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노(pali. mano, 意)의 기능>
1. 초기불교에서의 마노(mano, 意)
우리 몸에는 안(眼-눈)ㆍ이(耳-귀)ㆍ비(鼻-코)ㆍ설(舌-혀)ㆍ신(身-몸)ㆍ
의(意, mano)라는 6근(기관)이 있다. 이 6근이 6근의 대상이 되는
6경(六境-色ㆍ聲ㆍ香ㆍ味ㆍ觸ㆍ法)을 만나면 6식(六識)이 일어난다.
즉, 안식(眼識-제1식)ㆍ이식(耳識-제2식)ㆍ비식(鼻識-제3식)ㆍ설식(舌識-제4식)ㆍ
신식(身識-제5식)ㆍ의식(意識-제6식)이라는 육식이 일어난다.
따라서 6식의 근거가 되는 것이 6근이다. 즉, 식(識)의 근거가 근(根)이다.
안식의 근거가 안(眼-눈), 이식의 근거가 이(耳-귀)…
이와 같이 해서, 제6식인 의식(意識)의 근거는 의(意-mano)이다.
바로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마노(pali. mano, 意)는
제6식인 의식의 근거인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육식까지만 논의했었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는 의(意, mano)를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과
마찬가지로 같은 감각기관으로 봤다.
즉, ‘의(意)’ 그 자체는 마음이 아니라 생각하는 감각기관, 물질로 본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법(法)’이라는 대상을 보는데,
이 법이 바로 의(意, mano)의 감각대상이다.
그렇다면 ‘의(意-mano)’의 신체 부위에서는 어디냐 하는 것이다.
마노(mano, 意)가 의지할 토대(근거)가 있어야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마노의 의지처(토대)를 심장으로 봤다.
<청정도론>에서도 마음(意)의 토대는 심장이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마음 아프다고 할 것을 가슴 아프다고 하는 것도
마음의 토대를 심장(가슴)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밝혀진 뇌 과학에 의하면, 의(意, mano)가
의지하는 물질은 심장이 아니고 뇌라고 한다.
보통 의근(意根)을 마음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의 실상은 뇌 기능, 뇌의 작용이라는 말이다.
결국 mano는 두뇌작용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즉, 마노란 의근으로서 의식(意識)의 근거인데,
신체부위로서는 초기불교에선 심장이라 했고,
오늘날엔 두뇌라고 본다는 말이다.
‘마노(意)’란 마음작용, 정신의 본체를 의미한다.
그런데 마노(pali. mano)는 그 외에도 사량(思量), 사고(思考),
지성(知性), 고려(考慮) 따위의 의미도 갖기 때문에
‘의(意)’를 우리말 어느 한 단어로 특정해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냥 원어 그대로 마노(mano)라고 하는 게 옳다.
그런데 마노(mano, 意)는 참으로 중요한 기능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도의 다른 종교나 사상과 다른
또 하나의 측면은 바로 이 마노(mano)의 천명에 있다고도 하겠다.
이 마노가 딴 곳으로 흐르지 않고,
마노가 인드리야(indriya, 감각기능, 根)로서의 기능을 해서
마노가 향상근(向上根)이 돼야 마음챙김의 힘으로써
올바른 수행을 통해 저 해탈 열반의 경계를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법(광의의 法)을 마노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게 불교의 특징이다.
마노의 기능을 개발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며,
이 마노의 기능을 마음챙김(사띠)과 평온으로 개발하는 것이 수행이다.
그래서 마노가 향상근이 돼야만 해탈 열반의 경계를 향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초기불교에서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에 의지해 인식작용을 일으키는데,
그 의근이 mano로서, 제6 의식의 근(기관)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노(mano)를 과거 중국에서는 의(意)로 번역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의(意)와는 그 의미가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광범위했었다. 우리가 지금 쓰는 의(意)는 마음이라는
의미보다는 의지나 의도라는 뜻을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초기불교에서 빠알리어 마노(mano)는 감각기관의 일종이었다.
그리고 이 마노(意)는 몸 각 부위와 더불어 대상과 만난다.
즉, 마노는 눈, 귀, 코, 혀, 몸의 각 대상이 되는
색, 소리, 냄새, 맛, 감촉을 직접 대면하고
눈, 귀, 코, 혀, 몸들을 지원해서 감각한다.
예를 들면, 내가 꽃을 본다고 하면
꽃을 보려고 하는 눈을 지원해서 꽃에 주목하게 하는 것,
그것을 마노라고 한다. 아무리 눈이 있어도
눈이 그 무엇엔가 주목을 해야 눈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그 눈으로 하여금 그 무엇에 주목하게 도와주는 것이 마노이다.
만약 음악을 들으려고 하면 귀를 지원해서
그 어떤 음악에 주목하게 하는 것, 그것을 마노의 역할이다.
