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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이영도 시조에 나타난 ‘그리움’의 몸짓
이 광 녕(문학박사, 시조시인)
1. 들어가며
이영도(李永道)는 1945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1976년 작고할 때까지 근 30여 년 간 한국시조 문단을 이끌어온 여류시조시인이다. 그는 해방 후 혼란기 속에서 현대시조가 그 기틀을 잡고 대중 속에 자리잡기까지 여류시조단의 중심적 역할로 시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영도의 작품세계 중에서 가장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미적 요소를 추출해 낸다면 바로 그리움의 미학이다. 해방 후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그가 걸어가야 할 향방은 전통과 개방, 과거와 현실, 애기(愛己)와 애타(愛他)의 관념적 갈림길의 접점에서 고민하면서 여성으로서의 행복을 꿈꾸고 사랑의 아픔을 달래며 살았던 것이 그녀의 인생 전부다. 정운(丁蕓) 이영도(李永道)의 작품세계는 크게 그리움의 미학성과 귀소본능의 고향성과 사회 현실에 대한 참여성 등으로 대별할 수 있으나, 아무래도 전체적인 주조를 이루면서 내면적 진실이 섬세하게 잘 드러난 것은 여성적인 면모의 고독과 ‘그리움’의 세계이다.
본고에서는, 이영도의 작품세계 전반을 고루 살펴보는 것은 너무 범위가 넓고 오히려 문채(文彩)의 특징을 살펴보기에는 합당치 못한 점이 있어, 그녀의 작품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작가의 미학적 특성을 고찰함으로써 후배 시인들에게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2. 정운(丁蕓) 이영도(李永道)의 생애
정운 이영도는 1916년 10월 22일,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마을에서 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종수와 불자인 어머니 이봉래 사이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월성 이씨 가문인 그녀의 집안은 만석꾼으로 유명한 명문이었는데, 아버지는 소실을 거느리고 객지 첩살림으로 떠돌았기 때문에 그녀는 조부모님과 어머니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시골 선비댁 외며느리로 시집 온 그녀의 어머니는 고단한 시집살이에 종사하느라 여념이 없는 마음씨 곱고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이영도는 아버지보다는 조부모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녀의 수필 <인생의 길목에서>라는 글에 나타난 그녀의 유년기를 보면, 그녀는 언제나 조부모님의 거처인 사랑채에서 그분들의 애정에 업혀 갖은 재롱을 다 피우고 귀염을 독차지했으며, 그녀의 별명도 ‘아양단지’로 통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의 증조부는 을사늑약 뒤 망국의 한을 승복자락에 감싸고 향리 뒷산인 용각산 깊숙이 대운암이란 암자를 지어 속세를 등지셨고, 조부님께서는 적국의 치하에서는 벼슬을 단념하시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가면서 고향에다 <의명학당>이란 사립학교를 세워 농촌의 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에 심혈을 기울이셨다
이러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정운은 본래의 타고난 천성도 있었겠지만, 지조와 가풍을 중히 여기고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가 7살 때, 집터 문제로 부당하게 요구하는 일본인 관리에게 어른들이 옥신각신 하고 있을 때 어린 그녀가 불쑥 나서서 항변하자, 일본인 관리가 ‘저놈의 계집애 나중에 큰일 저지르고 말겠네, 고노야로’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녀의 조부모는 그녀의 강직하고 당돌스런 면모를 걱정하여 객지에 보내서 공부를 시키겠다는 생각을 접고 동경이나 북경유학의 기회도 주지 않고 가정교사를 두고 그녀를 길러냈다. 그래서 이영도의 학벌은 1924년 밀양초등학교 6년을 다닌 것이 전부다.
