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읽다 보면 시대와 공간을 넘어 재미있는 일치점을 발견할 때가 있다. 조금 민망스런 이야기지만 성기가 크다 하여 출세한 두 남자가 있다. ‘기화(奇貨)’란 고사성어로 유명한 춘추전국시대의 여불위가 발탁했던 노애란 인물과 고려시대 천추태후의 애인이자 정치적 수하였던 김치양이란 인물이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를 기이한 보물(奇貨)로 여겨 막대한 투자를 한 뒤 그를 왕위에까지 올린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여불위는 임신한 자신의 첩을 자초에게 바쳤고, 그녀는 정(진시황)을 낳았다. 정(政)이 13세 되던 해 그의 ‘명목상의 친부’인 자초(장양왕)가 죽자 정(政)은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진시황이다. 진시황이 즉위한 이후 몇 년간 여불위는 진시황의 친모인 태후와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위험한 일이었다. 장성해가는 진시황이 둘의 관계를 눈치 채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참 정염을 불태우던 진시황의 모후는 여불위와의 밀회를 고집했다. 이때 여불위는 위험천만한 관계를 끝내고자 성적 매력이 강한 남자를 태후에게 바쳤다. 그 남자가 바로 노애였다. <사기>에도 여불위가 태후에게 바치기 위해 대음인(大陰人, 성기가 큰 남자)을 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노애가 태후의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노애는 태후의 후원 속에 가신 1천 여명을 거느리는 장신후로 봉해졌다. 성기가 컸던 이유로 귀족의 작위를 받았던 것이다.
비슷한 인물은 우리 한국사에도 존재한다. <고려사>에 성기가 컸다고 적시된 인물, 고려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의 애인이었던 김치양이 바로 그 사람이다. “김치양은 동주인으로 천추태후 황보 씨의 외족이었다. 그는 성정이 간교하고 성기가 능히 수레바퀴를 꿸 수(陰能關輪) 있을 정도였다. 일찍이 머리털을 깎고 가짜 중이 되어 천추궁에 출입하면서 추악한 소문이 자자하였으므로 성종이 그것을 확인하고 곤장 쳐서 먼곳으로 귀양 보냈다.”(<고려사> 열전 반역 1 김치양 편)
수레바퀴를 꿸 수 있을 정도니 그 크기를 능히 짐작할 수 있겠다. 김치양 역시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와 천추태후의 최측근으로서 정치적 출셋길을 걸었다.
고려의 성종과 고려의 세종, 두 임금의 공통된 고충
고려의 성종과 조선의 세종은 공통점이 많은 국왕이었다. 두 임금 모두 유교적 정치체제를 지향했다. 또한 골육상쟁의 왕위계승전에서 벗어나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과정을 거쳐 즉위했다. 두 임금의 시기에 고려와 조선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이런 빛나는 치세를 이뤘다는 점은 행복한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두 임금은 친인척의 분방한 애정행각 때문에 꽤나 속을 끓여야 했다. 점잖은 인물들이었던 만큼 그 속 썩는 정도는 보통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세종은 두 며느리를 각각 투기와 동성애 때문에 내쳐야 했다. 성종은 이복 여동생인 헌애왕후(후일의 천추태후)와 헌정왕후 황보 씨의 애정행위 때문에 두 여동생의 파트너를 귀양 보내야 하는 고충을 겪었다.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모두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 씨 소생인 대종의 딸이었다. 자매는 경종의 3비와, 4비로 출가했다. 그러나 경종이 26살의 나이로 단명하자 황 씨 자매 모두 애인을 두었다. 경종이 죽고 난 뒤 연애를 했으니 불륜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헌애왕후는 김치양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동생인 헌정왕후는 태조의 아들로 그녀의 작은 아버지인 안종 욱과 관계를 가졌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헌정왕후 황보 씨도 대종의 딸인바 경종이 죽자 대궐에서 나와서 왕륜사 남쪽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그가 혹령에 올라서 소변을 누었더니 소변이 흘러서 온 나라에 넘치었으며 그것이 모두 변하여 은(銀)바다로 되었다. 이 꿈을 깨고 점을 치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가지게 되리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왕후가 ‘나는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 물었다.
