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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광순 高光洵 】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
1848년 2월 7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유천리(柳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이다. 부인은 금성 오씨錦城吳氏 혁규(赫圭)의 딸이며 2남 1녀를 두었다. 그의 생부는 정상(鼎相)이고 생모는 광산 김씨光山金氏이다. 8세 때 같은 집안의 경주(慶柱)와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양자로 들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의 둘째아들 의열공(義烈公)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의 11대 사손(祀孫)이 되었다. 10세 때부터 외조부 김경찬(金京燦)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의리를 중시하는 유학자로 성장하였다. 오직 유학의 육경(六經)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다른 분야의 저술을 접하지 않았다. 나이 40이 지나서야 서울로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시관(試官)의 부정을 준열히 힐책한 후 낙향한 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비판하는 고광순의 상소문(1896) [판형2] |
향리에서는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를 지극히 섬겼으며, 선과 덕을 좋아하는 선비로 이름났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1894년 여름 전남 구례(求禮)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 황현(黃玹)과 잠시 만나 정세를 논한 바 있었는데, 황현은 그를 늠름한 모습과 굴하지 않은 기상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1895년 (음)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왜적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내리고 이듬해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각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장성의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자 노사학파를 이끄는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기우만은 장성향교(長城鄕校)를 근거지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먼저 상소 운동을 통해 복수토적(復讐討賊), 단발령 철폐, 옛 제도의 복구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에 함께 가담한 주요 구성원은 의병장 기우만을 비롯한 기삼연(奇參衍)·기주현(奇周鉉)·양상태(梁相泰)·기동관(奇東觀)·이승학(李承鶴)·기재(奇宰) 등이다. 이들은 나주(羅州)로 이동하여 나주의병과 같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사당과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올려 거병을 알렸다. 나주의병과 전략을 협의한 끝에 광주로 이진하였다. 이때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그러자 상소를 올려 개화파의 개화 정책 및 단발령을 비판하며,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 개화파를 처단하고자 근왕의병(勤王義兵)에 나선 것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해산 명령에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을 뿐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자 의병을 다시 도모할 생각으로 영남과 호남을 오가며 동조자를 물색하였다.
1906년 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전북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이미 해산한 뒤였다. 그 후 전남 광양(光陽)의 백낙구(白樂九) 및 장성의 기우만과 힘을 합해 구례의 중대사(中大寺) 거의를 도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의 체포로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정신과 흔천동지(掀天動地)할만한 열성을 가지고 여러 번의 실패에도 용기가 꺾이지 않고” 다시금 의병을 준비하였다.
1906년 (음)12월 11일 담양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祭閣)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부장(副將) 고제량(高濟亮)·선봉장 고광수(高光秀)·좌익장 고광훈(高光薰)·우익장 고광채(高光彩)·참모 박기덕(朴基德)·고광문(高光文)·호군(犒軍) 윤영기(尹永淇)·종사 신덕균(申德均)·조동규(曺東圭) 등을 선임하였다. 이들은 남원의 양한규(梁漢奎)와 힘을 합해 남원성을 점령하여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양한규의 불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계획도 수포가 되었다. 황현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격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황현은 현재는 격문보다는 오직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야속한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불원복 태극기 [판형2] |
전남 각지를 순회하며 의병과 무기를 모으다가 1907년 음력 8월 장성 백양사 인근에서 전북에서 활동하던 김동신(金東臣) 의병장과 회맹(會盟)하였다. 이 자리에서 두 의병부대를 지리산을 근거지 삼아 활동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의 의병 활동을 알아챈 일본 군경은 고광순의 본가를 습격하여 방화함으로써 300년 종가의 사당만 겨우 남고 모든 가산이 불타고 말았다. 1907년 9월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계획한 이들은 먼저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전남 동복의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였다. 그 후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鷰谷寺)에 주둔한 후 ‘머지않아 회복한다’라는 의미의 불원복(不遠復) 세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웠다. 이는 국권 회복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피아골을 비롯한 구례와 하동의 주민들도 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밤마다 분향(焚香)하며 전승을 기원하였다. 북쪽 골짜기인 문수골에는 함께 활동하는 김동신 의병 부대가 주둔하며 서로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더욱이 지리산에는 산포수(山砲手)가 많아 의병의 전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
여러 의병부대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자,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려고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경남 진해(鎭海)의 중포(重砲) 부대와 광주의 수비대와 경찰까지 동원하였다. 마침 고광순 의병부대의 주력 부대는 의병을 충원하고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 출동 중이었다. 따라서 연곡사에 남아 있던 병력은 의병장을 비롯하여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들은 일제 군경의 돌연한 기습을 받았다. 그때가 1907년 (음)9월 17일이다. 긴박한 전투상황에서 “한 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것으로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너희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고제량은,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동생 광훈에게 군부(軍簿)를 주어 탈출시키고 남은 병사들과 함께 일제 군경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일제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화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의병장 이하 약 20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당시 일본 군경은 이 전투에서 무려 1,200발의 탄환을 소모할 정도로 고광순 부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연곡사 전투가 종료된 후 일본 군경은 연곡사의 14개 건물과 문수암을 소각한 후 철수하였다. 결국 연곡사 전투를 끝으로 의병 활동은 종식되었다.