그녀의 조부모는 그녀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용각산과 마을 앞을 굽이쳐 흘러가는 비파강, 강 건녀편에 넓게 펼쳐진 강변의 자갈밭 등, 어린 시절 그녀의 고향은 그녀의 문학 창작의 원천이 되었고 문학 정서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게 성장한 그녀는 남편복이 없었다. 1937년(21세) 밀양박씨이며 대구 부호의 아들 박기수와 혼인을 하였는데 나이는 정운보다 한 살 위였으나, 허약한 체질로 늘 병치레를 치르다가 결국은 딸 하나를 남겨 둔 채, 결혼 8년만인 1945년 위궤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정운은 남편과 사별 후 생계를 위한 직장생활로, 1953년까지 통영에 있는 통영여고 교사로 재직하였는데, 이 시기는 그녀의 일생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한 시기였다. 이 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 중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와의 만남은 그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고 또한 그와의 교류로 문단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12월에는 첫 작품 「제야」를 동인지 <죽순>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청마와는 20여 년 간 교제하면서 열애로 발전하여 문학 창작의 큰 동인이요 근원이 되게 하였다. 1949년에는 과로와 폐침윤으로 쓰러져 마산 결핵 요양소에 입원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오랜 가풍으로 섬겨왔던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1953년 5월부터 1954년 10월까지는 부산 남성여중고 교사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택 당호(堂號)를 ‘수연정(水然亭)’으로 하고,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을 발간하게 되었다. 1955년에는 폐침윤이 재발하여 휴양을 겸해서 마산의 성지여고 교사로 전근하면서 당호를 ‘계명암(鷄鳴庵)’으로 하였다. 1956년 부산여대 강사로 취임하면서 동래 온천장 후생주택에 들어 당호를 ‘애일당(愛一堂)’이라 이름하고 안정을 취하면서 <부산일보> 문예란에 고정으로 기고하면서 「바람」, 「여원」, 「시조 2제」 등 본격적인 시조시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7년에는 시조 「지리산초(智異山抄)」(현대문학 8월>, 1958년에는 수필집 <춘근집(春芹集)>을 발간하고, 시조 「한라산」(현대문학,5월>을, 1959년에는 「설악산시초(雪嶽山詩抄)」(현대문학 9월)을 발표하였다.
1960년에는 어머니 시조모임인 <달무리회>를 조직하여 시조보급에 앞장섰으며, 1961년 시조 「경주시초(慶州詩抄)」, 1963년에 부산 어린이집 관장으로 취임하고 <꽃무리회>를 조직하여 동네 꽃가꾸기 사업과 주변 환경 정화사업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65년에는 현대문학 2월호에 시조 「수혈」을, 8월에는 「목련화」를 발표하였고, 1966년에는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을 발간하고, 그해 8월, 어린이집 관장과 교양 봉사 <달무리회>, <꽃무리회> 활동과 <청저집>, <춘근집> 등의 활동을 인정받아 부산시로부터 눌원(訥園)문화상을 받았다.
1967년 청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뜨자 이영도는 크게 상처를 받고 그가 평생의 안주처로 생각했던 애일당을 떠나 서울 마포구로 이주하였다. 1968년에는 중앙일보(3월)에 시조 「백록담」을 발표하고 그해 오빠 이호우의 <휴화산>과 같이 <석류>란 제호로 시집을 내고, 1969년 5월 ‘정운문학상’을 제정하였다.
1970년 1월, 오빠 이호우가 심장마비로 급서(急逝)하자, 청마 사별에 이어 또다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그해에 딸 진아를 결혼시켰다. 1971년에는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을 간행하였고, 1974년에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강사로 취임했다. 1975년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과 여류문학인 부회장으로 취임하여 문단을 이끌어갔다.
그러다가 1976년 3월 6일, 61세에 그녀의 유고집 <언약(言約)>의 서문과 수필집 <나의 그리움은 오직 깊고 푸른 것>의 교정을 부탁해 놓고 뇌일혈로 갑작스럽게 쓰러져 작고하였다. 남편을 잃으면서 극심한 외로움과 병치레와 정인에 대한 고독과 그리움으로 싸워온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문학은 그녀의 도피처요 영혼의 안식처요 양식이었기에 그녀는 그리움의 정한과 고독감을 오로지 문학에다 쏟아 놓고 표연히 떠나간 것이다.
