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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도에 칠순 잔치의 나이가 된 이경용은 강남 빌딩재산보다 더 가치 있는
지난날 베풀었던 수많은 일들이 좋은 추억으로 떠오르면 즐거움과 기쁨을 준다.
2025. 2. 3일 이경용 씀.
1986년도에 경기도 안산에 주택지를 분양받은 이후, 30년 넘게 벌어들인
☆부동산 수익을 베풀지 않고 투자만 하였다면 ★강남에 빌딩이 있을 것이라고
카페에서 아내와 웃으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큰 부자 되기를 포기하고서 살아온 지난날에 베풀었던 좋은 추억들이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웃게 된다.
좋은 추억들은 생각이 스칠 때 마다 내 삶에 즐거움과 기쁨을 줘서 행복감이 생기며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주막식당에서 일하면서 계란 1개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식당을 해도 빚이 늘어가서
눈물과 고통으로 살아가시는 어머님을 보면 계란 1개도 쉽게 먹을 수 없었다.
가난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껴서 훗날, 가난을 벗어나라고 베풀며 살게 되었다.
지독한 악인들을 만나 불행했던 나쁜 추억들이 떠오르면 모두가 지나간 일로
이경용이가 겪어야 될 사주팔자의 운명이라 여긴다.
한국 나이로 올해(2025년) 칠순 잔치의 해가 되었다.
1969년 4월경에 정미소 공장의 부도로 인하여 갑자기 집안이 폭삭 망하여 먹고 살아가기가 힘들게 되었다.
가난 때문에 어린 14살(만12세)부터 이경용은 중고등학교도 다니지 못 하고,
서울 상계동에서 7년간을 식당, 공장, 배달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여야 하였다.
어머님과 나이 어린 넷째 아들이 운영하던 주막식당으로는 먹고 살기도 힘들었으며 거기에다
명문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셋째 아들의 뒷바라지(광주 하숙비+학비 등)때문에 가난이 더욱 심해져 갔다.
경용이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닐 나이였던 1972년도의 중졸검정고시 시험에 떨어졌다.
빚이 크게 늘어가자 아버님은 늦은 밤에 식당 안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던
넷째 아들에게 공부를 하면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당장에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드니
공부를 하지 마라 하셨다.
그런 아버님은 가난과 병에 시달리시다가 2년 뒤인 1974.5.6.일에 세상을 뜨셨다.
공부를 못하게 하셨던 아버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검정고시에 떨어진 그 다음해인 1973년 5월경부터 막걸리 자전거 배달로 3년 동안,
①큰돈을 벌어서 식당 빚을 갚았고 ②셋째형과 동생3명에 대한 학교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야 하였다.
1973년도에 서울 상계동의 단독주택 매매가격이 약70만원이었고,
전남 나주의 몇천평의 시골 배나무 과수원 매매가격이 105만원이었다.
자전거 배달로 1일 2300원(100통Ⅹ23원), 한달에 69,000원, 1년에 82만원을 벌었고
3년간 총 246만원을 벌어서 ①주택 2채를 사고도 남았으며, ②경용이가 대학교 4년을 다니고도 남을 큰돈이었다.
1973년도에 호떡 1개에 5원이었고, 짜장면이 30원, 50원할 때였다. 현재(2025년) 호떡 1개에
1000원~2000원, 짜장면이 7000원이어서 물가가 200배 넘게 뛰었다.
주택 2채를 살만큼의 큰돈을 벌어서 이경용 자신부터 대학교를 다녀야 했지만
대가족(외할머님, 어머님, 동생 3명)을 부양하고 책임질 사람이 없어서 대학을 포기하였다.
셋째 형은 자신은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동생 경용한테 대학을 다니지 말고 돈이나 벌라하였다.
공부하였으면 명문대학교에 합격하였을 것이다.
이경용은 초등학교 졸업장과 고졸 검정고시 합격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3년간 휴가도 없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중노동의 막걸리 자전거 배달을 하면서 ★1975년도의 고졸 검정고시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독서실에서 1달 공부하여 ★1976년도의 국세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좋은 자질과 능력으로 공부를 잘 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부동산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서 가난한 형, 누나, 동생, 친구 등을 도와주었다.
외할머님, 부모님, 7남1녀의 자식들 중에서 넷째 아들 이경용은
14살부터 가장 역할을 해야 했으며, 70세가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 하였다.
경용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어느 누구 한명에게도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고 자부하고 싶다.
이경용 인생에 있어서 큰 발자취이다.
