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시간 속을 걷는다] 대구대교구 100년, 역사를 이루는 사람과 쓰는 사람들
2013년 대구대교구는 교구 100년사 4권을 완간했다. 교구 100년사는 통사, 연대표, 화보집, 본당사 등 네 가지 형태로 나뉘어 편찬되었다. 이번 작품은 편찬위원들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으며 교구사의 뼈대를 잡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이문희 대주교의 주도로 시작되어 최영수 대주교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영남교회사연구소는 계속적으로 기초자료집을 발간했다. 긴 시간이다 보니 위원회의 구성원도 변화가 있었다. 통사 말미에 김태형 신부가 그 경위를 자세히 기록했다.
이번에 간행된 교구 100년사는 1986년에 나온 『대구본당 백년사』가 기초가 되었다. 이 책은 최홍길 신부가 중심이 되어 6년 간의 준비 끝에 완성되었다. 편찬위원회는 그 정관과 조직표를 마련해서 매달 교구청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활동했다. 편찬위원장은 이문희 대주교였고 편찬책임자는 최홍길 신부였다. 각 수도원, 교구 원로 사제들을 자문위원으로 두고 9개 위원회로 나뉘어 총 120명의 편찬위원들이 참여했다. 역시 이때도 교구 80주년을 기념하는 『교구화보사』, 『교구연표』(1984)를 함께 출간했다.
100년의 역사와 그 이야기꾼들
대구대교구도 100년의 역사를 이어오던 과정에서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대구본당 백년사』를 간행했던 최홍길 신부는 그 발간사에서 최정복, 김구정 두 선생의 숨결과 자취를 특별히 언급했다. 또한 같은 책에서 서정길 대주교는 자신이 1952년 주교좌 대성당 주임신부였던 당시, 회장이었던 최정복이 성당 낙성 50주년을 기해 『대구천주교회사』를 발간했던 일을 회고했다. 교구사 정리작업은 이러한 앞선 단계의 돌들 위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성직자들의 교세보고를 제외한다면 대구교구에서 역사기록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36년이었다. 이 해는 교구 창립 25주년이며 드망즈 주교 서품 은경축이었다. 이때 교구에서는 교구 25주년을 기념하여 『교구연혁』을 편찬했다.
계산성당 청년들은 계속 활동하고 「천주교회보」를 통하여 과거의 역사와 당대의 사실을 정리해 갔다. 그러다가 1952년 앞서 말한 최정복의 『대구천주교회사』가 출간되었다. 계산성당 청년회를 이끌었던 최정복은 일반적으로 체육인, 정치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대구본당 25주년 기념대회를 치룬 이후 교구사를 계속 준비해 왔고 1927년 「천주교회보」가 창간되자 회보에 실을 요량으로 6년여에 걸쳐 교구사를 정리했다. 그런데 1933년 한국교회는 전체 힘을 모은다는 입장에서 서울의 『별』과 대구의 「천주교회보」를 폐간시키고 『가톨릭청년』을 발행해 그는 발표기회를 잃었다. 그후 1947년 「천주교회보」가 속간되자, 그는 이를 연재하려고 했으나 자료들이 유실되어 다시 4년을 소요했다. 그러다가 결국 성당 낙성 50주년 사업으로 그 책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후 교구 역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을 김구정(1898-1984)이 수행했다. 그는 1966년 『영남순교사』를 엮었다. 영남순교 150주년과 병인순교 100주년의 기념이었다. 이듬해 『천주교경남발전사』를 내었다. 본래 영남교회사를 두 권으로 계획하여 순교사를 먼저내고, 이어 발전사를 쓰려고 했던 것이 경남으로 머물게 되었다. 이어서 김구정과 함께 일했던 윤광선이 자신의 회고를 바탕으로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었다. 또한 마백락은 전교회장 활동으로 방문했던 지방 교회의 이야기를 서술해 나왔다. 이들 자료는 계산본당 100년사로 정리되었다.
이야기꾼들의 역사 속 뿌리들
교회사를 기록한 이들의 친구나 친인척들은 대구교회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역사 속에 흐르는 힘을 파악한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 중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정복은 식민지시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던 체육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 청년활동과 체육을 연계시켜 해성체육단을 구성하여 활동했다. 그는 교회회장뿐 아니라 가톨릭신문의 사장을 맡는 등 큰 활동을 했지만 장년이 되어서는 지방정치 분야에서 활동하여 6.25때 대구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의 동생 최재복은 해성악대, 천주교회보 등에서 함께 활동했다. 최정복의 여동생 자녀가 정은규 몬시뇰이고, 정 몬시뇰의 삼촌이 정행만 신부이다. 한편 최정복의 다른 여동생의 시가쪽으로는 최봉도 신부, 최휘인 신부, 최서인 수녀가 있다.
김구정은 l933년 신암공소를 연 김상연·조시아 부부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집안은 1945년 신암본당으로 승격되기까지 53년간 3대에 걸쳐 공소를 돌보았다. 그는 대구 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대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학교에서 퇴출되었다. 1922년 사제수품자 서정도 신부가 그의 동기이다. 김구정은 1923년 조선일보 대구지국장을 역임했고, 평양교구에서 『가톨릭조선』을 창간한 후 그 편집을 도맡아 일했다. 또한 1925년 간도 용정 해성학교 부교장을 시작으로 여러 곳에서 교육활동을 했고 해방이후에는 군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1960년경부터는 주재용 신부와의 특별한 인연으로 교회사를 집필했다. 그의 큰형 김하정은 20여년 간 교회학교에 봉직하면서 민족계몽운동을 했다. 그는 1948년 대구교구 가톨릭청년회 연합회의 초대회장이 되었는데 그의 딸 김영옥은 샬트르 성바오로회 수녀였다.