고광순의병장 순국지인 연곡사(전남 구례) [판형2] |
구례의 주민들은 의병장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전장에 흩어진 장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특히 임준홍(林俊洪)은 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매장하였다.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황현(黃玹)은 박태현(朴泰鉉)과 함께 피아골에 들어와 봉분을 높이고 영면을 축원하고 약전(略傳)을 지었다. 1908년 음력 4월 고향으로 반장을 할 때 운구가 지나는 곳마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나 일제는 감히 제지하지 못하였다. 저술로는 『녹천유고(鹿川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48년 2월 7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유천리(柳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이다. 부인은 금성 오씨錦城吳氏 혁규(赫圭)의 딸이며 2남 1녀를 두었다. 그의 생부는 정상(鼎相)이고 생모는 광산 김씨光山金氏이다. 8세 때 같은 집안의 경주(慶柱)와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양자로 들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의 둘째아들 의열공(義烈公)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의 11대 사손(祀孫)이 되었다. 10세 때부터 외조부 김경찬(金京燦)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의리를 중시하는 유학자로 성장하였다. 오직 유학의 육경(六經)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다른 분야의 저술을 접하지 않았다. 나이 40이 지나서야 서울로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시관(試官)의 부정을 준열히 힐책한 후 낙향한 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비판하는 고광순의 상소문(1896) [판형2] |
향리에서는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를 지극히 섬겼으며, 선과 덕을 좋아하는 선비로 이름났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1894년 여름 전남 구례(求禮)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 황현(黃玹)과 잠시 만나 정세를 논한 바 있었는데, 황현은 그를 늠름한 모습과 굴하지 않은 기상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1895년 (음)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왜적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내리고 이듬해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각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장성의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자 노사학파를 이끄는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기우만은 장성향교(長城鄕校)를 근거지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먼저 상소 운동을 통해 복수토적(復讐討賊), 단발령 철폐, 옛 제도의 복구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에 함께 가담한 주요 구성원은 의병장 기우만을 비롯한 기삼연(奇參衍)·기주현(奇周鉉)·양상태(梁相泰)·기동관(奇東觀)·이승학(李承鶴)·기재(奇宰) 등이다. 이들은 나주(羅州)로 이동하여 나주의병과 같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사당과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올려 거병을 알렸다. 나주의병과 전략을 협의한 끝에 광주로 이진하였다. 이때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그러자 상소를 올려 개화파의 개화 정책 및 단발령을 비판하며,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 개화파를 처단하고자 근왕의병(勤王義兵)에 나선 것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해산 명령에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을 뿐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자 의병을 다시 도모할 생각으로 영남과 호남을 오가며 동조자를 물색하였다.
1906년 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전북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이미 해산한 뒤였다. 그 후 전남 광양(光陽)의 백낙구(白樂九) 및 장성의 기우만과 힘을 합해 구례의 중대사(中大寺) 거의를 도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의 체포로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정신과 흔천동지(掀天動地)할만한 열성을 가지고 여러 번의 실패에도 용기가 꺾이지 않고” 다시금 의병을 준비하였다.
