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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란 ?
1. 청교도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청교도란 영국의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예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청교도 운동은 영국의 종교개혁 운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청교도들은 영국 종교 개혁의 완성의 주역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세교회 안에서도 선구자들의 종교개혁이 있었듯이 영국 내에도 몇몇 선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국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의 교황 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534년의 ‘수장령(首長令)’에 따라 영국은 국왕을 최고 관리자로 하는 독립된 교회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이다.
영국에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으나 국교회 내에는 여전히 카톨릭적인 요소가 교회에 잔존하여 있었다. 반쯤 이루어진 종교개혁에 반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종교개혁을 이루기 위하여 등장한 무리들이 청교도들이다. 로이드존스(D. Martyn Lloyd-Jones)의 표현처럼 “먼저 의식들과 예복들에서 시작이 되어서 끝내는 영국 국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고,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열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청교도는 부분적으로 개혁된 교회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하게 개혁된 교회를 원하였다.” 더욱 발전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던 1560년 대에는 청교도 운동이 하나의 조직된 운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결국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청교도 운동은 1662년 대 추방령으로 종식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가 다시 주어지고 국교회 밖에서 계속된다.
이렇듯 청교도는 한 세기 반가량 영국에서 진행된 개신교 종교 개혁운동이다. 청교도 운동은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이어받은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청교도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시기는 1564년으로 추정되는데, 이 이름은 처음에 영국 국교회에 비타협적인 개신교도들을 내리깎는 경멸조의 적개심이 가득한 호칭이었다. “까탈스럽운 사람들, 비판적이고 고집불통의 사람들”, “까탈스럽고 비판적이고,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작당들”, “국교도에 반대하는 악명 높은 청교도들”이라는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처음에 사용되었을 때에 대적자들에 의해서 붙여진 경멸조의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스러운 표현이 되었듯이 청교도들이라는 경멸의 표현도 얼마 후에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영광스러운 이름이 된 것이다.
2. 청교도들! 그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한다. 왜 그들을 알아야 하는가? 조셉 파이파( Dr. Joseph A. Pipa)는 청교도들을 알아야하는 중요한 이유를 두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그들은 우리와 비슷한 상황 속에 살면서도 효과적으로 복음 사역을 하였기 때문이며, 다음으로 그들은 우리의 신앙고백적인 표준서들의 발원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임스 패커(J.I. Packer)는 일곱까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로, 그들은 기독교의 성숙의 모델이라는 점이며, 둘째로, 그들은 신학적 통합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며, 셋째로. 그들의 영적 표현의 질이 뛰어나다는 점이며, 넷째로 그들은 효율적 행위에의 열정을 가졌다는 점이며, 다섯째로, 그들은 가정생활의 안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섯째로 그들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지각을 가졌다는 점이며, 일곱째로 그들은 교회 갱신의 이상을 가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청교도들을 알게 되면 참된 성도의 삶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을 알아야한다.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인지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청교도들은 성경의 사람들이다.
엘리자벳 시대의 청교도인 토마스 샘슨 박사(Dr. Thomas Sampson)는 청교도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누구도 정당하게 잘못을 찾을 수 없는 교리와 생활을 지닌 형제들” 이라고 한다. 리랜드 라이큰(Leland Ryken)도 표현하였듯이 청교도들은 “이 세상의 성자들(Worldly Saints)”이다. “청교도들은 세속의 오염으로부터 격리된 거룩한 양심을 소유한자들이었다. 이들은 초대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사도적 순결과 거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세속으로부터 격리되기를 염원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하였다.” 오늘날 청교도들이 누구인가? 라고 한마디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2000년 교회역사 속에서 성경 밖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성경적인 사람들’이다. 즉 성경에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로이드존스의 말처럼 “청교도는 언제나 신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제임스 헤른(James Heron, D.D)은 "청교도들이 원했던 것은 가능한 성경속에 나타난 원리들에 적합한, 교리는 물론이고 교회의 규율과 행정조직을 갖기 원했던 것이다.“ 라고 한다. 청교도들은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복음적인 관점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가 온전히 드러났다.