3. 시조(時調) 속에 드러난 고독과 그리움의 애잔한 몸짓
송나라의 구양수가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이라 말했듯이, 시는 절절한 사랑의 체험이 농축되었을 때 독자들을 울릴 만한 진실한 감성적 표현이 나온다. 정운 이영도는 20대에 남편과 사별하고 교사의 직분과 청상과부의 입장으로 청마 유치환를 만나고부터 그녀의 인생은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국어교사인 청마와의 만남은 그녀의 문학세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요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처음엔 문우로서 우정으로 출발을 하였지만, 교직으로 봉직하며 20여 년 간 교제를 지속하면서 나눈 애모의 정은 그녀의 문학세계에 중심축을 이루면서 문인으로서의 금자탑을 쌓아 나아가게 된다. 그녀의 문학세계가 더 진솔하고 감동적인 울림으로 절절하게 표출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가슴 속에 맺힌 풀지 못한 정한(情恨) 때문일 것이다. 청마에게는 엄연히 부인과 자녀가 있었고, 엄격한 가풍 밑에서 성장한 정운은 지엄한 정절을 지켜내야 하는 입장이기에 그녀의 사랑은 그러한 인습의 벽에 막히어 더욱 애절하였으니, 그녀는 인내심과 정절심으로 감내하면서 오로지 문학으로써 끓어오르는 애모의 정감을 분출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시조들에는 「무제.1」, 「그리움」, 「비」, 「바람1」, 「탑.3」, 「강설」, 「국화」, 「단풍」, 「바다」, 「청맹(靑盲)의 창(窓)」 등에서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 「무제.1」 전문
청마와 정운과의 사랑은 사회 규범적 논리로 보아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정운이 비록 남편을 사별하고 독신으로 지내는 입장이었지만 오랜 전통 가풍의 엄격한 규례가 그녀의 뇌리 속에 자리잡고 있었고, 청마 또한 유부남으로서 서로가 선뜻 다가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저 만나면 민망하고 어색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은 위의 글과 같이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보다가 하염없이 보내니라’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리라. 청마는 지혜와 재색을 겸비한 그녀에게 온통 마음이 가 있었고, 정운 또한 문학적 소양과 지성을 겸비한 청마의 진솔한 면모에 이끌림이 있었으니, 위의 글에서처럼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라고 하며 그 속내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거리가 비록 ‘건너지 못할 강’같다고는 하나 어찌 단절의 강을 넘지 못하랴! 마음과 마음은 흐르고 흘러서 이어지고 가지 못하는 곳이 없으니 청마는 끓어오르는 연정을 매일매일의 ‘연서’로 분출해 내었다. 두 사람의 사귐이 20년을 넘으면서 청마의 편지가 무려 5,000여 통이나 된다고 하니 거의 매일 한통씩의 연서를 써 보냈다는 결론이 나온다. 참으로 놀라운 정성이요 애틋하기 짝이 없는 소위 ‘플라토닉 사랑’이다.
청마는 오랜 구애 끝에 「그리움」이란 시를 통하여 그의 파도처럼 솟구치는 그의 연정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위의 글 「무제.1」은 아마도 청마의 끝없는 구애에 정운 이영도가 화답한 시조인 듯하다. 청마의 ‘그리움’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솟구치며 밀려드는 것이었다면, 이영도의 ‘그리움’은 뭍 같이 까딱 않고 있다가 차츰차츰 조금씩 열려 애절하게 스며드는 것이었다.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 「그리움」 전문
자존심이 강한 정운에게 있어 청마는 문단의 선배요 정신적 지주였지만 역시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진솔한 구애 앞에 겉으론 애써 외면하였지만 내심으론 복받쳐 오르는 그리움을 억제할 길 없어 ‘월컥’하는 심경으로 토로하고 만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때론 ‘그리움의 아픔’라는 애틋함을 수반한다. 작가는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하면서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불현듯 터져 나오는 그리움의 분화구를 어쩌지 못한다. 이 시조는 단수이지만, 3연 7행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다. 이러한 형식은 각 장(章)의 독립적 역할과 기능을 중시하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도모할 때 쓰인다. 특히 종장에 무게를 두고 3행으로 분행하여 주제성을 강조할 때 유용하다. 이 글에서 가장 실감실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종장의 “월컥 한 가슴”부분이다. ‘울컥’도 아니고 ‘월컥‘이다. ’월컥‘이라는 부사는 ’갑자기 힘껏 밀치거나 잡아당기는 모양‘, ’갑작스럽게 통째로 뒤집히는 모양‘, ’먹은 것을 별안간 다 게워내는 모양‘ 등을 말한다. 이영도의 사랑은 끝없이 펼쳐진 황야에서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 천생연분과 같은 아름다운 인연이었지만, 스스로는 마음껏 풀어나갈 수 없는 애틋하고 한 맺힌 사랑이었다.