그런데 내가 꽃을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애국가가 울려 나와서
그 소리 나는 쪽으로 향해버리면,
이때는 마노가 꽃을 보려고 하는 것을 버리고
귀를 지원해서 애국가라는 소리에 주목하게 한 것이 된다.
이때는 마노가 눈을 지원해서 꽃을 보게 하지 않고
귀를 지원해서 소리에 주목하게 한다는 말이다.
즉, 마노란 몸의 각 부위가 대상을 만날 때,
몸의 각 부위를 도우면서 몸의 각 부위와 더불어 대상과 직접 만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노는 인식과정에서 대상과 전오식(前五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五門轉向의 마음)을 하고, 다시 전오식과 의식(意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받아들이는 마음)을 한다.
※오문전향(五門轉向)---다섯 가지 감관(감각의 문, 즉 눈. 귀. 코. 혀. 몸)으로
주의 기울임을 말한다. 감각의 대상이 다섯 가지 감각의 문(五門)들 중
하나의 감각기능(根)에 부딪칠 때, 예를 들면 형상이 눈에 부딪칠 때
그 대상을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그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5문 전향의 마음이다. 이것은 어떤 대상이든 다섯 감각의 문
가운데 하나에서 나타나면 그것으로 향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음은 여러 심리현상들(心所法, cetasikā)의 도움을 받고,
mano를 통해서 대상을 안다. 즉, 마음이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으로 총 52가지 마음작용(마음부수-심소법)들이 있다.
※마음부수(心所法, 빠알리어 cetasikā-마음작용)---마음의 무더기를
다시 ‘마음(心王)과 마음작용(心所)’으로 나누는데,
식온(識薀)은 ‘마음의 무더기(心王)’이고, 마음이 대상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은
마음작용의 무더기(마음부수, 心所)로서, 이에 52가지가 있다.
마음부수(心所) 52가지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멸하며,
동일한 대상을 가지고, 동일한 토대를 가진다.
예컨대 저기 진열대 위에 놓인 시계를 발견하고
그것이 시계라는 것을 아는 것은 심왕의 역할이다.
그런데 그 시계를 보고 멋지다, 가지고 싶다, 얼마나 할까 등의
마음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마음부수이다.
축생과 사람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인간은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라는 육근으로 구성돼있다.
그 육근의 마지막이 마노(mano, 意)이다.
그리하여 12연기의 육입(六入-육처, 육근)에서 의(意)가 중심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점이다.
이것이 붓다의 인간론이다.
이처럼 붓다는 ‘의(意)’를 육입(육처)에 설치함으로써
해탈 열반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육입(육처)에 등장하는 ‘의(意)’,
이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소인(素因)이다.
그만큼 의(意)가 인간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의(意)’는 뜻이고, 동물과 구별되는 ‘뜻(意)’을 가진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
즉 향상하는 존재라는 것, 이것이 초기불교의 인간관이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이 마노(意) 때문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오취온(五取蘊)을 가지고 있다.
동물도 식(識)이 있어서 주인을 알아본다.
이처럼 다른 사람과 주인의 차이를
구별해서 아는 범주의 지혜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12연기의 육입(육처, 육근)에서 빚어진다.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인 오근의 능력은
동물이 인간보다 더 발달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후각은 인간보다 동물(개)이 더 발달해있다.
하지만 ‘의(意, mano)’에서 차이가 난다.
마노의 대상인 법(法), 즉 의근의 법을 아는 능력은
사람과 동물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뛰어나다.
사람은 ‘의(意, mano)’가 중심인 존재로 의(意)와 법(法),
이 둘의 관계가 대단히 발달된 존재다.
물론 동물도 의(意)가 있다. 주인에 충성하는 것은 의(意)의 작용이다.
하지만 그 둘의 관계가 덜 발달된 상태여서
본능적으로 사물을 대처할 뿐, 법(法)을 제대로 알 능력이 없다.
축생도 안, 이, 비, 설, 신은 분명하지만
의(意, mano)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래서 가치나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은 법의 영역이다.
이런 판단은 의(意, mano)가 발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은 전오근(前五根-안이비설신)을
발달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6근인 의(意)를 발달시키기 위해서다.
‘의(意, mano)’라는 말은 원래 ‘두루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의(意)로 법(法)을 아는 것이다.
법(法)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알기 때문에 향상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법(法)은 광의의 의미로서,
가르침 외에 사물, 사회현상 등 인간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
전부를 일컫는 말이다.
인간의 생각은 쉼 없이 흐름으로 이어진다.
앞생각 뒷생각이 끊임없이 흐름으로 이어지는데,
앞생각과 뒷생각이 인(因)과 연(緣)이 돼
간단없이 이어지는 것을 등무간연(等無間緣)이라 한다.
이와 같이 등무간연으로 앞생각이 없어지면서
뒷생각을 발생시키므로 앞생각이 뒷생각의 뿌리가 된다.