2) 청교도들은 온전한 개혁을 이루려고 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이 살던 당시의 카톨릭의 사제들은 정치적이고 형식적이었고, 반쯤 개혁된 영국 국교회(성공회)도 이러한 잔재가 남아 있었다. 또한 왕이 교회의 통치자가 되어 교회를 국가의 시녀로 전락시키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성직자들 가운데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벙어리 성직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설교 없이 의식만 거행되는 예배가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종교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빈곤 및 도덕성의 상실로 사회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하였다. 이러한 때에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반대하고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또한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을 기초로 죄와 회개 구원의 은혜를 중심한 설교를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룩과 경건을 생활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다. 결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 (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라는 온전한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비록 영국 국교회 내에서는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영국 개신교 교회에 종교개혁의 주역들이 되었다.
3) 청교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설교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은 다른 어떤 자이기 전에 먼저 설교자였다”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아래 있게 했을 뿐만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설교의 권위를 되찾게 되었다. 특히 이것은 강단위의 위의 설교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청교도들은 무혈적이고 영적이고 구두적인 개혁을 설교를 통하여 이룬 자들이다. 그들은 “설교시간은 대체로 예배시간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가장 핵심요소 였다.” 그들은 설교를 공예배의 절정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즉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수반되는 말씀 선포와 그 말씀으로 부터 오는 교훈을 구원관 성화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중요한 중재수단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강단위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위하여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였고, 실제의 강단에서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 - 1691)의 말처럼 설교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선포하였고, 그들 모두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의 진리를 설교함으로서 인생의 제일 되는 주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임을 강조하고,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유일한 대상이 그리스도임을 제시하고,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경건과 거룩 임을 일깨웠고, 철저한 직업 소명의식을 일깨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전한 가정생활을 하게하고, 세상의 쾌락과 사치로부터 돌아서게 했다. 설교된 성경의 진리에 의해서 실제적으로 설교자들은 가장 성경적인 삶을 살았음은 물론이고 회중속의 청교도들도 그와 같이 살았다.
4) 청교도들은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경건한 의무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중요시되는 단어가 ‘의무’라는 단어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의무가 성경의 내용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며 이것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요 그 대가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순수한 신앙이 가정과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서 실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그렇게 원하고 싸웠던 것이다.” 청교도들은 교회와 가정에서 청교도의 삶의 의무를 실제적으로 강조하였는데 (한편 목회자들은 설교에서 공통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순종과 충성을 강조했으며 양떼들에게 신앙과 의무를 이행하라고 강조했다.) 즉 청교도들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던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성수 주일이며 2. 예배이며 3. 기도이며 4. 경건한 가정이다. 5. 거룩한 삶이다.
l 먼저 청교도들은 철저한 주일 성수의 의무이다. 리차드 백스터의 자서전에서 입증되듯이 안식일 엄숙한 준수는 사실상 청교도 활동 중 가장 우선적이고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들은 주일을 ‘영혼을 위한 장날’ 이요 단체의 찬양과 기도로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날로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이 체계화시킨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제 118항목은 이점을 분명히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의무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왜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주어졌습니까? 답: 가족의 어른들과 다른 윗사람들을 향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특별히 주어진 것은 그들 자신에게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통솔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로 안식일을 지키게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며, 그들 자신의 일로 아랫사람들의 안식일을 방해하는 일이 흔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제60항목과 대요리문답 제117항목에서는 어떻게 안식을 거룩히 지켜야하는 지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대요리 문답에서 “안식일 혹은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하여야 합니까? 답: 안식일 혹은 주일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온 종일 거룩히 쉼으로 할 것이며, 언제나 죄악된 일을 그칠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 합당한 세상 일이나 오락까지 그만두어야 하며, 부득이한 일과 자선 사업에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시간을 전적으로 공사간 예배하는 일에 드리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마음을 준비할 것이며, 세상 일을 미리 부지런히 절제있게 배치하고 적절히 처리하여 주일의 의무에 보다 더 자유로이 또는 적절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더나아가서 주일성수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금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다. 