당시 안종의 집과 왕후의 집이 서로 가까운 까닭에 자주 왕래하다가 서로 통하여 임신이 되었다. 하지만 만삭이 되어도 감히 임신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성종 11년(992) 7월에 왕후가 안종의 집에서 자고 있을 때 그 집 종들이 화목을 뜰에 쌓고 불을 지르니 불꽃이 올라서 마치 화재가 난 듯하여 백관들이 달려와서 불을 껐다. 그때 성종도 급히 위문하러 가서 본즉 그 집 종들이 사실대로 고하였다. 그래서 안종을 귀양보냈는데 왕후는 부끄러워서 울고 있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 집 문어귀에 이르렀을 때 뱃속의 태아가 움직였다. 그래서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았으나 산모는 죽었다. 성종이 유모를 택하여 그 아이를 양육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아이가 장성한 후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현종이다.”
판박이인 문희와 헌정왕후의 꿈
재미있는 것은 헌정왕후의 태몽과 출산과정이 계통이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능화 선생이 <조선여속고>에서 밝힌 바 있듯 김유신의 동생이자 김춘추의 부인으로 문명왕후가 된 문희와 고려 태조의 조부인 작제건의 어머니 진의(辰義)의 태몽은 판에 박은 듯 똑같다. 문희와 진의 둘 다 산꼭대기에 올라 오줌을 누자 세상이 온통 오줌바다가 된 언니의 꿈을 산 것이다. 그리고 왕이 될 자식을 낳은 것도 같다. 진의의 아버지 보육의 꿈은 헌정왕후의 꿈과 똑같았다. 혹령에 올라 남쪽을 향해 오줌을 누자, 그것이 온 나라 산천에 넘치고 마침내 은바다로 변한 것이다. 뭔가 냄새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왕건의 세계(世系)는 조선조의 <용비어천가>가 이성계 가문을 신비한 가문으로 조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으로 꾸며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왕가의 신성함을 드러내는 데 ‘오줌이 세상을 넘치게 하는’ 꿈이 동원된 것은 왕가의 상징조작 과정으로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헌정왕후의 집 종들이 뜬금없이 집뜰에 꽃나무를 쌓아두고 불을 지른 것 역시 김유신이 문희의 임신 사실을 안 후 한 행동과 동일한 것이었다. 김유신은 문희가 혼전에 임신하자 그 아버지가 김춘추란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그 죄를 물어 불태워 죽이겠다는 소문을 낸 뒤 집뜰에 나뭇단을 붙태워 연기를 피어올렸다. 선덕여왕이 남산에 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안 김유신이 왕에게 동생을 죽일 것이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선덕여왕이 그 사실을 알고는 김춘추에게 문희를 구할 것을 명해 김춘추는 문희와 혼인을 하게 되었다. 헌정왕후의 집 종, 곧 그의 측근들 역시 집뜰에 불을 질러 그녀의 불가피한 출산을 알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문희 때와는 달리 파트너가 작은아버지인 관계로 혼인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출산 직후 죽음을 맞았다.
어쨌든 성종으로서는 누이가 출산을 하다 죽으니 가엾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어린 현종이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무릎 위로 기어오르자 그를 가엾게 여겨 안종에게 데려가 키울 것을 명했다.