이경용부부의 도움으로 형, 동생, 외가형님, 장인어른, 처남, 친구들이 집을 장만하거나 큰돈을 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마음이 즐겁고 기뻐했었기에 이러한 옛날 일들이 떠오르면 그것으로의 좋은 추억이 되어 기분이 좋아진다.
2년 전인 2023년도에 며느리가 될 새아기를 처음 보는 상견례에서 아들과 함께 들려준 덕담 끝에 살아가면서 자신
의 이익을 위해 어떤 누구에게도 나쁜 행위를 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으며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가라 하였다.
지난날의 좋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면 이경용의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과거의 일들을 간단히 쓰고자 한다.
1.나이 10살이던 초등학교3학년 때에 이경용의 정미소 안의 떡 기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을 보며 너무 먹고 싶어 하였던
동네 골목 친구들에게 일일이 긴 가래떡을 갖다 주자 엄청나게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서 기분이 좋았는데,
그때의 먹는 모습들이 생각나면 이경용을 웃게 만든다.
2. 돈이 없어 대학병원에서 쫓겨난 뒤에 병이 깊이 들어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죽음을 앞에 둔 61세~62세의 아버님께 매일 자전거 노동일당을 드리면
너무 좋아하시며 웃으시던 그 옛날의 아버님의 얼굴이 떠오르면 기분이 좋아진다.
3. 안산에 땅과 상가를 지어 팔아서 1991년, 1992년에 큰돈이 들어오자 집안을 망하게 만든
부모님의 1969년도 시골 빚을 이자 붙여서 1992년도에 전부 갚아드렸다.
어머님이 고맙다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며 크게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르면 이경용은 그저 좋았고 참 잘해드린 일이어서 내 인생에서 최고의 큰 발자취이다.
4. 부모님의 빚을 갚을 마지막 시골 채권자 1명을 2006년도에 찾아내서 빚2만원의 50배인 100만원을 갚았다.
갚지 못한 37년(1969년~2006년)을 감안하여 이자를 많이 쳐주었다.
어머님이 너무 기뻐하시며 크게 웃으셨다. 정말 잘한 일이었다.
아버지 이귀섭님, 어머님 이길순님의 명예를 높여드리기 위하여
부모님의 빚을 최우선적으로 갚아드렸다. 빚보다 더 많은 채권이 있었지만 갚는 사람은 없었다.
5. 장남으로 집안을 잘 이끌어 주라고, 집이 없던 큰형에게 청약예금에 당첨시켜서 평촌아파트를 마련해드렸다.
이경용의 아내가 아파트 대금을 송금해줄 때마다,
형님한테 집을 마련해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고 1993년도에 전세금 6000만원을
전부 큰형께 드렸다. 너무나 좋아하시며 고마워하시는 큰형님의 모습이 떠오르면 그저 웃게 된다.
6. 동생을 자립시켜 줄려고 제빵학원, 일식학원, 돼지 농장 등을 다니게 해주었으나 소용이 없었고
막 노동일을 다니던, 능력이 부족한 여섯째 동생에게
1997년도에 현금 2억원(40평 아파트 매매가격임)을 주어 분가시켜서 전세 아파트에 살게 해주었고
후에 아파트와 임대료가 나오는 상가를 마련해주려고 하였다.
현재(2025년)가치로 10억원이 훨씬 넘는 돈이다. 2억을 받은 동생이 너무 고마워하는 모습이 떠오르면 그저 좋다.
7. 가난한 친구들에게 ①구리 아파트 대금의 80%인 계약금과 중도금 전액을 무이자로 빌려주어
1995년도에 입주시켜서 1억(분양가 7200만원/입주시세 1억8천만원)의 큰돈을 벌게 해주었다.
② 친구 2명에게 2003년도 입주 시에는 분양대금(1억3천만/1억5천만)보다 더 많은 이익이 생기는
아파트 분양권(행당동 한신, 묵동 이수)을 돈까지 빌려주면서 명의변경 취득하게 해주었다.
2003년도에 1억5천만원의 이익금은 아주 큰돈이었다. 친구들에게 집을 마련하여 입주하게 해주거나
큰돈을 벌게 해주면 친구3명과 친구부인들이 너무 고마워하던 모습이 떠오르면 그저 기분이 좋았을 뿐이었다.
8.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10살 때, 이경용의 집에 와서 시집갈 때까지 12년간을
식모처럼 혹독한 고생을 하셨던 외사촌 누나와
아기 때, 풍에 걸려 머리가 안 좋아서 공부가 꼴등이었던 불쌍한 친누나를 도와주면 너무 고마워하는
그 모습에 그저 기분이 좋았다. 친누나를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항상 마음에 걸려 애잔하다.