소요리문답 제61항목과 대요리문답 제119항목) “제 사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 사 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요구된 의무를 하지 않는 모든 것과 모든 부주의와 등한함과 그것들을 무익하게 이행함과 이에 지쳐 괴로워함이며, 또 게으름과 죄악된 일을 하는 것과, 세속적인 일과 오락에 대하여 필요 없는 일, 말, 생각들을 함으로써 그 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러하듯 청교도들은 주일성수를 의무로 여기며 철저하게 지킨 좋은 정통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러한 주일성수에 대한 의무와 철저한 준수는 리차드 박스터가 사역하던 키더민스터의 변화된 모습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일날에 거리에서 전혀 무질서가 보이지 않게 되었고 거리를 지날 때 수 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설교를 되풀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l 다음으로 예배의 의무이다. 청교도들은 형식적이고 의식에 치우친 예배를 배격하고 성경에 근거한 순수한 예배, 간결한 예배를 사모하였다. 그들은 존 카튼(John Cotton, 1585-1652))의 표현처럼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사모함이다.” 청교도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기독교 예배의 세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한다. 곧 지역교회에서의 공적 예배와 가족 단위의 가정 예배와 골방에서의 개인 예배인 것이다. 이중에 공적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공적 예배는 주일의 중심이다. 그들의 주일은 아침과 오후 혹은 저녁의 공적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복음적인 예배는 중생한 자들만의 특권이며 동시에 의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발견하는 중요한 특징가운데 그들은 가정에서 중요한 의무도 예배였다. 웨스트 민스터 예배모범을 보면 “모든 가정이 통상 아침과 저녁에 시행하야 하는 가정예배는 기도와 성경읽기와 찬양으로 이루어 진다”라고 말한다. 청교도들은 가정 예배를 권면하였고 실제로 가정에서 매일 예배하였다. 리차드 백스터는 “가정예배를 위해 단지 2명만 있어도 된다”고 하며, 죠지 휫필드는 “마음만 올바르게 갗추어져 있다면 가정예배를 품위 있고 건덕스럽게 드리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비장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죠엘 비키(Joel R. Beeke)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부모들이 가정예배를 지속적으로 시행해야하는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부부와 자녀들의 영원한 복락을 위해, 선한 양심의 만족을 위해, 자녀 양육의 도움을 위해, 주어진 시간이 짧기에, 하나님과 그의 교회에 대한 사람 때문에 가정에서 매일 지속적으로 예배해야한다는 것이다.
l 다음으로 기도의 의무이다.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고정된 기도서를 거절하고 즉석기도를 했다. 그들은 주일을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 내내 개인기도와 가족기도로 충만했다. 청교도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낙스가 기도의 사람이었듯이 청교도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청교도들은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냈으며 기도의 의무 실천을 계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의무가 대요리 문답 185항목과 186항목에 잘 나타난다. “185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답: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위엄에 대한 엄숙한 이해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필요한 것들과 죄에 대한 깊은 의식과 통회하며 감사하는 열띤 마음을 가지고 이해, 믿음, 성실, 사랑과 인내로써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뜻에 겸손히 복종함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186항목에서 “하나님께서 기도의 의무에 관한 우리의 지침으로 어떠한 규칙을 주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기도의 의무에 관한 지침으로 사용되지만, 특별한 기도 법칙은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양식인데, 곧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l 다음으로 경건한 가정의 의무이다. 청교도들은 가정을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인 동시에 하나의 교회로 보았다. 그들은 남편을 목사로 아내를 전도사로 하는 작은 교회라고 주장했다. “남편의 의무는 가족을 신앙으로 이끌고 주일날 그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고 가정에서 그날 온종일 성별하도록 감독하고, 자녀에게 교리문답을 하고 믿음을 가르치고 설교를 들은 후에 가족 전체의 시험을 보아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부족하면 이해시키고, 매일 가정 예배를 이상적으로 하루에 두 번 인도하고, 언제나 모든 문제에어서 근실한 모범이 되는 것이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라며 “자녀들을 그들의 자녀로 만들기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위해 애쓴다”고 믿었다. 설교자들은 가정을 경건한 가정으로 유지할 것을 강조하였다. ⑤ 다섯째로 거룩한 삶에 대한 의무이다. 칼빈(John Calvin, 1509 - 1564)은 물론이고 존 오웬( John Owen, 1616 - 1683)이 말했듯이 “그리스도인의 땅의 삶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이다.”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거룩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이기도 하며 인간에게 명해진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 의무를 실행할 수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바르게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목적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다”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죄를 억제하여야 하고 죄와 피흘리기 까지 싸워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다루어 ‘죄죽임의 교리(A doctrine on mortification)’를 강조한다. 이 땅에서 완전한 거룩이 불가능하지만 그들은 거룩의 최고봉에 이르기 위한 열망으로 완전한 거룩을 추구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그들은 성경이외의 교회사에서 가장 거룩한 무리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탁원한 거룩은 그들의 특징인 동시에 그들의 능력이 되어서 자신들의 시대는 물론 지금껏 남긴 글을 통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다.
