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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왕희지와 동급의 서예가로 추앙받았던 한석봉의 글씨.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늘날 '한석봉체'로 유명한 한호(1543~1605)는 조선 후기 그 이름이 거의 잊혔다. 석봉은 한호의 호이다. 석봉의 집안은 비록 양반이기는 했으나 한미했다. 25세 되던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하지만 공부가 충분하지 못했는지 대과에는 끝내 급제하지 못했다.
생애 대부분을 글씨를 쓰는 관원인 사자관(寫字官)에 머물렀다. 조선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았지만 그는 오히려 중국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이여송, 마귀, 등계달과 유구국 사신 양찬 등이 앞다퉈 석봉의 글씨를 구해갔다.
명나라 문인인 왕세정은 "동국에 한석봉이라는 이가 있는데 그의 글씨는 성난 사자가 돌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심지어 석봉은 '서예의 본고장' 중국에서 왕희지(진나라 서예가), 안진경(당나라 서예가) 등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중국의 대서예가들과 동급으로 대접받았다. 명나라 서화가 주지번은 "그의 글씨는 왕희지, 안진경과 우열을 다툰다"고 높게 쳤다.
제14대 임금 선조는 석봉을 달리 대접했다. 한가한 곳에서 서예를 익힐 수 있도록 특별히 가평군수에 제수했다. 그러면서 교서를 내려 "게을리하지도 말고 급하게 하지도 말라. 피곤할 때에는 억지로 쓰지 말라"고 명했다. 그러나 한석봉의 사후 사대부들은 '조그만 기예에 불과하다'고 폄훼하면서 그의 이름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1681∼1763)은 그의 대표작 성호사설(星湖僿說)에 한석봉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한다. 이익은 "이는 이 나라 풍속이 재주 있는 이를 천하게 보기 때문"이라며 석봉의 이름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채록해 기록해 둔다고 책에 적었다.
이익은 당대 주류학자들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리학을 맹신했던 조선의 선비들은 부처를 '불씨'라고 할 만큼 불교를 천시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유학자가 불가의 승려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4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고 했다. 스승을 높이고 도를 믿는 게 첫 번째요, 마음에 안일하게 하지 않는 것이 두 번째이다. 식욕과 색욕을 끊는 것이 세 번째이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마지막이다.
조선의 인재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이 활약했던 선조 때 가장 번성했다. 그 시작은 제9대 성종(재위 1469∼1494)이다. 성호사설은 성종이 출신 여부를 가리지 않고 재주와 기량을 갖췄다면 요직에 등용했다고 소개한다.
구종직(1404~1477)은 시골의 미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성종이 미행할 때 우연히 만나 발탁됐다. 임금이 그에게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자 '춘추'를 익혔다고 답했다. 구종직이 막힘 없이 줄줄 외어 내려가니 임금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바로 교리(敎理·홍문관의 종5품 벼슬)에 임명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원들이 부당한 인사라며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임금은 간원들을 불러 춘추를 외우게 했지만 모두 신통찮았다. 오로지 구종직만이 막힘이 없었다. 이후 조정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이익은 또 "어떤 사람인지 이름은 잊었지만 그가 고을 잘 다스리므로 성종은 곧바로 그를 이조 참의에 제수했다. 대간들이 드세게 일어나자 이번에는 이조판서로 높여 임명했다. 그러자 대간들은 조용해졌다"고 전했다.
선조 역시 인재를 아꼈다. 영남 우도의 명현 남명 조식은 벼슬을 하지 못했지만 병이 깊어지자 어의와 약을 보내 간호하게 했다. 조식이 세상을 뜨자 특별히 대사간에 추증했다. 이익은 "인재를 양성하는 데는 북돋워주고 보호하는 기술이 필요한데 이제는 그러한 도가 멀어져 한미한 자는 벼슬에 오를 길이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탄했다.
이익의 눈에 비친 조선의 실상은 답답함 그자체였다. 책은 우리나라에서 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 오히려 일본에서 우리 책을 구입해 찍어야 하는 상황을 개탄한다. 송나라 학자인 진순(陳淳)의 성리자의(性理字義) 및 삼운통고(三韻通考)는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에서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 발간한 이상국집(李相國集)은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일본에서 구해다가 간행했다. 일본은 법이 엄격해 우리나라 서적은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나라의 문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일본의 인쇄술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익은 "일본에서 찍은 책판의 문자는 자획이 정연하여 우리나라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감탄했다.
이익이 살던 당시엔 장마철만 되면 한강이 범람해 도성 안까지 물에 잠겨 빠지지 않는 일이 되풀이됐다. 한강 하류에 진흙이 날마다 쌓여 장마로 불어난 강물이 서해로 신속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이익은 "중국 송나라 때에는 쇠스랑으로 황하를 준설한 바 있다"며 "모래나 진흙을 파내 배로 실어나르든, 써레로 긁어내든 별탈이 없을 것인데 이것을 조정에 알리는 자가 없느니 한스럽다"고 했다.
탐관오리의 가렴구주로 전국의 고을은 주민들이 떠나 텅 비게 되고 도처에 거지들이 들끓었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보내려고 의복과 쌀을 주고 있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가혹한 정치를 피해서 달아났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미워하는 것 중에서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
이익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려면 포악한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이며 뇌물 받는 관리를 처벌하는 법을 엄히 시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구 밖 길가에 거처하던 염병(장티부스) 환자의 이야기도 전한다. 예전엔 염병에 걸리면 마을을 나가야만 했다. 이 환자는 그 후 병이 나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외면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거적으로 자기 몸을 싸매고 새끼로 허리 아래를 묶은 뒤에 죽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개가 자신의 시신을 뜯어먹을까 염려해서다. 이익은 이 사람이 측은해 차마 밥을 먹을 수 없었다고 썼다.
▲ 야외에서 기생들을 끼고 화롯불에 고기를 구워먹는 조선 양반들. 이익은 부유한 집에서는 매일 7번 식사를 하고 100명분을 하루에 먹어치웠다고 썼다. 작자미상 풍속화(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조선시대 밥상. 조선시대에는 한번에 3인분의 식사를 했다. 19세기 프랑스 엽서의 사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난한데도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식사량이 많았다. 유구국(오키나와) 사람은 조선 사람에게 "당신 나라 사람들은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숟가락으로 푹푹 떠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고 비웃었다.
특히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세 사람이 나누어 먹어도 배고프지 않을 정도의 음식을 한 사람이 먹어치운다. 이익은 "어려서부터 배불리 먹는 습관이 생겨 창자가 점점 커져서 음식을 채우지 않으면 허기를 느끼게 된다. 습관이 굳어질수록 점점 굶주림을 느끼게 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부유하거나 귀한 집에서는 더욱 도가 지나쳐 하루에 일곱 차례를 먹는다. 매 끼니마다 술과 고기가 넉넉하고 진수성찬이 가득하니 하루에 소비하는 것이 백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양이다. 이익은 "승려는 채소만 먹지만 혈색이 나쁘지 않다. 모두들 배불리 먹어 농사지을 것까지 다 해치우니 창고가 텅텅 빈다. 한두 번 굶주린다고 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며 풍족하게 먹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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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잘읽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으니 지방의 탐관오리들 중앙정부에서 알수가 없고 그저 죽어나는건 힘없는 백성 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