명절에 친누나를 만나면, 동생이 도와줘서 자식4명(딸3명. 아들1명)을
가르치며 살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하기도 한다.
9. 외할머님의 제사를 지내주시던 외가형님(이상석)을 크게 배려하여, 묵동 이수아파트를 싸게 분양받게 해줬더니,
현재(2025년)아들부부와 손자, 손녀가 살고 있으며 외가 형님께서 너무 고마워해서 보람되고 기분이 좋았다.
10. 위에 거론되지 않은 형, 동생, 처남 등에게 베풀었던 일들이 너무 많지만 쓰기를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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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님, 어머님, 장인 장모님께 매월 용돈을 많이 주면 기분이 좋았고 행복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의 수중에 돈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회적 약자인 세입자에게 10년, 20년간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 이경용부부이다.
★임대료를 정상 시세만큼 올려서 이익을 챙기는 마음보다,
임대료를 올리지 않아야 마음이 편하고 행복감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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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등에게 집 마련의 자금과 큰돈을 주지 않고 투자만 하였다면 강남에 빌딩이 있을 것이라고
아내와 웃으며 이야기를 할 정도로 큰돈을 벌었던 사례들이다.
①경기도 안산에서 주택지 취득 및 상가 건축 후에 팔아서 큰돈을 벌었고,
②평택 미군부대 인근의 야산을 대지로 만들어 큰 이익이 생겼고,
③상가 임대 후에 팔아서 10억을 벌었고,
④논을 개발하여 상가 건축하여 대지 매각 등으로 10억이 넘는 이익을 벌었고,
⑤ 1,000평의 밭을 매수하여 창고를 지어 팔아 큰 이익이 생겼으며
⑥기타 재개발, 재건축 등의 수많은 부동산 일로 수중에 돈을 벌어들이면 그때마다 가난한 형제 등에게
줘버려서 다음에 투자할 때는 돈이 부족하여 은행대출을 받아야 하였고 고액의 이자가 지출되었다.
은행 대출 부채 약 30억원에 대한 매월 은행이자가 2천만원씩 나갈 때도 많았고,
현재까지 30년 넘게 지출한 은행 이자만 합쳐도 엄청난 금액일 것이다.
현재(2025년) 매월 이자가 900만원이어 생활이 적자일 때도 많다.
보유 부동산의 빚이 매수가격보다 더 많지만, 걱정하지 않으며, 팔면 돈이 많이 남아 다행이다.
죽을 때까지 탐욕스런 마음으로 베풀지 않고 재물만 탐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사
람들은 베풂의 행복감을 전혀 얻지 못할 것이다.
베풀고 살다가 죽은 후에는 좋은 사람이라고 덕담(이름을 남김)을 들어야지
살아서도 죽어서도 욕을 먹는 인생을 살면 안 된다. 사후에 영혼도 축복을 못 받는다.
위와 같은 수많은 좋은 일들은 아내의 적극적인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였으며,
동생의 형편을 물어본 뒤, 분양 아파트 중도금도 일부 도와주자고 했던 아내이다.
상가와 주택의 세입자들한테 임대료를 올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아내이다.
정말 이렇게 착한 아내는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형제 등에게
퍼주어도 항상 반대 없이 기쁘게 협조해준 아내였다.
★ 어머님이 100세(2024.3.17일: 선종)로 세상을 뜨시기 전에 경용의 아내에게 최고의 찬사를 표하셨다.
☆이제 얼마 못살 거다. 어머님! 오랜 세월 참, 좋게 살았어요!
고맙다. 고맙다. 예쁘다. 잘 생겼다. 반짝반짝 예쁘다고 말씀하셨다.
아내는 눈물을 흘렸고 뒤에서 경용이도 눈물이 났다.
☆ 우리 넷째 아들처럼 형제를 많이 도와준 사람은 조선팔도에 없을 것이라고 하셨고,
형제를 도와줄 때마다 주는 자가 복이다. 고 말씀하셨던 고 이길순 어머님이시다.
이렇게 착한 아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던 형수가 있다. 어머님을 100세까지 34년간
모셔준 동생 경용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어머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던 불효를 저지른 형이 있다.
셋째 아들에게 과외 재수까지 시켜서 명문중학교에 합격하게끔 뒷바라지 해준 고마운 어머님이셨다.