20대에 청상과부가 되고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숱한 나날을 견뎌내야 했던 그녀의 가슴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분화구 안의 용암,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월컥‘이라는 시어를 끌어왔고, 시조 단수로서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압축적 기법으로 실감 있게 잘 표출해 내었다.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 「비」 전문
외로움과 고독 속에 늘 침잠해 있던 정운 이영도는 달무리, 낙화, 비, 절벽, 석류, 단풍 등과 같은 자연에 의탁하여 거기에 자아라는 존재를 감정이입하면서 애정과 위로를 받곤 하였다. 바람은 바람대로 꽃은 꽃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그리움의 매개체로서 그녀의 문학세계에 녹아들어와 함께 교유하며 사랑 감정을 공유하였다.
윗글 「비」를 읽으면 고요하고 적막한 밤중에 소리 없이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리움에 젖는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중심소재인 ‘비’가 작가를 위로해 주는 객관적 상관물로 등장하여 시상을 전개시켜 나간다. 그러기에 외로움도 보배인 양 오붓하다. 떨어지는 빗소리는 어쩌면 임의 목소리인 듯, 외로움을 토닥여주는 임의 손길인 듯, 실실이 사연을 풀어 놓고 창문을 노크하기도 한다. 고요 속에 스며드는 그리움의 상념이 신선하다. 이글은 객관적 상관물인 자연에 작가의 감성을 이입하여 의미부여를 해줌으로써 작가의 심리적 안정감을 도모하였고,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 돋보이는 글이다.
너는 가지에 앉아
짐승 같이 울부짖고
이 한밤 내 마음은
외딴 산(山)직인데
가실 수 없는 멍일래
자리잡은 그리움.
- 「바람.1」 전문
이영도는 시조 단수 창작을 즐겨하였다. 시조집 <청저집>에서는 전체 62편 중 29편(46%)가, <석류>에서는 전체 91편 중 64편(70%)가, <언약>에서는 전체 63편 중 40편(63%)가 단수 시조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면 전체 시조 중 약 60%가 단수시조로 쓰여졌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가 시조 혁신의 하나로 연작쓰기를 주장하였으나, 이영도는 연작보다는 오히려 서정성과 행갈이의 변화에서 현대성을 찾고자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이영도의 오빠인 이호우(李鎬雨)가 시조의 본령을 단수에서 찾고자 했다는 맥락과 일통한다고 보겠다.
<바람.1>은 청마와의 관계가 잘 드러난 시조이다. 청마의 강렬한 구애는 이영도에게 있어서 한줄기 바람이었다. 끝내 뭍에 도달하여 정착하고 합쳐질 수 없는 바람, 그러나 그 바람은 가실 수 없는 멍이 되어 한 여인의 가슴에 그리움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 「탑(塔).3」 전문
이영도는 고독과 외로움이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였다. 너와 나와의 거리는 가깝고도 멀었다.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사라져버리는 무지갯빛 사랑, 그러기에 이승에서 못다 한 애모(愛慕)는 사리로 맺혀 영원히 푸른 돌로 굳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절박한 사랑을 외면한 채 형벌처럼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이영도! 그녀의 이러한 정한(情恨)은 이 밖에도, 「절벽」, 「별」, 「바위」, 「단풍」 등의 시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눈이 오시네, 당신 가고
점점이 자욱마다
덮어도 덮어도 번지는
장밋빛 호곡의 월휘
쟁쟁히
아픔을 밝히며
이 한밤을 쌓이네.
그 밤 닭 울기 전 너는
세 번을 부인하던 이름
오늘 내 불면의 밤을
삼억의 삼만으로 쌓이네
쟁쟁히
말씀을 밝히며
이 한 밤을 쌓이네.
