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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0, 15:17우리 가족이 북한 여권을 들고 인천공항에 내린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에 별의별 일이 많았지만 내가 제일 힘들었던 건 처음에 정착하던 때이다.
돌이켜보면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삶의 흔적이지만 타향살이의 첫 시작은 만만치 않았다. 오늘은 정착 과정에 있었던 일들 중에서 하나의 흔적을 떠올려 본다.
우리 부부는 2006년에 그동안 일해서 모은 돈으로 영어학원을 차렸다. “탈북자가 뭔 영어학원이냐”며 무조건 망한다고 모두 말렸다. 그러나 50살이 넘은 우리가 가진 능력과 재산은 아내가 평양외대 졸업생이라는 것이 전부였기에 그것을 믿고 그 길로 갔다.
그래서 70평 정도 되는 사무실을 임대해 교실 5개와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개인 부스 60개와 책·걸상 100여 개를 갖추었다. 아내는 교육을 담당하고 나는 학원 관리와 버스 운전을 맡기로 했다.
하늘이 우리를 도와서인지 학원은 시작하자마자 잘 가르치는 학원이라고 소문이 나서 수강생들이 붐비기 시작했다. 학원 강사들도 새로 채용했지만 제일 바쁜 건 나였다. 시간마다 학원 버스로 아이들을 태워 오고 태워 가야 하는데 수강생 수가 많아지자 혼자서는 보통 힘들지가 않았다.
학원을 중심으로 반경 2~3Km 안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널려 사는 학생들의 집과 학교, 또 다른 과목의 학원들에서 학생들을 실어 오고 집까지 데려다주는 일은 마치 매 역전마다 자기 시간에 꼭 도착해야 하는 열차와도 같았다.
그런데 열차는 시간만 되면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나는 달랐다. 철 없는 애들이 시간을 잘 지킬 리가 만무했다. 약속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갔는데 학생이 없어 학부모에게 전화를 하느라고 10분이라도 지체하면 다음 장소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의 학부모에게서 왜 학원 버스가 제 시간에 오지 않느냐고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심지어 학원에 전화를 거는 바람에 학원장인 아내에게서 무슨 일이냐고 전화가 오고 난리다.
한 아이 때문에 10분만 시간이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과 또 그 다음 장소에서는 20분 이상씩 늦어지게 된다. 그러면 학부모들은 여름 복더위에 또는 추운 겨울에 아이들을 죽이려 한다면서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으로 난리가 난다.
물론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다. 무조건 참아야 하는 것도 분명 아니다. 그러나 30·40대의 젊은 엄마들이 자기 자식의 잘못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작정 학원 버스 운전기사가 잘못했다고 몰아칠 때는 혈압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아이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늘은 이 집 애가, 다음 날은 저 집 애가 돌아가면서 시간을 어겼다. 그럴 때마다 극성 어머니의 불만지수도 함께 폭증했다. 한 마디로 나의 죄가 점점 더 쌓여간 것이다.
더 큰 문제가 터졌다. 내가 끝까지 참지 못하고 어느 날부터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별히 까다롭게 구는 학부모의 전화가 오면 상황 설명을 하다가 그 다음은 너무 그러지 말라는 식으로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북한 출신 사람의 성격과 참을성의 한계인 것 같다.
그러면 그 학부모는 나에게서 당한 분풀이를 내 아내에게 해댔다. “원장님, 학원버스 운전기사 탈북자 같은데 당장 바꾸세요.” “원장님, 그 학원이 아무리 잘 가르쳐도 운전사 안 바꾸면 우리 애는 그 학원에 안 보냅니다.” “탈북자 운전기사를 내보내야 그 학원이 삽니다”라고.
물론 나하고 전화로 다툰 한두 명의 학부모가 제기한 의견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 문제 때문에 여러 번 싸웠고 나는 매일 저녁 술로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아내였다. 우리가 부부인 줄 모르는 학부모들이 아내에게 ‘탈북자 운전기사를 당장 내쫓으라’고 하니, ‘그 운전사가 내 남편’이라고 툭 까놓고 말도 못 하는 아내는 제발 참으라고 하소연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내의 말이 옳다. 또 우리 학원에 자식을 맡긴 학부모에게 감사해야 함도 옳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요상하더라. 나도 우리 학원이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이 나이에 대한민국에 망명 와서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학원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은 생각이 매일 굴뚝같았다.
그렇게 2년 세월이 흘러 처음으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의사가 지금 하는 일을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생명이 위험하다는 충고를 했다. 그래서 한국인 운전기사를 채용해 오늘까지 16년 세월이 흘렀다.
나의 간단한 이야기 같지만 이것이 우리 3만여 명의 탈북자들이 대한민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렵고 가슴 아픈 경우의 하나다. 물론 우리 탈북자들의 결함도 많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들의 그 따가운 시선과 돈으로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냉대와 비웃음은 정말 참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그래도 그때가 내 인생에서 내가 처음으로 내 손으로 뭔가를 이루어낸 보람찬 시절이었다.
*오늘 생일 72돐을 맞고 보내며 가랑잎 같은 나의 지나간 생의 흔적 하나를 세상에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