고려 천추태후 대 당 측천무후
이렇듯 인정받지 못한 사랑을 했던 두 자매였지만 언니인 천추태후는 달랐다. 그녀는 이복오빠인 성종이 죽고 아들인 목종이 즉위하자 섭정에 나섰다. 섭정과 동시에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이란 벼슬을 주었다. 이후 몇 해 안 돼 왕의 존중과 총애가 비길 바 없이 되어 벼슬이 우복야겸삼사사(정2품)란 고위직에 올랐다. 천추태후를 배경으로 하여 벼슬아치에 대한 인사권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서에 기록된 대로 ‘대물(大物)’을 가진 덕분에 실세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러나 천추태후가 김치양을 단순히 애인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진시황의 어머니가 노애를 성적인 파트너로만 삼았던 것과는 달랐다. 천추태후는 유교적 정치체제를 지향했던 이복오빠 성종과는 완연히 다른 정치노선을 걸었다. 천추태후는 고려의 전통적이고 복고적인 정치를 추구했다. 그래서 유교보다는 불교와 도교를 다시금 중시했고, 고려의 전통적인 토속신앙을 숭상했다. 성종 집권 시 경시되었던 서경(西京, 평양)을 중시했다. 그를 위해 목종에게 서경 행차를 권하여 태조의 북방정책을 환기시켰다. 이 같은 정치노선을 위해 천추태후는 외족인 김치양과 황보 씨 일가를 중심으로 한 친위세력을 구축했다. 이것은 곧 김치양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할 수 없었던 조건이기도 했다.
<고려왕실 족내혼 연구>의 저자인 정용숙 박사는 김치양을 활용한 천추태후의 정치를 중국 당나라 때의 측천무후와 비교하기도 한다. 측천무후 역시 섭정을 하면서 당나라 정치 전반을 관장했다. 측천무후는 미약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신진관료층을 배양하여 반대파인 고위직 인사와 전통적 귀족층을 제거하였다. 또한 당시의 불교 숭앙 분위기를 타고 자신의 애인인 괴승 설회의를 조종하여 <대운경>이란 불경을 널리 유포했었다. 결국 독자적 세력기반을 구축한 측천무후는 새로운 제국을 세워 중국 유일의 여자황제로 즉위했다.
천추태후 역시 과거제를 확충하여 신진세력을 배양했고, 전통적인 귀족관료층을 숙청했다. 또 승려 출신인 김치양을 통해 사원을 건립하고 불교행사와 전통적인 국가 신앙을 대폭 지원했다. 이런 천추태후의 행보에 유교적 소양이 강한 관료층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런 관료층의 불만은 차기 왕위를 둘러싼 두 세력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목종 6년(1004)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관계해 아들을 낳았다. 천추태후는 이 아이를 목종의 뒤를 잇는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자면 자신의 동생 헌정왕후가 삼촌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낳은 대량원군(뒤의 현종)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량원군만이 왕위계승권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천추태후의 정치적 파트너
결코 용인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사랑으로 고초를 겪었던 대량원군. 불행한 성장과정에 있던 조카였지만, 천추태후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방해하는 최대의 걸림돌에 불과했다. 그녀는 대량원군을 절로 보내 중이 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 왕자들이 중이 되는 것은 잉여권력을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대량원군은 왕씨 성을 가진 유일한 왕자였다. 이미 유교적 충신관을 신봉하는 관료세력은 대량원군을 다음 대의 후계자로 옹립하고자 움직이고 있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제거하고자 궁녀를 보내 독이 든 술과 떡을 보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량원군은 그때마다 주변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천추태후 측과 유교적 관료그룹 간의 갈등은 결국 강조의 난을 일으킨 관료층의 승리로 끝났다. 최항, 최충순 등의 관료세력은 서북면순검사로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강조와 손을 잡고 대량원군을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천추태후는 아들인 목종과 함께 유배당한 뒤 죽음을 맞았다.
김치양은 흔히 고려사에서 간신의 대표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것도 태후의 치마폭에 휩싸여 권세를 휘두른 역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역사의 패자에게 기록은 없다. 유교적 관료그룹의 반격에 손 한번 못 써보고 순식간에 당했을 뿐이다. <고려사>에서는 김치양을 반역자의 하나로 놓지만 반역의 대상인 목종이 어머니 천추태후와 함께 유배지로 떠나야 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리고 이 모자는 유배지로 가는 길에 군사들에게 살해당했다. 강조의 밀명이 있었다고 한다.
김치양은 고려의 독자적 국가체제와 문화를 갖추고자 했던, 야심에 찬 천추태후의 정치적 파트너였을 가능성이 크다. 야사에 기록된 것처럼 성욕에 사로잡힌 태후의 성적 노리개는 분명코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