5) 청교도들은 개신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다.
초기 청교도들은 장로교도였다. 제임스 헤른(James Heron)은 독립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존 로빈슨(John Robinson)의 말을 인용한다.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교황에게, 신교도들은 감독들에게, 청교도들은 장로회에, 우리들은 교회로 불리 우는 다수의 회중의 몸에 그것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장로정치가 초기의 청교도들의 특생이었음을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말합니다. “청교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신구조요 하나의 정신입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참된 청교도 주의는 궁극적으로 장로교회 안에서 발견됩니다. 특히 존 낙스에게서 말입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이 칼빈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에 여러 개신교의 산실이 되었다. 물론 다른 시각에 바라보면 더 초기적인 형태의 청교도는 침례교도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전체 개신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과 대륙으로 떠나 교회에 형성에 영향을 미쳤으며 영국 교회 내에서도 장로교회, 영국의 회중교회, 분리주의교회, 감리교회 등에 영향을 미쳤다.
3.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은 무엇인가?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의 유일한 근간은 성경이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을 한마디로 말하라 고한다면 칼빈주의적인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물론 청교도들은 다양한 신학적인 뿌리를 형성하는 사람들이었다. 청교도들은 후대에 감리교회에 영향을 주고 침례교회에 영향을 주기도 고교회주의 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초기의 청교도들은 모두 칼빈주의 자들이었다 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신학과 사상은 종교 개혁의 연속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영국 국교회에 종교개혁이 온전히 완성되기를 소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문헌이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종교개혁의 4가지의 모토와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을 기초로 형성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네가지의 모토(Motto)는 ①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 Only through Scripture) ② 오직 믿음! (Sola Fide : Only by Faith) ③ 오직 은혜 ! (Sola Gratia : Only by Grace) ④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 : Glory be to God Alone)이다. 또한 여기에 청교도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⑤ 오직 그리스도! (Soli Christo : Only through Christ)라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청교도들의 신학을 이러한 다섯 가지의 캐치 프레이즈( 5 Catchphrase :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i Christo, Soli Deo Gloria ) 안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
①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종교개혁자들은 한결 같이 ‘오직 성경’을 강조한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이런 주장은 성경이외의 변질된 교회전통이나 교황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톨릭 교회의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듯 그들은 오직 성경이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임을 강조한다.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의 전통보다도 성경 자체에 권위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황의 권위를 부정한다. "교황이 성경보다 위라는 점에 나는 반대하네. 누가 그에게 그런 권위를 주는 것인가? 그의 근거는 성경에 없고, 그의 교서는 단 한 번도 성경에 근거한 적이 없다네. 아첨꾼들이 교황을 성경 위에 올려 놓고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우겨대지만, 그렇게 되면 성경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인간의 말뿐일세." 이렇듯 루터는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사상에 반대하여 "나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힌 포로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이 하나님과 종교 문제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외쳤다. 그리고 자신이 친히 독일어로 된 자국어 성경을 번역하였다. 칼빈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개념이 기초를 두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을 말한다. 즉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이란 성경에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의 모든 생각과 입의 모든 말들이 측정된다는 것이며 모든 삶의 유일한 척도이며 표준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직(sola)" 성경을 통해서 모든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전 삶에 있어서 주의 깊고 절제 있게 생각하고 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이 모든 것의 절대적인 기준이 됨을 강조하였다. 그밖에 종교 개혁자들도 한결 같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성서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이 교회의 권위 위에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이 신적인 기원과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 위에 두고 있으며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그들의 신학과 사상의 최고의 권위가 되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은 그대로 청교도들에게 이어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성경이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충분하게 알게 하시려고 진리를 온전히 기록해두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한다. “이 모든 책들(66권)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으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눅16:29,31, 엡2:20, 계22:18-19, 딤후3:16).”고 언급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권위를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면서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요일2:20,27, 요16:13-14, 고전2:10-12, 사59:21).”라고 한다. “성경은, 성경이 전수된 모든 나라의 자국어로 번역되어야 한다(고전14:6,9,11-12,24,27-28).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풍성히 거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합당한 방법으로 예배할 수 있게 하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를 통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골3:16, 롬15:4).”고 한다. 그리고 성경 해석에 대하여 “성경 해석을 위한 무오한 법칙은 성경 자체이다. 그러므로, 어떤 성경 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에 대하여 의문이 생긴 때에는(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여럿이 아니고 하나뿐임), 보다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다른 구절을 통해서 연구하고 알아내야 한다(벧1:20-21, 행15:15-16).”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에 관한 모든 논쟁들의 최고의 재판관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라도 정의한다. 이렇듯 성경이 무엇보다도 최고의 권위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웨스트 민스트 대요리 문답은 성경의 권위를 이렇게 표현한다. 제3번 항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라고 묻고는 이렇게 답한다. “신·구약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순종을 위한 유일한 법칙이다.”