으로 다른 남부주들에서도 연쇄적으로 노예 해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분리론자들은 공화당원들이 힐튼 로완 헬퍼 같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남부 백인들과 남부의 노예들을 선동하기 위해 유화정책을 사용하는 것도 겁내고 있었다.
남북 지역차
지역차(Sectionalism)는 남부와 북부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난 경제와 사회 구조, 관습, 정치적 차이를 말한다. 1800년부터 1860년의 기간 동안 북부 지역이 산업화, 도시화되고 생산성 높은 농장을 통해 노예제의 필요가 점점 없어졌던 반면, 가장 남쪽 주들에서는 여전히 노예 노동에 기반한 플랜테이션 농업과 가난한 백인들의 자급자족 농업이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지역주의 경향은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이 기간 중 남부 농장주들은 남서부의 새로운 땅(앨라배마주에서 텍사스주까지)으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하지만 경계 주에서 노예제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도시나 공업 지역에서는 노예를 찾아보기 어려웠기에(볼티모어, 루이빌, 세인트 루이스와 같은 도시에서는 노예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노예제에 의존하고 있는 곳은 남부 지역 중에서도 대개 시골이나 비공업지역이었다. 한편으로 면화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노예의 가격도 급격히 상승했다.
북부 공업지역과 남부 농업지역간의 경제적 차이가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간에 논란이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1920년대에 역사가 찰스 비어드가 주장했던 경제적 결정론에는 반대하며 북부와 남부의 경제가 상호보완적이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두 지역간에 사회, 문화적 환경이 매우 달랐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남부에서 부자들이 모든 옥토를 소유하고 있었고, 가난한 백인 농부들은 생산성이 적은 자투리 땅을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노예 반란에 대한 두려움과 노예 해방 주의자들의 선전물은 남부의 군대를 노예 해방주의를 비롯한 모든 "주의"에 대해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남부인들은 자신들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주장한 ‘공화적 가치’(republican value)에 충실한 반면, 북부가 변화하고 있고, 새로운 "주의" 따위에 너무 쉽게 변한다고 불평했다. (워싱턴, 제퍼슨, 메디슨 등 많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링컨은 공화당원들이 노예제의 확장을 막음으로써 헌법 입안자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노예제를 받아들일 것이냐에 대한 문제는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와 같은 큰 개신교 종파들을 북부와 남부 종파로 가르게 되었다. 산업화로 인해 8명의 유럽 이민자 중 7명은 북부에 정착했다. 이 시기 북부에서 남부로 이사하는 백인들보다 남부에서 북부로 가는 백인들이 두 배가량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인구의 이동 문제 역시 남부인들이 방어적이면서도 호전적인 정치적 모습을 보이는데 일조했다.
각 주의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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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가 특정한 권한들을 가졌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주의 주민이 그 주를 떠났을 때도 이 권한이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남부는 모든 주의 시민들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주를 벗어난다고 그 재산을 빼앗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노예주들이 노예를 데리고 미국 내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으며 그 노예는 자유주에서도 노예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부 사람들은 이 권리를 부정하며, 이는 자유주들이 각 주에서 노예제를 금지할 권한에 위배된다고 반발했다. 노예제를 확장시키는데 반대했던 공화당 당원들은 특히 노예를 데리고 자유주와 준주들을 다닐 수 있는 권리에 반대했다.[1]
남부인들은 각 주가 미연방에서 탈퇴할 권한이 있다며, 미국 헌법은 단지 주들간의 협약의 축약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뷰캐넌 대통령을 비롯한 북부인들은 이를 두고 "영구 연합"을 위해 노력했던 미국 조상들의 정신에 위배된다며 각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할 권한이 있다는 의견에 반대했다.[1]
링컨의 대통령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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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링컨 당선은 남부의 연방 탈퇴 시발점이 되었다. 코윈 수정안과 크리텐던 타협안을 통한 노력에도 타협은 실패했고, 남부 지도자들은 링컨이 노예제 확장을 중단하고 폐지한다고 걱정했다. 노예제가 있던 주들은 하원에서 이미 소수파로 전락하였고, 세력이 늘어나는 북쪽과 대조적으로 의회와 대통령 선거인단에서 앞으로도 계속 소수파로 남을 위기에 처했다.
연방 탈퇴
남북 전쟁
진행
의미
남부와 북부 비교
북부의 승리
전쟁 당시 노예 실태
타국의 중재 저지
승리 그리고 전쟁이 남긴 상처
작품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116.121.155.190님이 13일 전에 마지막으로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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