집이 쫄딱 망하여 둘째형(중3)과 동생(중1.초등3)들은 전부 학교를 그만 뒀지만
명문 중학교 2학년에 다니는 바람에 나 홀로 학교를 다닌 셋째 아들이었는데
학교를 뒷바라지를 해준 어머님과 넷째 동생에게 훗날, 그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그런 셋째 형이 잘 살라고 큰돈을 벌게끔, 수많은 노력을 해준 동생 경용에게
수고비용 한 푼, 술 한 잔을 베풀 줄을 모른다. 돈이 들어오면 쓰고 싶지 않을까?
고맙다고 넷째에게 승용차(막내)와 사례비(다섯째)를 줬던 동생들에 비하여 왜 이리 인색한지?
모르겠다. 불쌍한 누나들도 거의 돕지를 않는다.
고위 공직에 있으면서 어머님을 모셔주어 고맙다. 고생이 많다.
정년퇴직하면 어머님을 잘 모시겠다. 등은 모두 헛소리였다.
동생이 중고등학교를 뒷바라지 해줘서 형은 후에
①고위공직자로 출세하였고,
동생이 힘들게 얻은 고수익의 부동산 정보에 의해서 형은
②안산에서 주택지를 분양(1986년)받아서 큰 이익을 봤고
③아파트를 취득 후, 팔아서 5억 넘는 돈(묵동 이수 2001년 취득, 미사 센트럴자이 2015년 취득)을
벌게 해주었건만,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형이 어머님을 4년간(2015.12월~2019.12월) 모시면서 엄청난 불효를 지지르며 요양원에 보내려 하자,
경용부부는 95세의 어머님을 다시 모셔 와서 100세까지 함께 살았다.
동생 경용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모시냐고 온갖 성질도 부렸다.
어머님이 100세로 세상을 뜨신 이후에 형을 만나지 않으니 마음이 참 편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불효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형제에게도 잘한다.
아내가 시집(1986년)와서 어머님이 세상을 뜨신 날(2024년)까지 38년 동안,
형제들 때문에 이경용 부부는 속을 썩이는 날들이 많았지만 모두 지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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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2019.1.1.일, 넘어져 엉덩이 고관절이 부러졌고 수술 후에는,
①셋째 아들은 요양원만 보내려 했고 모실 자식이 없어서
②넷째 아들부부가 모시겠다고 한 뒤에 7개월의 걷는 재활치료를 받으셨다.
재활치료가 잘 되어, 다치기 전보다 더 잘 걸으시던 95세의 어머님이셨다.
넷째 아들 부부는 인터넷 검색 후에, 주간보호센터 6군데를 다니면서 시설을 점검하고 상담하여
하남시 주간보호센터 행복케어를 선정하였다.
아침, 오후마다 넷째아들이 마중, 배웅하여 5년 동안 주간보호센터를 다니셨다.
행복케어는 시설도 좋고, 원장님 이하 직원들이 너무 친절하고 케어를 잘해드렸으며
어머님이 5년 동안, 너무 즐겁게 다니셨던 행복케어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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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에 안 보내고 95세의 어머님을 다시 모시면서,
어머님이 찾으시면 1주일에 2번씩 소고기 육회와 좋아하시는 산 낙지, 돼지족발, 토종닭 등을 해드렸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아구찜을 먹으러 아내와 함께 자주 외식을 하였고,
5년 동안 매일 밤마다 어머님은 넷째 아들 부부와 셋이서 재미있게 화투 고스톱을 치셨다.
형 집에 4년 계실 때, 매월 말일마다 총 48번, 어머님을 모시고
강화도, 일산 등으로 승용차 드라이브 구경 겸 외식을 시켜 드린 넷째 아들 경용부부였다.
100세로 운명하기 전, 2달 동안 경용부부는 어머님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을 씻겨드렸다. 운명하신 후,
50일이 되던 날(2024.5.6.일)의 아침 새벽에 “넷째야” 하고 부르시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니,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보고 싶어서 어머님의 혼령이 찾아오셨나 싶었다.
그날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5.6일)과 똑같은 날로 만감이 교차하였다.
고 이길순 마리아님이 돌아가신 후, 성당에서 매일 50일간 연미사를 드렸다.
7남2녀의 자식을 낳아 부양하고 가르치시느라고 12년 동안 밑바닥의 천한 주막식당에서
“밥, 술, 안주”를 파셨던 어머님과 34년간을 넷째 아들 부부와 행복하게 재미있게 사셨던 것을
넷째 아들 경용이는 인생 최고의 삶으로 여깁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부자 소릴 들었지만 14살부터 너무 가난하여 대학을 갈 수 없었던 이경용은 2025년 현재,
딸과 아들이 대학교를 나와서 좋은 직장을 다니고 결혼까지 하여 예쁜 손자, 손녀까지 생겨서 행복한 노후이다.