- 「강설」 전문
이 시조는 이영도의 세 번째 시집 <언약>에 실려 있는 전 2수의 연시조이다. 제1수는 ‘당신’ 가고 난 지난 사연을 돌이키며 슬픈 감정을 토로하였다. 눈이 쌓여 덮여도 덮여도 번져가기만 하는 ‘장밋빛 호곡’의 슬픈 이미지는 제2수에 들어 슬픔의 감정을 기독교적 상징성으로까지 승화시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누군가를 마음껏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찌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랴! 그러나 정운 이영도는 사랑이지만 사랑이 아닌 현실에 놀라 서성거리며 꽃에, 바위에, 눈에 외로운 심정을 투사시키면서 스스로를 위안 받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시집 <언약>에는 이영도의 기독교적 의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녀는 노산에게 <언약>의 서문을 부탁해 놓고 그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이 시집에서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본향으로 회귀하려는 초월적 자세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기에 <청저집>이나 <석류>에서 보였던 애모의 정한은 여기서 기독교적 기원으로 승화되고 있다.
4. 한국적 정한(情恨)의 계승
‘한국적 이별의 정한’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애이불비(哀而不悲)’다. 인고(忍苦)의 의미가 스며 있는 이것을 글 그대로 풀이한다면 ‘슬프지만 슬퍼하지 않는다’이다. 역설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이 말을 좀 더 의미 깊게 풀이하자면 ‘속으론 슬프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이다. 이러한 정서는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살아오는 동안에 부딪히고 깎이고 시달려온 서러움과 애환이 가슴 속 응어리로 남아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한국인다운 내면적 한(恨)의 정서다. 한국인의 정서는 ’이별의 정한‘에서 특히 잘 나타나는데 소월의 <진달래꽃>과 같은 경우는 바로 그 예이다.
한국적 이별의 정한이 잘 나타난 글들(중요한 부분만 발췌)을 살펴보면,
A
날러는 엇디 살라 ᄒᆞ고 / ᄇᆞ리고 가시리잇고 //
잡ᄉᆞ와 두어리 마ᄂᆞᄂᆞᆫ / 선ᄒᆞ면 아니 올세라 //
설온 님 보내ᄋᆞᆸ노니 / 가시ᄂᆞᆫ ᄃᆞᆺ 도셔오쇼셔
- 작자미상, 「가시리」(귀호곡) 일부
B
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ᄃᆞ냐
이시랴 ᄒᆞ더면 가랴마ᄂᆞᆫ 제 구ᄐᆡ야
보내고 그리ᄂᆞᆫ 情은 나도 몰라 ᄒᆞ노라
- 황진이 시조 「어져 내일이야」 전문
C
가시는 걸음 걸음 /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 「진달래꽃」 일부
D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는 아니하였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 님의 침묵을 휘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일부
한국적 이별의 정한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오랜 전통적 애환에서 비롯된 민족적 정서이다. 거기엔 민족의 서러움과 애절함과 순박함이 깃들어 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속으로 끓으며 서성이면서, 섣불리 보내지만 내심으론 보내지 않고 붙들어 잡아끌고 있는 정서이다.
글 A 고려가요에서는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다시 오시라’라고 하였고, 글 B에서는 ‘붙잡았으면 어찌 내 님이 가시랴마는’ 하면서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하고 아쉬워하며 다시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글 C 소월의 「진달래꽃」에서는 임을 고이 보내드리고 있지만 내심으로는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강렬한 의지가 모순어법에 의해 잘 나타나 있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라는 표현은 소위 ‘애이불비(哀而不悲)’이며 하나의 반어적 표현이고, 입술을 깨물며 스스로를 자위하고 있는 한국적 여성의 인고(忍苦)의 정한과도 맞물려 있다.
이러한 글들에서는 한국적 이별의 독특한 정서가 잘 나타나 있다. 적극적이지 않고 소극적이며 표면적이지 않고 내면적이며 두드러지지 않고 은근하며 순간적이지 않고 영원성을 지녔다.
정운 이영도의 작품 세계에는 이러한 한국적 인고(忍苦)와 정한(情恨)의 정서가 그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그러한 면이 그녀만의 독특한 문채로 은근히 빛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A
오면 민망하고 /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 종일을 두고 /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 일어서 가면 / 하염없이 보내니라
- 이영도, 「무제.1」 전문
B
정작 가득하여 / 안을 수 없는 하늘
이 목숨 탁 트임도 / 당신의 뜻이거니
빛 부신 / 그 음성(音聲) 마저 / 내 귀는 닫힌 절벽
높고 먼 뜻을 이르랴 / 제 눈에 티도 못 비친
그 청맹(靑盲)의 창(窓) / 닦아도 닦아도 흐리고
더듬어 / 생애(生涯) 한 가슴에 / 부딫치는 또 한 벽(壁)
- 이영도, 「청맹(靑盲)의 창(窓)」 전문
글 A에서는 그리운 임을 하루종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어색하게 마주하는 여인의 심정이 실감있게 드러나 있다. 그 음성도 그 모습도 모두 하루 종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님이다. 그러나 막상 만나면 민망하고 어색하고 말은 도로 없어진다. 그러다가 서로 여윈 가슴 허공만 바라보다가 하염없이 보낸다. 이러한 정서적 표현은 황진이의 「어져 내일이야」의 경우와 흡사하다.
