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 전쟁이 끝난 후 즉 1850년에 광서성의 동남부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였다. 1850년에 발생하여 1851년에 국호를 태평천국이라 정하고 1853년에 남경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고 1864년 남경이 외국의 원조를 받은 청군에게 포위당하여 태평천국이 망할 때까지 전후 약 50년간은 滿漢양 민족의 투쟁시기다.
이 난으로 청조가 전복되지는 않았지만 이 난을 계기로 하여 한족의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고 또 서양 문화에 대한 인식도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서양 세력의 침입은 더욱 심각하게 되어 중국의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난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첫째 아편 밀수로 인한 은의 대량 유출로 경제 사정이 나빠지자 백성들은 곤궁에 빠지게 되고 정부는 재정난에 허덕이게 된다.
둘째 관리들의 부패가 극에 달하여 백성들에 대한 수탈과 무사안일에 빠져있었다.
셋째 경지의 부족과 천재지변의 연속으로 농민들은 생계를 잃게 되었다.
중국 역사를 보면 약 2,3백년 통일하는 동안에는 반드시 1,2차의 소학살이 있고 2,3백년이 지나면 또 1차의 대학살의 과정이 연속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중국 역사를 가리켜 사람을 죽이는 역사라고 한다. 이러한 학살의 주기설에 있어서 중요한 해석은 진한이래 생산방법에 이렇다 할 혁신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는 증가되어도 경지 면적과 생산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정도가 지나게 되면 다수의 실업 군중이 발생하게 되고 결국 몇몇의 걸물들이 이 무뢰의 군중을 거느리고 학살을 자행하고 학살이 심하면 인구가 경지면적에 비례하게 되고 다시 평온해진다는 논리이다.
넷째 만주족의 지배에 저항하는 한족의 비밀결사 활동이다. 이들은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아편 전쟁에서 청국의 무능을 확인하고는 혁명사업을 일으키게 된다.
태평천국의 주연 인물은 홍수전,양수청이고 다른 한쪽에 증국번, 이홍장이 있다.
홍수전은 광동 화현인 사람으로 우연히 기독교 교리 서적을 읽고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1844
년 그는 그의 학우와 함께 上帝會(하느님을 상제라한다)라는 비밀결사를 창설하였다. 후에 그는 홍콩에 있는 로바츠라는 미국 목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2개월 후 광서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상제회의 회원이 2천명에 가까웠고 홍수전은 드디어 그들의 수령이 되었는데 이로부터 회원이 날로 증가되었다.
상제회가 광서성의 산간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 직접동기는 청조의 관헌이 상제회를 탄압했기 때문이다. 1850년 11월에 난을 일으키자 도처에서 빈민이나 비밀 결사 단체를 흡수하여 곧 큰 세력이 되었다. 홍수전은 태평군을(홍수전은 종교 문제만 몰두하고 반란의 실제상의 수령은 양수청이었다.) 거느리고 북벌을 시작하여 광서 영안을 점령하고 태평천국을 건설하였다.
이들의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토지의 균등 분배, 생산물도 독점할수 없는 공산적 사회를 규범으로 정하였다.
태평군은 계속해서 남경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았다. 그리고 종군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귀가케 할뿐더러 병졸들이 민가를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용서없이 사형에 처하는 등으로 법령을 엄격히 집행했기 때문에 민심이 태평천국에 쏠리었다. 이에 영,불,미 등의 주중대표들은 모두 남경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태평군의 질서와 훈련이 민중에까지 보급되어 있는 상황을 보고 대단히 감복하였다. 그래서 태평군을 진정한 혁명군으로 보고 실질 상황을 본국 정부에 각각 보고 했기 때문에 모두 태평군과 청군이 대항하는 기간에는 엄정 중립을 지킬 것을 선언하였다.
태평천국이 대세력이 되니까 잡다한 분자를 포함하여 자신들의 내부로부터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혁명 정신을 잃고 남경에서 안주하고 있였다.
태평천국의 군 지휘자들은 돈을 밝히고 여색을 탐하였다. 또한 지도자들간에 서로 모함하는 일이 일어났다. 양수청이 일체의 군정 대사를 맡아 일을 처리하자 홍수전은 그를 의심하여 1856년 양수청과 그의 가족을 몰살시켰다.
태평천국이 내홍으로 단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원조를 쟁취하지도 못한 것과는 달리 만청 정부는 새로 배치를 하여 충분한 반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태평천국의 공산정책이 귀족,관료,지주,상인들에게 공포감을 갖게 하였다. 또한 그들이 신봉하는 기독교는 일반 민중들의 관습에 맞지 않아 태평군의 유교파괴운동에 대하여 지식분자들은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관료,대지주,상인이 영도하는 무장부대가 각지에서 조직이 되어 만청 정부와 결합하여 공동으로 태평군에 대항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증국번이 조직한 湘軍과 이홍장이 조직한 淮軍은 전투력이 가장 강하였고 나중에 태평군을 멸망시킨 주력 부대가 되었다.
태평천국은 부패하고 이들의 기독교 또한 왜곡되자 외국 세력들은 태평천국의 실력으로는 청국을 타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오히려 청군을 원조하여 조속히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청군이 의용군을 모집하게 되고 간부에 유럽인을 초빙했다. 이 부대는 서양식으로 훈련하고 서양총으로 무장했다.
결국 태평천국은 진압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 부대는 청군이 아니라 모집된 민병(湘軍·淮軍)이었다. 이로부터 피정복 민족이었던 한인들은 겨우 자신을 회복하여 차차 청조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되었다. 상군과 회군을 거느리고 난 진압에 공이 큰 증국번과 이홍장은 중앙에 진출하여 청말의 중심 인물이 되며, 또한 이들에 의해서 지방 분권적인 군벌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