내 자식보다 우선하여 형제(7남1녀)들에게 더 많은 돈을 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딸, 아들은 능력껏 잘 살
수 있지만 능력이 부족하여 가난하게 살아가는 형제 등을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경용부부의 인생철학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넷째 아들에게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자식 3명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글썽이던 아버님이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넷째아들한테만 유언을 하셨다.
너무 가난하여 병원치료도 못 받고 월세 식당 안의 작은 방에서 세상을 뜨셨다.
아버님의 유언을 받들어 동생 3명을 부양하고 뒷바라지하여 분가시켰습니다.
베풀며 살겠다는, 선한 일을 하겠다는 인생관이 없으면 많이 베풀 수 없으며,
부부가 한뜻이 되지 않으면 가난한 형제, 친구 등을 함부로 도와 줄 수가 없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능력이 좋아서 큰돈을 벌면 베풀 줄 알아야 한다.
고 이길순 어머님은 자식 때문에 괴로운 일이 많더라도 평시와 잠자리에 들면 좋은 생각만 하신다고 하셨다.
참 지혜(100세 장수 비결)로운 분이셨다.
잘 살게 도와준 은혜를 고마워하지 않고 원수로 갚는 형과 친구 5명도 마찬가지(어머님처럼 좋은 생각)이다.
악인은 절대로 선인으로 안 바뀐다.
베푸는 마음으로 살면 서로 정답게 웃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
러나 탐욕하여 이익만 취하기에 다툼과 불행이 생긴다.
이경용은 자식과 후손들도 베푸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란다. 그게 복 받는 삶이다.
★. 지금까지 이경용이 겪어본 중에
최고의 30억 이익이 생기는 아파트를 줘버렸던 이경용 부부의 인생관이다.
- 장기 임대사업하려고 이경용 앞으로 소유했던 행당동 한신 아파트 분양권 3개를 현재까지
보유했으면 큰 임대 수익과 시세 차익 30억을 벌었을 것이다.
-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어 매수했음에도 큰 이익을 팽개치고
세 사람(①번: 다섯째 동생, ②번: 박모 친구, ③번: 장인어른)에게 원가에 줘버렸다.
-분양가는 1억3천만원이었고 현재(2025년) 시세는 11억5천만원이다.
1개당 약10억의 이익이 생기며, 현재 동생(택배일 함)은 거주하고 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른다.
2003년 입주시에는 전세금1억9천만원으로 투자금1억5천만원을 전부 회수하고
도 약 4천만원이 남았다.
- 아내와 상의해서 집이 없던 세 사람에게 기쁜 마음으로 줬으며 이경용 부부가 추구하는 인생관이었다.
- 집이 없던 다른 형제들과 장인어른 보다 박모 친구(금세공 업)를 더 우대하여 빨리 가난을 벗어나라고
은혜를 베풀었더니, 원수로 갚아버렸다.
심성이 그런 걸 어쩌겠나? 친구라고 함부로 크게 도와주면 안되는 교훈을 얻었다.
- 97세의 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4년 전(2021년)에 돈이 생기자,
빚을 전부 갚지 않고 1억원을 생활 형편이 좋지 않은 형제, 누나 등의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1억원을 베풀지 말고 고급 승용차를 구매할 수 있었지만, 4500만원(2020년 그랜져)의 승용차를
5년째 타고 있다. 1억원대의 고급차(제네시스 등)를 타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돈만 있으면 된다. ★죽을 때 많은 재물을 남겨서 자식한테만 주는 것보다,
☀베풀고 살았던 지난날의 수많은 흔적들이 더 값진 것이다.
30년 넘게 벌어들인 ☆부동산 수익을 베풀지 않고 투자만 하였다면 ☆이경용은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경용은 큰 부자 되기를 포기하고서 2025년도에 칠순 잔치의 나이가 되어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강남 빌딩재산보다 더 가치 있는 지난날 베풀었던 수많은 일들이 좋은 추억으로 떠오르면 즐거움과
기쁨을 주어서 잘 살아 왔다고 생각된다.
선한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항상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누명을 쓰거나 잘못된 헛소문으로 비난까지 받아야 하였다. 명예회복의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한 이글을 보고서 이경용의 살아온 인생관을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2025. 2. 3일 이경용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