防金居士野居
정도전(鄭道傳:1342~1398)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유학자 · 사상가 · 혁명가.
본관은 봉화. 자는 종지(宗之)이며 호는 삼봉(三峯)이다.
조선 전기 지경연예문춘추관사, 겸의흥친군위절제사 등을 역임.
스스로 조선의 개국 공신의 주역이라고 믿었다.
저서에 『삼봉집』 ·『경국육전』이 있다.
가을 구름 아득히 온 산이 적막한데
秋雲漠漠四山空 추운 막막 사산공
낙엽은 소리 없이 붉게 땅을 물들였네
落葉無聲滿地紅 낙엽무성만지홍
시냇가 다리에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을 물으니
立馬溪橋問歸路 입마계교문귀로
알지 못했네 이 몸이 그림 속에 있음을
不知身在畫圖中 부지신재화도중
*
예전에는 한실(큰 골짜기란 의미)에는
드문 드문 화전민이 살았다
내가 어릴 때 사람들을 따라 그곳에 가면
마치 옛날 조선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겨울에 얕은 도랑에 큰 돌을 들거나
커다란 겐노(?)로 돌을 내리쳐 개구리를 잡곤 했다
그곳 사람들은 개구리를 ‘홍파리’라 불렀다.
요즘은 잘 먹지 않지만,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영향보충으로 많이 먹었다.
일명 개구리가 죽을 때 앞다리를 들고 죽기 때문에
‘만세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천성적으로 무엇을 잡는 것을 싫은 까닭도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만,
그곳은 말 그대로 그림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을 같았다.
이발소에 가면 언제나 걸려있는
높은 산 골짜기에 물레방아가 돌고
어머님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아버님은 소 잔등에 짐을 싣고
지게 지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풍경 같은
개는 앞장서고 아이들이 마중 나오는 곳이다.
내가 유독 나이가 들어도 그리운 것은
나의 큰 누이의 수양어머니가 살았던 곳이라서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누이와 어떻게 인연을 맺어
수양어머니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옛날에는 웬만하면 수양어머니를 두셨다.
가끔 재를 넘어 그림 속 같은 야특 막 한 초가집이 있는 그곳에 놀러 가곤 했다
커다란 감나무 아래 옹달샘이 있고
앞마당 아래는 작은 여울이 흘렀다.
그곳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돌아가신 조상님들이
집을 내려다보는 곳
그곳에 순박한 인심이 풍경보다 더 좋았다.
지금은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정부의 화전민 정책으로
정든 산하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다.
그 후 왕래와 소식을 주고받았다가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소식이 요원해졌다.
확실한 연도는 모르지만
젊은 시절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옹달샘에는 낙엽이 쌓여서 물도 흐르지 않고
감나무는 죽은 가지를 늘어뜨리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이 머물다 간 집은 허물어져 흔적도 없고
풀숲에 떠나지 못한 조상님 산소, 몇 기가 있을 뿐이다.
지금은 그곳이 어떻게 또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그때는 나무를 땔감을 하던 시절이라
산길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길도 사라지고
혼자 재를 넘는 것도 무서울 리만큼 숲이 우거져 있다.
그곳에 가면
내가 자연 속에 있는 것인지
자연이 내 마음속에 깃들여 있는지.....
늘 먹먹한 눈(眼) 길 속에
옛사람이 걸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