윤광선은 1915년 경남 문산에서 윤창두와 장학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대구 유스티노신학교의 교사로 임명되면서 온 가족이 대구로 이사왔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계산성당 청년회의 활성화에 노력했다. 1949년 「천주교회보」가 복간되면서 편집국장으로 일했다. 그는 1957년 계산성당 최재선 주임신부가 레지오마리애를 도입하면서 ‘다윗의 적루’ 쁘레시디움의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그로부터 20년 동안 교구 레지오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 이후 교회사 편찬 관계의 일에 참여해 왔다. 윤광선 집안의 교회 내 활약도 눈부시다. 그의 모친 장학순 쪽에는 장병화 주교, 장순도 신부, 강찬형 신부 등의 성직자가 있다. 그리고 그의 누이 윤성기는 수녀(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동생 윤광제는 신부, 외손자 박정용도 사제이다. 또한 부인 이차봉의 외가 쪽으로는 전석재 신부, 전달출 신부가 있고 이차봉의 언니 이 마태오와 동생 이 알퐁소는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 수녀이다. 물론 이들 최정복, 김구정, 윤광선과 같은 평신도들의 인척, 후손들 중에는 성직자, 수도자 외에도 교회와 사회에서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청년단체와 가톨릭회보로 연결
대구교회의 역사를 기록해 온 이들은 「천주교회보」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본래 대구지방의 가톨릭 청년운동은 1909년 「성립학우회」를 기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듬해 교회에서 명도회를 설립한 데다가 1911년 대구대목구가 설정되자 이들은 ‘조선남방 천주공교 명도회’(1912년)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그때 드망즈 주교는 젊은 명도회원을 중심으로 취주악 밴드를 창설했고, 명도회관 옆에 정구장을 마련했는데 바로 이 음악과 체육이 청년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성립학우회는 1915년 ‘해성체육단’으로 다시 발족했다. 이름은 체육단이지만 이들은 교리강습회와 토론회 등을 열고 야학 등 사회계몽봉사활동을 했다. 그 성격으로 인해 1920년 ‘해성청년회’로 다시 발족했으나 드망즈 주교에 의해 다시 명도회에 합병되었다. 이 동안 최정복은 간사로 시작하여 회장직을 맡았고 김구정의 형인 김하정도 함께 했다.
1924년 명도회가 해체되고 청년들 중심인 “남방 천주공교 청년회”, 통칭 「남방천주교 청년회」가 창립되었다. 회장은 최정복이었고 윤광선의 부친 윤창두가 전교회장이었다. 이들은 1927년 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를 월간으로 창간했고 이때 이효상, 김구정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해성청년회, 해성체육단 등을 거친 핵심멤버들이었고, 그 서열도 비슷했다. 조국 광복 이후 1946년 「대구가톨릭청년회」가 탄생했고 이들 멤버는 1949년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를 복간했다. 그러니까 가톨릭신문 초창기에는 청년회장 최정복이 편집대표이고 윤광선의 아버지 윤창두, 최정복의 동생 최재복, 이문희 대주교의 부친 이효상, 그리고 김구정 등이 편집위원을 이어서 맡았다. 신문의 복간 직후 윤광선도 합류했다. 김구정은 광복 이후에는 개인 저서들을 내고 있었다. 그들 청년들은 대를 이어가며 영원한 청년회의 활동을 하였다. 그들은 사회 곳곳의 필요에 응답한 무서운 청년들이었다.
돌이켜 보면 역사기록의 정리는 교회의 중요한 기념사업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활동은 다시 새로운 연구물을 함께 냈다. 예를 들면 교구 100년사를 준비하는 동안에만도 『옛 공소의 어제와 오늘』, 『대구의 순교자 1, 2』(자료집), 『대구순교자연구』, 『대구 서씨의 순교자와 세보』, 『가톨릭문화예술』, 『국채보상운동과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회장』, 『대구대교구 100년사』가 나왔고, 『대구본당 100년사』에 이어서는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등이 나왔다. 역사서술은 사회, 조직, 단체의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구조, 관계의 연결 등을 바로 보고 제자리를 찾는 작업이다. 지금까지 선학들의 작업은 고증을 거칠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따라서 당대 사료적 가치는 있으나 다시 검토하고 확증해야 한다. 1983년 김구정은 글을 쓰면서 ‘~라는 사실이 밝혀져 지금 신중한 조사에 있으니 추후에 더 자세히 발표하기로 하겠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 검토되지 않고 진실한 서술로 간주되는 점을 경계하는 말이었다.
이제 교구사의 큰 틀은 갖추어졌다. 앞으로는 전·후 사건의 관계, 대구대교구의 역사가 한국사회나 세계교회 속에서 수행한 영향과 역할을 해석해 낼 때이다. 누구나 “주님께서 전능하신 팔을 펼치시어 이룩하신 일을 목격하고 또 기억하는 영광을 입었다.”(교구장의 발간사에서)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도움 : 정은규 몬시뇰, 이찬우 신부,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대구관구, 김규동, 마백락, 최휘철, 장정란, 강정우 등)
[월간빛, 2013년 6월호,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