유일한 법칙이라는 표현이 성경의 권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대요리 문답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하는 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제157번 항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에 답하기를 “성경은 높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고,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만이 우리가 성경을 깨닫을 수 있게 하실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거기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부지런함과 성경의 내용 및 범위에 주의함과 묵상과 적용과 자기 부정과 기도함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성경이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신앙과 삶에 절대적으로 권위가 있음을 분명하게 언급하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친히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였을 뿐만아니라 실제로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신자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고 실제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입증하였던 것이다.
②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또 다른 모토는 오직 믿음이다. 여기서 오직 믿음은 이신 칭의 구원론의 핵심이다. 이것은 루터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 진리를 재발견한 것이다. 그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의와 그것을 수납하는 믿음을 깨달음으로 종교개혁이 포문이 열린 것이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그 성곽교회 문에다 면죄부(행위 구원)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계시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행위로 구원을 강조하는 모든 비성경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행위로 구원을 지양하고 오직 믿음( Sola Fide)을 모토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신학과 사상이 되었다. 사실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얻는다는 진리는 초대교부 암브로시우스(Ambrosius , 340~397)와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가 강조한 칭의론에 근거를 둔 것이었으며, 더욱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중심 진리였다. 루터가 재발견한 이신칭의 진리를 칼빈에게 와서 동일하게 주장된다. 그는 이 진리가 "종교의 유지를 위한 결정적 구심점"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칭의의 근거는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의뢰함이 없이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안식함이, 믿음의 본질인데, 믿음이 그만 한 견고성을 가져야 지옥의 ?모든 ?공세 앞에서도 실패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어 ?나간다”고 ?한다. 이것은 동일하게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의 근간이 되었다. 청교도들이 성경에 근거하여 제정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에서도 동일하게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종교 개혁의 선상에서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말하는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는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의에 있음을 명확히 한다.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행10:44; 갈2:16; 빌3:9; 행13:38,39; 엡2:7,8).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요1:12; 빌3:28; 5:1).”라고 한다. “그들의 칭의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며 (롬3:24; 엡1:7)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골1:21,22; 갈2:16; 딛3:4-7).는 것이다. 웨스트 민스트 대요리 문답에서도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로서 우리의 믿음을 강조한다. 제 70번 항목에서 “칭의가 무엇인가?” 이란 질문에 “칭의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의로 베푸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순종과 보상하시는 속죄 까닭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부여하시는 것인데,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제72번 항목에서 “의롭게 하는 믿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의롭게 하는 믿음은 죄인의 마음 속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여 구원을 베푸시는 은총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 말씀에 계시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제73번 항목에서 “믿음이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의롭게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오직 믿음은 다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적용하게 하는 도구로서 의롭게 할뿐이다.”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이란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인(심지어 믿음이 자신에게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여서 또 다른 행위로 생각하는 것까지)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수납하는 손(도구)을 말하는 것이다.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가 말했던 것처럼 “믿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기 보다는 오리려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의 결과이다.” 존 오웬은 구원 얻는 믿음이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방식만을 의지하며 그 구원 방식을 선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토마스 왓슨은 의롭게 하는 믿음이란 “자기부인, 믿음은 자신의 자라를 벗어나 우리 자신의 가치를 제거하는 것이고, 우리가 의를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 다음으로 의탁, 영혼은 예수 그리스에게 자신을 던져 버린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의지한다. …… 다음으로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킴, 그리스도를 적용시키는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으로 불린다.”고 한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 1600-1679)의 표현처럼 “믿음은 은혜의 보좌에 좌정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이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바라고 의지하는 믿음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이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③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은혜(Sola Gratia)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은 공로사상에 근거한 행위구원에 있다. 즉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니라 행위에 근거한 것이기에 수많은 성자를 숭배하고, 금식기도와 고행이 수반되었다. 그래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놓을 무렵에는 면죄부를 판매함으로 그것으로 지옥간 영혼일지라도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구원을 고민하면서 “어떻게 준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성경(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는 구원론의 재발견은 자신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만을 의존하게된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이 살길임을 외치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되었다. 그가 말하는 오직 은혜란 “모든 인간의 공덕과 행위를 배제하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를 위한 화목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사역에 의존하는 구원의 원인적 근원에 대한 슬로건이다.” 