1906년 (음)12월 11일 담양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祭閣)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부장(副將) 고제량(高濟亮)·선봉장 고광수(高光秀)·좌익장 고광훈(高光薰)·우익장 고광채(高光彩)·참모 박기덕(朴基德)·고광문(高光文)·호군(犒軍) 윤영기(尹永淇)·종사 신덕균(申德均)·조동규(曺東圭) 등을 선임하였다. 이들은 남원의 양한규(梁漢奎)와 힘을 합해 남원성을 점령하여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양한규의 불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계획도 수포가 되었다. 황현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격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황현은 현재는 격문보다는 오직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야속한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불원복 태극기 [판형2] |
전남 각지를 순회하며 의병과 무기를 모으다가 1907년 음력 8월 장성 백양사 인근에서 전북에서 활동하던 김동신(金東臣) 의병장과 회맹(會盟)하였다. 이 자리에서 두 의병부대를 지리산을 근거지 삼아 활동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의 의병 활동을 알아챈 일본 군경은 고광순의 본가를 습격하여 방화함으로써 300년 종가의 사당만 겨우 남고 모든 가산이 불타고 말았다. 1907년 9월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계획한 이들은 먼저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전남 동복의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였다. 그 후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鷰谷寺)에 주둔한 후 ‘머지않아 회복한다’라는 의미의 불원복(不遠復) 세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웠다. 이는 국권 회복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피아골을 비롯한 구례와 하동의 주민들도 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밤마다 분향(焚香)하며 전승을 기원하였다. 북쪽 골짜기인 문수골에는 함께 활동하는 김동신 의병 부대가 주둔하며 서로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더욱이 지리산에는 산포수(山砲手)가 많아 의병의 전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
여러 의병부대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자,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려고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경남 진해(鎭海)의 중포(重砲) 부대와 광주의 수비대와 경찰까지 동원하였다. 마침 고광순 의병부대의 주력 부대는 의병을 충원하고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 출동 중이었다. 따라서 연곡사에 남아 있던 병력은 의병장을 비롯하여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들은 일제 군경의 돌연한 기습을 받았다. 그때가 1907년 (음)9월 17일이다. 긴박한 전투상황에서 “한 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것으로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너희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고제량은,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동생 광훈에게 군부(軍簿)를 주어 탈출시키고 남은 병사들과 함께 일제 군경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일제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화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의병장 이하 약 20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당시 일본 군경은 이 전투에서 무려 1,200발의 탄환을 소모할 정도로 고광순 부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연곡사 전투가 종료된 후 일본 군경은 연곡사의 14개 건물과 문수암을 소각한 후 철수하였다. 결국 연곡사 전투를 끝으로 의병 활동은 종식되었다.
고광순의병장 순국지인 연곡사(전남 구례) [판형2] |
구례의 주민들은 의병장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전장에 흩어진 장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특히 임준홍(林俊洪)은 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매장하였다.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황현(黃玹)은 박태현(朴泰鉉)과 함께 피아골에 들어와 봉분을 높이고 영면을 축원하고 약전(略傳)을 지었다. 1908년 음력 4월 고향으로 반장을 할 때 운구가 지나는 곳마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나 일제는 감히 제지하지 못하였다. 저술로는 『녹천유고(鹿川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48년 2월 7일 전라남도 담양군(潭陽郡) 창평면(昌平面) 유천리(柳川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이다. 부인은 금성 오씨錦城吳氏 혁규(赫圭)의 딸이며 2남 1녀를 두었다. 그의 생부는 정상(鼎相)이고 생모는 광산 김씨光山金氏이다. 8세 때 같은 집안의 경주(慶柱)와 양천 허씨陽川許氏의 양자로 들어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의 둘째아들 의열공(義烈公)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의 11대 사손(祀孫)이 되었다. 10세 때부터 외조부 김경찬(金京燦)으로부터 한학을 배우며 의리를 중시하는 유학자로 성장하였다. 오직 유학의 육경(六經)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다른 분야의 저술을 접하지 않았다. 나이 40이 지나서야 서울로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시관(試官)의 부정을 준열히 힐책한 후 낙향한 후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비판하는 고광순의 상소문(1896) [판형2] |
향리에서는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를 지극히 섬겼으며, 선과 덕을 좋아하는 선비로 이름났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1894년 여름 전남 구례(求禮)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 황현(黃玹)과 잠시 만나 정세를 논한 바 있었는데, 황현은 그를 늠름한 모습과 굴하지 않은 기상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1895년 (음)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상소를 올려 왜적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내리고 이듬해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각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장성의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손자이자 노사학파를 이끄는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기우만은 장성향교(長城鄕校)를 근거지 삼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먼저 상소 운동을 통해 복수토적(復讐討賊), 단발령 철폐, 옛 제도의 복구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장성의병에 함께 가담한 주요 구성원은 의병장 기우만을 비롯한 기삼연(奇參衍)·기주현(奇周鉉)·양상태(梁相泰)·기동관(奇東觀)·이승학(李承鶴)·기재(奇宰) 등이다. 이들은 나주(羅州)로 이동하여 나주의병과 같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사당과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올려 거병을 알렸다. 나주의병과 전략을 협의한 끝에 광주로 이진하였다. 이때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강력히 종용하였다. 그러자 상소를 올려 개화파의 개화 정책 및 단발령을 비판하며, 일본 세력을 물리치고 개화파를 처단하고자 근왕의병(勤王義兵)에 나선 것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고종의 해산 명령에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였을 뿐 기대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자 의병을 다시 도모할 생각으로 영남과 호남을 오가며 동조자를 물색하였다.
