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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시편 18(17),50; 22(21),23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
본기도
주님,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어
저희가 신비로운 이 예식으로 성자의 부활 축제를 지내며
다시 오시는 그분을 모든 성인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7,15.22─18,1
그 무렵 15 바오로를 안내하던 이들은 그를 아테네까지 인도하고 나서,
자기에게 되도록 빨리 오라고 실라스와 티모테오에게 전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왔다.
22 바오로는 아레오파고스 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대단한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3 내가 돌아다니며 여러분의 예배소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고 숭배하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려고 합니다.
24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그분께서는 또 한 사람에게서 온 인류를 만드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27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28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29 이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 무지의 시대에는 그냥 보아 넘겨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든 모두 회개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31 그분께서 당신이 정하신 한 사람을 통하여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시어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증명해 주셨습니다.”
32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하여 듣고서,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 하고 말하였다.
33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그들이 모인 곳에서 나왔다.
34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18,1 그 뒤에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시편 148,1ㄴㄷ-2.11-13ㄱㄴ.13ㄷ-14ㄱㄴㄷ
◎ 주님의 영광 하늘과 땅에 가득하네.
또는
◎ 알렐루야.
○ 하늘 위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높은 데에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천사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군대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
○ 세상 임금들과 모든 민족들, 고관들과 세상의 모든 판관들아, 총각들과 처녀들도, 노인들과 아이들도, 주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 이름 홀로 높으시다. ◎
○ 주님의 위엄 하늘과 땅에 가득하시다. 그분이 당신 백성 위하여 뿔을 높이셨네.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 그분께 가까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은 찬양하여라. ◎
복음 환호송요한 14,16 참조
◎ 알렐루야.
○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는 다른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2-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14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1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 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 밤(날, 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참된 어린양이시니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5,16.19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바오로 사도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대담을 나눕니다. 그들은 바오로를 아레오파고스(고대 아테네에서 최고 의회가 열리던 곳)로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겠소?”(17,19)
이로써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교의 철학 사상이 만나고, 바오로의 그 유명한 ‘아레오파고스 연설’이 이루어집니다(제1독서 참조). 이 연설은 바오로가 이교인들에게 한 설교들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뛰어난 것으로, 하느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미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은 뒤에도 영혼이 불멸하다고 여기면서도, 육신의 부활은 이해하지 못하고 바오로의 설교를 비웃거나 외면하였습니다. 결국 바오로는 아테네에서만큼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지 못합니다.
높은 수준의 학식과 문화를 지녔고 새로운 지식에도 열려 있던 그리스인들이었지만, 선뜻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복음을 믿는 일은 이성과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시면서, 삼위의 완전한 일치 안에 계신 “진리의 영”만이 구원의 진리를 알아듣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호자 성령께서는 우리를 의심과 불확실성 속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읽기 전 먼저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기를 청하듯이, 모든 일에 앞서 성령께 지혜와 보호를 청합시다. “하느님, 성령의 빛으로 저희 마음을 이끄시어, 바르게 생각하고 언제나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강수원 베드로 신부)
고대 그리스 문화의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아테네. 그 도시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아크로폴리스 정상에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정수라고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건물로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높이 솟아오른 수많은 돌기둥은 여전히 보는 이를 압도하며 과거의 영광과 위용을 그대로 자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행길에 그 아크로폴리스 정상을 향하여 가다가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작은 푯말 하나를 보았습니다. “아레오파고스, 바오로가 이곳에서 설교하다.” 바오로는 그렇게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인 아테네에서, 그리스의 다신론 사상이 절정을 이루고 있던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산 중턱 한 모퉁이에서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선포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함과 웅장함과 그 화려함 앞에서 담대하고도 용기 있게 외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왔을까요? 