글 B에서는 하늘같은 사랑하는 임의 곁에 함께 할 수 없는 여인의 한이 더욱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하늘이 너무 가득하기에 너무 충만하기에 오히려 안기거나 안을 수 없다. 이 목숨의 탁 트임도 모두가 하늘인 당신의 뜻이지만, 내 귀에는 하늘같은 눈부신 당신의 음성도 닫힌 절벽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내 눈도 청맹과니처럼 임의 높은 뜻도 바라볼 수 없는 현실, 닦아도 닦아도 흐리고 그저 가슴에 부딫치는 눈앞의 절벽일 뿐이다.
이 시조를 읽으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중,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라는 부분을 연상하게 된다. 너무나 하늘같기에, 너무나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임의 앞에 서면 귀 먹고 눈이 멀지만 너무나 먼 곳에 있기에 꽉 막힌 절벽 앞에서 작가는 울부짖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영도 시조의 서정적 특징은 작자미상의 「가시리」나 황진이나 김소월, 한용운의 서정과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김동욱은 ‘황진이 이후 황진이가 없다’라고 현대 시인들의 작품성을 평가절하 하였으나, 이영도의 작품은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모습으로 여럿 중에서 뛰어나 한국 여인의 전통적 정서를 잘 드러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뛰어 넘어 승화(昇華)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러한 면은 이영도의 작품세계가 단순한 여인의 생활 잡기가 아니라 민족정서의 계승자로서 그 시조사적 자리매김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5. 맺는 말
이영도의 시 세계는 그리움과 고독의 심연으로부터 우러나온 한 여인의 절규다.
첫 번째 시집 <청저집(靑苧集)>에는 그녀의 생애가 갑자기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 시기에, 깊은 향수와 더불어 한국적 여성의 기다림과 고독감, 소박하고 연연한 정(情)이 흘러넘치는 사념(思念)의 시세계가 펼쳐져 있다. 두 번째 시집인 <석류(石榴)>에서는 정인(情人)에 대한 애정의 토로가 주조를 이루었고, 유고시집인 <언약(言約)>에서는 주로 그리움과 정한, 그리고 외로움을 신앙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초월적 기원과 본향에 대한 회귀의식이 드러나 있다. 전체적으로 이영도의 시 세계는 고독과 그리움과 정한, 그리고 그 아픔을 극복해 내고자하는 목소리가 주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과의 이별’이라는 비극적 상황 아래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숙명적 자세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를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보고자 하는 자위의 모습을 역력히 보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발견되는 이영도 시 세계의 특징은 ‘한국적 정한의 전통적 맥’을 잇고 있다는 점이다. 청마와의 지고지난(至高至難)한 러브스토리는 뼈아픈 애정 체험으로 인한 ‘한국적 이별의 정한’으로 각인되어 그녀의 시세계를 물들였으며, 그것이 오빠 이호우의 시풍을 이어받아 ‘시조’라는 절제된 그릇에 품격 높게 승화되어 오롯이 펼쳐져 있다. 그녀는 한국적 이별의 정한을 그저 감성을 토로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슬픔을 승화시키는 경지에까지 올려놓았다.
이러한 그녀의 작가적 자세는 후배 시인들이 유심히 살펴보고 귀감으로 삼아야 될 것이며, 「가시리」나 황진이, 김소월, 한용운 등에 이어 ‘한국적 정한(情恨)의 계승자’라는 차원에서 그 시사적 가치가 새로이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광녕 약력>
문학박사, 시조시인, 신한대 외래교수, 문예창작 지도교수, (사)한국시조사랑시인협회(이사장),
강동문인협회(고문), 한국가곡작사가협회(명예회장), 세종문학회(고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