즉, 앞생각을 의근으로 해서 뒷생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6식의 의지처는 몸의 일부분이 아니라
마노(mano, 意-뜻)라서 심근(心根)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의식 활동에는 전5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상(思想)이라든지, 과거ㆍ현재ㆍ미래에 걸쳐
일어나는 여러 사고(思考), 기억(記憶), 추리(推理), 예상(豫想),
상상(想像) 따위의 복잡하고 다양한 의식이 있다.
이것들이 제6식의 영역이다.
인간이 인지하고 사고하는 작용의 대부분이 제6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 제6식인 의식의 근거가 의(意-mano)라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사고로 인해 의식불명의 상태가 되거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미암아 정신작용이 일시 정지하거나
정신착란이 일어나서 앞 찰나의 생각이라는 의근이 끊어진다면
그 때 의근을 어디에서 구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문제점을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 이르러 해결이 된다.
2. 대승불교 유식학에서의 마노(mano, 意, skt. manas)
그런데 대승불교 유식학에 와서는 ‘마노(pali. mano, 意)’의 개념이 달라진다.
초기불교에서는 제6식 의식의 근거였던 ‘마노(pali. mano)’가
대승불교 유식학에서는 제7식 말나식(末那識, skt. manas-vijnana)을 의미하게 된다.
즉, 초기불교에서는 제6식의 근거가 의(意, pali. mano)였는데,
대승불교 유식학에서는 제6식의 근거가 제7식 말나식(skt. manas-vijñāna)이라고 하게 된다.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심(心)ㆍ의(意)ㆍ식(識) 개념을 발전시켜 심(心)은
제8 아뢰야식, 의(意)는 제7 말나식, 식(識)은 육식 등을 말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와 유식학에 있어서 ‘의(意, mano)’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다.
발음도 초기불교에서는 '마노(pali. mano)'였는데,
유식학에서는 ‘마나스(skt. manas)'라 하게 된다.
대승불교 유식학에서는 소승불교의 6식설을 넘어
식을 8가지로 세분했는데, 그 가운데에 단절됨이 없는
제6식의 의근으로서
제7식 말나식(manas-vijñāna, 末那識)이 설정된다.
그리하여 식(識)의 측면에서 의(意)는 헤아려 집착함을 뜻하는
제7 말나식(末那識)을 의미함으로써
제6 의식과의 개념 혼돈을 피하게 된다.
예컨대, 사람이 혼절했다는 것은
제6식 의식의 기능이 정지됐다는 말인데,
이때도 제7식 말나식은 잠재의식 상태에서
기능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단절됨이 없는
제6식의 의근이 제7식 말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pali. mano(skt. manas)는
‘헤아림’, ‘고찰’ 따위의 1차적 의미에 ‘집착’의 의미가 더해진 것이다.
이 제7식 말나식은 ‘나’라고 하는 강렬한 자아의식에 집착하므로
제7 말나식에 항상 상응해서 더럽고 끈질긴 번뇌인 아치(我痴)ㆍ
아견(我見)ㆍ아만(我慢)ㆍ아애(我愛)라는 4번뇌가 일어나고,
이에 상응하므로 제7 말나식은 염오식(染汚識), 사량식(思量識),
망식(妄識) 따위의 별명을 갖게 된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 따르면,
제7식을 말나[末那]라 한 것은 항상 살피고 사량하는 것이
다른 식들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설명은 제6식과 제7식 둘 다 원어가
‘skt. manas’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을 반증한다.
제6식인 의식(意識)과 제7식인 말나식의 차이를 확실히 함과 동시에
둘 사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현장(玄奘)은 제7식을 음사해서 말나식(末那識)으로,
제6식은 의역해서 의식(意識)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 등의 육식(六識)이며,
육근(六根, 6개의 감관)을 매개로 하는 인식작용이라 했다.
그리하여 유식설에서는 심(心)․ 의(意)․ 식(識)을 기능에 의해 구별해,
심(心)을 가장 근원적인 주체로서 파악하고,
제8식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nāna)이라 명명했다.
또 의(意)를 제7식 말나식(末那識, manas-vijñāna)이라 부르고,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이다.
그래서 말나식은 사량, 즉 헤아려 인식하는 마음의 작용이고,
철저한 이기심과 아집(我執)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으로 간주했다.
아집(我執)의 작용이 고정화됐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뜻하며,
이러한 이기심이 마음속에 있음으로써
온갖 나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작용을 한다.
그것은 제7 말나식(末那識)이 제6 의식(意識)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말나식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영향을 받아
자기 이익을 위한 모든 행동을 나타내게 된다.
이와 같이 6식과 제7식의 활동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말나식에 의해 작용되는 아견의 현상은
보통 행동에 잘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지대한 역할을 한다.
아치(我癡), 아견(我見), 아애(我愛), 아만(我慢), 아집(我執),
아상(我相)이 말나식의 특징이다.
그리고 말나식은 쉽게 말하면, 자기중심적인 생각, 자아의식이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 pali. mano(意)는
대승불교 유식하게 와서는 skt. manas(我執)이라 하면서
그 의미가 달리진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