신전 중에 신전이요, 인간이 지은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졌던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어떻게 이런 말로 설교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이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느님, 사람의 손으로 드리는 섬김과 예배에 결코 종속되실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바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오늘은 그렇게 온 세상조차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 계심을 깊이 묵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박문수 막시미노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는 분이시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요한 8,28)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곧 성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성자의 것이며,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성자에게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성부에게서 성자로, 성자에게서 성령으로 이어지는 이 심오한 일치의 신비는 세 위격이지만 하나이신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도 당신 안에 사랑으로 일치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 삼위께서 사랑 안에 온전히 일치하여 하나가 되시듯,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이는 사랑을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나가 되리라고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며 일치하려고 애쓴다면 이는 바로 충만한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밝아질까요?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자녀들이 많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롭고 사랑 가득할까요? 숨을 쉬어 보십시오. 들숨과 날숨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날마다 의식하며 산다면 이 세상은 그런 나 때문에 더 밝게 빛나고, 아름다우며, 평화롭고 사랑 가득한 기쁨의 땅으로 변할 것입니다.(신우식 토마스 신부)
진리 안에 머무는 것은 타인에 대하여, 나아가 하느님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합니다. 각자의 생각을 고쳐 하나의 사실과 정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생각을 제대로 정리하고 다듬는 것이 진리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진리는 다름의 자리에서 서로를 향한 열린 눈과 귀를 간직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진리의 영께서 일깨워 주십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믿음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길잡이시며 버팀목이셨습니다. 진리의 영께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신앙의 정답을 제시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으신 것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여러 가르침은 획일화되고 화석이 되어 무조건 그대로 수행해야 하는 정언 명령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채색된 화려한 그림과 같습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리의 영께서 이어받으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들은 이야기를 진리의 영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과 같이, 신앙인들은 서로의 다른 생각을 교환하고 교환한 자리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누리는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각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다듬고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우리 각자의 생각을 나누기 위하여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기도와 묵상은 저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느님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친교를 되새기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아이는 처음에 어머니와 오랜 시간을 지내기에, 아버지가 자신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때 어머니는 중간에서 자녀에게 아버지를 알려 줌으로써 자녀가 아버지를 존경하게 합니다. 이렇게 아내는 자녀 앞에서 남편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고 하십니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모든 것을 받아 교회에 주십니다. 교회는 또한 그 받은 모든 것을 자녀들인 신자들에게 베풉니다. 이 ‘받은 것을 자녀들에게 내어 줌’이 신부로서 신랑을 영광스럽게 하는 가장 완전한 방법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새로 태어나는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 피 흘리심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당신께서 보내실 성령께서 오시면 당신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자녀 앞에서 아내가 하는 역할을 교회 앞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역할을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교회의 가르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배운 지식과 받은 은총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교회를 드러내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이도 교회의 사랑을 받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바오로 사도는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에서 연설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교육 도시로서 명성이 매우 높았으며, 시민들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갈망과 함께 종교심도 깊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우상 숭배에 물들어 있었기에 온갖 것에 이름을 붙여 신격화하여 제단을 만들어 섬겼던 것입니다. 더욱이 아테네 시민들은 아직 자신들이 모르는 신이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머지 ‘알지 못하는 신’까지 섬긴 것입니다.
오늘 주목할 점은 바오로 사도의 태도입니다. 자존심이 강한 아테네 사람들을 대하는 바오로 사도의 지혜와 포용력이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이 세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을 언급하면서,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이 ‘하느님’이심을 자연스럽게 말한 것이지요. 이 방법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들의 무지와 우상 숭배를 무조건 탓하기보다, 그들 안에 심어진 복음의 씨앗을 발견하여, 그 싹을 키워 주는 이런 방법도 바람직한 선교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복음을 전하면서,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의 환경과 입장을 고려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참되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입과 손이 되어 말씀을 널리 전하도록 성령께서 오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하겠습니다.(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은, 그리스도인이 낯선 문화와 환경 속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갖추어야 하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만, 그 신이 인간의 형태로 살면서 활동한다고 믿는 그리스인들의 범신론적 사고방식을 그리스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닌 신을 향한 ‘대단한 종교심’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오로 사도의 태도는,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중요한 자세로 꼽힙니다.
