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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봄의 절기
사순절 기간에 네 교회로부터 ‘세계의 십자가 전’ 초청을 받았다. 어제 문을 연 부평교회를 시작으로 서울 주님의몸된교회와 통영 충무교회 그리고 청주 남부은샘교회이다. 40여일 순회전시 끝에 부활주일로 마무리된다. 교회마다 강조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 이전의 예를 보면 전농교회는 ‘평화’였고, 진관교회는 ‘행복한 예수님’이었다. 그리고 부평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기도’이다.
놀랍게도 세계의 십자가 안에 교회가 원하는 모든 주제가 담겨있다. 특히 하나님의 너른 품은 순회전시회의 단골 메뉴로, 8가지 소주제는 ‘고통, 긍휼, 위로, 구원, 고백, 기쁨, 평화, 생명’이다. 십자가 전시 준비에 참여하는 봉사자들이나, 전시를 관람하는 이들은 의외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마다 그럴싸한 해석을 한다. “제 눈에 안경”이란 말은 언제나 시의적절하다.
놀라는 이유는 그동안 경험 세계 밖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 ‘십자고상’(十字苦像)을 보고 가톨릭의 것이라며, 거리감을 두기도 한다. 정교회와 고대 교회들, 가톨릭과 개신교회가 고백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매달리지 않은 나무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2천 년의 그리스도교 역사가 담긴 십자가를 바라보면 더욱 겸손할 수 밖에 없다. 내 좁은 소견(所見)에 비해 십자가의 세계는 넓고, 세상의 십자가는 다양한 고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체코 보헤미안 신앙을 담아낸 ‘왕관십자가’는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몸 그 자체를 십자가로 표현한 것이다. 가장 구체적인 몸으로 십자가상을 만든 까닭은 가난한 구유의 출생부터 비참한 골고다의 죽으심까지 주님의 삶 전체가 십자가임을 증거하려는 배경이다. 왕관십자가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자유의 군주이며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란 개념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십자가와 면류관은 가장 대척적인 모습이지만, ‘왕관 십자가’는 섬기는 왕의 모습과 죽기까지 순종하신 메시야를 함축하고 있다. 왕관십자가는 봉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이다. 대표적으로 독일 기독교사회봉사국의 심벌은 십자가의 양 어깨 위에 왕관(Krone)을 얹은 모양이다. 베텔 장애인공동체의 상징 역시 왕관십자가를 응용하였다.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no cross no crown)는 격언처럼 면류관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고 본래 하나였다.
이제 주현절이 끝나고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평상 절기인 녹색에서 절제와 경건의 절기인 보라색으로 교회력의 빛깔이 바뀐 것이다. 축제의 기쁨에서 고난과 금욕으로 그리스도인의 표정이 바뀌는 시간인 것이다. 서양에서 성회수요일을 이틀 앞둔 장미의 월요일(Rosenmontag)에 절정을 이루는 카니발 축제는 좋은 보기이다. 카니발 전통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대표적 축제로 ‘육식을 버린다’는 금욕 전통을 뜻한다.
사람들은 카니발 축제에서 온갖 가면으로 자신을 감춘다. 남의 옷으로 자기 신분을 위장하고, 분장을 통해 얼굴을 가린다. 가장 흔한 사례가 배트맨, 수녀와 수사, 차도르를 쓴 여성, 청소부, 탈옥 죄수 따위이다. 평소 엄두를 내지 못한 분장과 가면의식으로 자신을 감추고, 소소한 방종일망정 마음껏 드러낸다. 자기를 감추는 일은 얼마나 편안한 경험인가? 따라서 카니발의 절정은 모든 편견의 벽과 간격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자유를 얻는 날이다.
이러한 자유를 만끽한 후에 화요일에는 대청소를 하고, 경건과 금욕의 절기인 사순절을 시작한다. 자기 비움과 버림으로 성회수요일을 맞는다는 것은 지극히 신앙적이다. 카니발을 우리말로 사육제(射肉祭)로 번역한 이유다. 말 그대로 육식과 쾌락, 오락, 낭비를 버린다는 뜻이다. 내가 버릴 것은 무엇이고, 버린 후에 바라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
사순절은 바라봄의 절기이다. 사순절(Lent)의 어원은 ‘바라 봄’(lens)이다. 내 안을 바라본다는 것은 내적 성장과 성숙을 의미한다. 사순절에 사람들은 절제와 금욕 등 더 많은 ‘특별한’ 열심을 강조한다. 사실 사순절은 특별화하는 기간이 아니다. 그동안 ‘특별’해 보이던 것을 내 몸에 맞게 ‘일상’화하는 그런 평상적인 경건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