1906년 봄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전북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이미 해산한 뒤였다. 그 후 전남 광양(光陽)의 백낙구(白樂九) 및 장성의 기우만과 힘을 합해 구례의 중대사(中大寺) 거의를 도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의 체포로 무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절불굴(百折不屈)하는 정신과 흔천동지(掀天動地)할만한 열성을 가지고 여러 번의 실패에도 용기가 꺾이지 않고” 다시금 의병을 준비하였다.
1906년 (음)12월 11일 담양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祭閣)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부장(副將) 고제량(高濟亮)·선봉장 고광수(高光秀)·좌익장 고광훈(高光薰)·우익장 고광채(高光彩)·참모 박기덕(朴基德)·고광문(高光文)·호군(犒軍) 윤영기(尹永淇)·종사 신덕균(申德均)·조동규(曺東圭) 등을 선임하였다. 이들은 남원의 양한규(梁漢奎)와 힘을 합해 남원성을 점령하여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 의병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양한규의 불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계획도 수포가 되었다. 황현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격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황현은 현재는 격문보다는 오직 노력하는 일이 중요하다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야속한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불원복 태극기 [판형2] |
전남 각지를 순회하며 의병과 무기를 모으다가 1907년 음력 8월 장성 백양사 인근에서 전북에서 활동하던 김동신(金東臣) 의병장과 회맹(會盟)하였다. 이 자리에서 두 의병부대를 지리산을 근거지 삼아 활동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의 의병 활동을 알아챈 일본 군경은 고광순의 본가를 습격하여 방화함으로써 300년 종가의 사당만 겨우 남고 모든 가산이 불타고 말았다. 1907년 9월 지리산으로 들어가 장기 항전을 계획한 이들은 먼저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전남 동복의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였다. 그 후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鷰谷寺)에 주둔한 후 ‘머지않아 회복한다’라는 의미의 불원복(不遠復) 세 글자를 쓴 깃발을 세웠다. 이는 국권 회복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피아골을 비롯한 구례와 하동의 주민들도 의병 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밤마다 분향(焚香)하며 전승을 기원하였다. 북쪽 골짜기인 문수골에는 함께 활동하는 김동신 의병 부대가 주둔하며 서로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더욱이 지리산에는 산포수(山砲手)가 많아 의병의 전력을 향상할 수 있었다.
여러 의병부대가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자,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려고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경남 진해(鎭海)의 중포(重砲) 부대와 광주의 수비대와 경찰까지 동원하였다. 마침 고광순 의병부대의 주력 부대는 의병을 충원하고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 출동 중이었다. 따라서 연곡사에 남아 있던 병력은 의병장을 비롯하여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들은 일제 군경의 돌연한 기습을 받았다. 그때가 1907년 (음)9월 17일이다. 긴박한 전투상황에서 “한 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는 것으로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다. 너희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라고 말하였다. 이에 고제량은,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말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동생 광훈에게 군부(軍簿)를 주어 탈출시키고 남은 병사들과 함께 일제 군경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일제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화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의병장 이하 약 20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하였다. 당시 일본 군경은 이 전투에서 무려 1,200발의 탄환을 소모할 정도로 고광순 부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연곡사 전투가 종료된 후 일본 군경은 연곡사의 14개 건물과 문수암을 소각한 후 철수하였다. 결국 연곡사 전투를 끝으로 의병 활동은 종식되었다.
고광순의병장 순국지인 연곡사(전남 구례) [판형2] |
구례의 주민들은 의병장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전장에 흩어진 장졸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특히 임준홍(林俊洪)은 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매장하였다.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황현(黃玹)은 박태현(朴泰鉉)과 함께 피아골에 들어와 봉분을 높이고 영면을 축원하고 약전(略傳)을 지었다. 1908년 음력 4월 고향으로 반장을 할 때 운구가 지나는 곳마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나 일제는 감히 제지하지 못하였다. 저술로는 『녹천유고(鹿川遺稿)』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