흔히 그리스도교를 ‘보편적인 종교’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영혼에 심겨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신에 대한 사랑’은 대화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 사람들이 지닌 신에 대한 사랑을 무시하지 않은 대신에, 구약에서부터 전해 오는 인격적인 하느님의 신앙으로 그들을 인도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 연설은 오늘날 이웃 종교인들이 간직한 보편적 종교심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그리스도 신앙을 증언하는 교회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성령을 약속해 주시고, 그 진리 안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을 온전히 깨닫기에는 우리 인간의 이성이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읽고, 묵상하며, 실천하면, 성령께서는 우리 한민족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한(恨)’의 종교심을 일으켜 주시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만나게 하시고, 성령의 치유와 화해의 장으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바오로 사도의 아레오파고스 연설은 ‘자연 종교’와 ‘계시 종교’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만물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진리는 ‘자연 종교’에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구세주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계시 진리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제자들에게만 받아들여집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 사상을 대변하는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리스도교 진리를 설파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종교심을 존중하면서도 그들을 하느님의 계시 진리와 부활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웃고, 다음에 듣겠다는 이도 있었지만, 그들 가운데 몇몇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계시 진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사상과 종교와 열린 대화의 장을 가지면서도 복음의 진리를 용감히 선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진리이지만, 세상은 이를 진리로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진리의 영을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면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랑의 삶을 살아갑니다.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다스리시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놓으면 우리의 삶은 단순하고 소박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고 이기심과 욕심이 사라져 새로운 질서를 포옹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설명을 통하여 바로 알 수 있는 것과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학이나 역사 등의 내용은 설명으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제주에서 서울로 갈 수 있는 교통편과 소요 시간, 비용 등에 관한 정보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낳을 때의 부모 심정, 군인이었을 때의 심정, 아플 때의 고통 등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당사자의 처지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 렇다면 과연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이 역시 교리적인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처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어떻게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7.13 참조).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숨결이 되실 때 우리는 하느님의 성전이 되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숨결이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세속적인 삶이 아닌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고 그 신비를 살아가도록 성령을 청합시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진리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끔씩 우리는 거짓 보도, 허위 사실, 헛소문을 접합니다 때로 유명인사들의 거취에 대한 허위사실들이 sns를 타고 순식간에 유포되어 입장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저도 언젠가 한 신자로부터 어떤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럴 리가 없는 데’하며, 즉시 전화를 걸어 직접 확인까지 해본 적이 있습니다.
껄껄 웃으시며 '이미 부활해서 삼시새끼 밥 잘 드시고 계신다.'는 말씀을 듣고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또 다른 헛소문에 깜짝 놀란 적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존경하는 한 신부님께서 신천지로 넘어가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밤잠을 못 이루다가 그 다음 날 아침 교구청으로 전화까지 해서 확인해보니 헛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큰 혼란으로 몰고가는 거짓, 허위, 헛소문들들이 날개를 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때로 이런 그릇된 정보가 부당한 공권력을 등에 업고, 진실인양 공공연하게 유포되기도 합니다. 분명 거짓인데 그럴싸하게 포장되고 편집되어 일반화된 것을, 비판력을 상실한 관용 매체를 타고 진실인양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세상만사, 다양한 사건 사고 들 앞에서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거짓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정확한 식별력과 정보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보면 분명 거짓이요 악인데, 사탄의 우두머리인데, 그럴싸하게 스스로를 포장해서 진리처럼, 예언자처럼 행세합니다. 아직도 두꺼운 가면을 쓰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는 그릇된 지도자들과 사이비 교주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근원적, 태생적으로 나약한 우리 인간들입니다. 거짓과 헛소문 앞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늘 필요한 존재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13절)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실 진리, 진리 중의 진리, 궁극의 진리, 불변의 진리는 또 무엇입니까?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자체이시며,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보여주신 생애 전체이며, 그분께서 선포하신 복음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그분 입에서 나온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진리입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백성들에게 보여주셨던 일거수일투족이 다 진리입니다.
‘진리’와 관련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불멸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매사에 그분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묵상하는 일입니다.
이 땅의 모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이 그릇된 오류에 빠지지 않길 기도합니다. 그들이 불변의 진리이자 영원한 진리인 정통 가톨릭 신앙에 맛을 들여, 사이비들이 미끼처럼 건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신앙의 깊이를 더해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