오직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사도바울이 말한 진리와 일치한 것이다. 에베소서 2장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하였고,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다 들인 주장인 것이다. 칼빈도 동일하게 오직 은혜로 인한 구원을 강조한다.?그는 그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불가항력적 은혜와 관련된 내용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주고 있다. 그는 신. 인협력설주의와 공로주의를 비평한다. 그는 소명과 중생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통한 선택의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의 의지를 통한 자력적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전에 선택과 그 은혜의 결과로 구원의 부르심과 중생이 주어지는 것으로 제시한다. “부르심은 선택의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 복음의 선포는 선택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지만, 이런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듣는 것이므로, 그 자체로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 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가르치신다. ……누구를 왜 부르시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그가 선택하신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 (더 나아가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 이와 같이 칼빈도 구원이 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나아가서 구원이후의 삶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전 과정이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은혜에 대한 사상은 청교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떠한 차원에서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은 오직 은혜에 대한 진리를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먼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효적 부르심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딤후1:9; 딛3:4,5; 엡2:4,5,8,9; 롬9:11).” 더 나아가서 칭의에 대해서도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롬3:24; 엡1:7).” 라고 분명히 언급하며, 또한 양자됨에 대해서도 “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엡1:5; 갈4:4,5).” 하나님의 은혜임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성화에서도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골1:11; 엡3:16-19),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라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은혜임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청교도들에게서 오직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진리가 더욱 명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다. 구원의 전 과정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의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다는 것이다.
④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자들이다. 즉 그들의 신학과 삶의 최종적인 목적인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강조하였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도 강조하였다. 그는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을 강조한 이면에는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과 사역의 주체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찬양을 드리며, 그 은덕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루터는 죄로 인하여 어두원진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너무나도 타락되어 있기 때문에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광을 그 자신에게 돌리려고 한다. 인간의 본성이 잘못되어 있음은 알면서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을 바로 잡기위하여 교육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진리를 루터가 주창하였다면 이것을 발전시켜서 자신의 신학의 중심주제로 삼은 사람은 칼빈이었다. 종교 개혁자들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칼빈의 중심사상은 Soli Deo Gloria 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 영혼의 구원보다도 더 중요한 일임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을 자기 실존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자신에게만 생각을 한정하는 것은 건강한 신학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일할 자들을 선택하심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서 기도를 강조하면서도 기도시에 중심 생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자기를 생각하거나 신뢰하지 말고 전적으로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만 생각하며, 자기의 욕심이 성취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의 모든 권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실현을 향해 나아가야함을 말한다. 제네바 교리문답을 살펴보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신학과 삶이 중심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문: 인간의 삶의 제일된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답: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2문: 무슨 이유에서 당신은 그렇게 말합니까?”라고 질문 하곤 이렇게 답한다. “답: 하나님은 우리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살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자녀들과 새신자의 성경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던 교리문답서의 내용에서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인 것이다. 여기서 그의 신학과 사상과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항 것인지 분명하게 알게된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사상은 청교도들에게 그대로 전하여져서 더욱 체계화 된다. 청교도들이 제정한 웨스트 민스트 대?소요리 문답에서 칼빈의 정신은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고 있다. 웨스트 민스트 대요리 문답에서 “제1번 항목. 사람의 제일 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 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 또한 소요리 문답에서도 “제1번 항목.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명확히 정리하고 있다. 청교도들이 교리 교육에서 최우선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진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볼 때에, 청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학과 사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들은 이 진리에 입각하여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적으로 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청교도들의 실제의 말을 살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에 대한 교리 혹은 가르침이다”라고 말하며, 토마스 왓슨은 “모든 사람들의 삶과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대강령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실제의 청교도들의 설교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혹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자신과 성품들)을 설교하기에 힘쓴 자들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지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도와주었다. 청교도들은 교회사속에서 가장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며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간 사람들이다.
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 (Soli Christo)이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의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맴도는 신학”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진리도 동일하게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과 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과 사상의 중심이 그리스도였다. “마리아와 성자들의 중보는 사족에 불과하며, 사제들의 중보적 역할도 그 필요성이 전무하다. 인간의 공덕체제로써의 성례전을 부정하며, 미사의 피 없는 희생제사 제도를 배격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단번에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인류구원을 위한 족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만이 인간구원의 소망이다.” 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중심 사상와 신학을 전개하였다. 특히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구원의 문제에 관한 신학의 중심테마였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완전히 새로운 진술을 이끌고 있는데 여기서 “십자가의 의미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CRUX sola nostra theologia) 라는 표현이며, ‘Crux probat omnia’는 십자가가 모든 것을 시험하듯 ‘십자가가 모든 것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오로지 십자가만이 심판자요 진리의 증인이라는 표현”이다. 구원의 전 과정의 중심이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더욱 분명하다. 그는 “세계사의 중심적 전환점은 그리스도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대 섭리사역인 구속활동을 행하신다. 칼빈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속사관을 언급하는데, 즉 메시야 사상이 역사 속의 종교의 기초, 기본이며, 모든 것들은 메시야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승귀의 신분이 강조되어 있다. 즉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의 권능적 위엄을 강조했더 것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없으면 휴지조작에 불과한 것처럼 청교도들의 신학과 사상에서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청교도 설교는 그 방향에 있어서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리차드 시베스(Richard Sibbes, 1577 - 1635)는 젊은 토마스 굳윈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젊은이, 만일 그대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설교해야 한다네” 이렇듯 “청교도 설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주위를 맴돌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모든 의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가 그 의도의 중심이다.” 윌리암 퍼킨슨은 예언의 기술에서 “설교 문제의 심장은 이것이다 ; 그리스도를 찬송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하여 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이렇듯 청교도들의 설교와 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였다.
이상에서 청교도의 신학과 사상을 16세기 종교개혁의 선상에서 다루었다. 특별히 종교개혁의 5가지 모토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며,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믿음(Sola Fide)이며,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은혜(Sola Gratia)이며,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Soli Deo Gloria)이며, 청교도 신학과 사상은 오직 그리스도 (Soli Christo)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신학과 사상의 토대위에 세워진 것이 바로 청교도 신학과 사상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할 때에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자의 사상과 신학을 체계화시키고 완성한자들이라고 할수 있다
[출처] 청교도란 ? (The Band of Puritans) |작성자 솔라피데
첫댓글 본 글은 청교도를 아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긴 합니다만, 개혁교회의 산물인 청교도와 그들이 가져온 생활에서 보여온 신앙이 성경적 관점에 선 바른 신앙으로 참된 주님의 교회로 서나가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모델적 모습으로 추구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더욱이 청교도들이 종교개혁자의 사상과 신학을 체계화시키고 완성한 자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청교도가 끼친 폐해적 영향도 참으로 크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본 글은 교회 역사 속에서 있어온 청교도를 이해하는 도움 글로 참조해야지, 여기에서 개혁주의 교회가 추구하고 따라가야 할 신앙의 모델로 여기고 그렇게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군요. 이천우 목사님이 역사적인 청교도와 개혁교회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
여기에 대해서는 개혁주의신앙 방에서 이미 많이 말했습니다. 하오니, 들어가셔서 두루 두루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
개혁주의신앙 게시판을 참고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