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전인 1960년 4월 19일의 어제, 이른바 4.19 의거의 막이 올랐고, 이후 시위대에 대한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의 국민을 향한 무차별 발포와 함께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미국의 위성국 대한민국 공화국을 위해, 그리고 자유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소위 건국 세력은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만, 이승만 전 대통령은 결국 계엄령하 당시 군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에 무기력하게 항복하여 1960년 4월 26일 하야를 결국 발표함으로서 제1공화국은 그대로 몰락하였습니다. 즉, 처음부터 야심차게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로 대한민국 공화국을 1948년 8월 15일에 건국한 세력이 불과 12년만에 망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망했을까?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세계적인 매우 유명한 사회 계약론자이며 대표적인 공화주의자(Republican)입니다. 장자크 루소의 저서 중 1762년에 출판된 사회계약론(The Social Contract)는 현재 이른바 대한민국 공화국을 모순과 모자름으로 지탱하는 미련한 공화주의자들의 교과서와 같은 성전 책으로 현재 전 세계 공화주의의 기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저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즉, 간단히 주요 내용은 국가(nation)와 정부(government)를 서로 일치가 아닌 분리를 함으로서 4.19 의거처럼 설사 국민의 큰 저항과 반대로 공화국의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가 만약 전복되더라도 마치 도마뱀 꼬리자르듯 국가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대한민국 공화국같은 공화국 체제를 만든 근본 이론으로서 결국, 4.19 의거 당시 186명이나 되는 무고한 국민의 사망, 그리고 6026명의 많은 국민의 부상으로 제1공화국이 제2공화국까지 바뀌었지만, 이승만 정부와 변한 것은 없었고 정확히 20년 후에 다시 전라도 광주를 중심으로 발생한 1980년 5월 18일에 있었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역시, 많은 국민의 희생에도 1987년에 가서야 겨우 대통령이 바뀌고 정부가 제6공화국으로 바뀌는 것 같은 사례가 되었습니다. 역시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의해, 여전히 모순의 극치인 대한민국 공화국은 전혀 국가 권력에는 영향이 없는 상태로 다시 24년 뒤인, 2004년 3월 12일 이번에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여부 가능성을 한번 연습으로 타진해 본 후, 다시 2016년 12월 9일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비극을 더불어민주당이 완성하는 상황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2017년 5월 10일 현 문재인 대통령이 대한민국 공화국 제19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대한민국 공화국의 극심한 좌우 대립은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공화국 건국 시기나 1960년의 4.19 의거 상황, 그리고 2020년 4월 15일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서도 역시 확연하게 똑같이 확인하게 되는 상황으로, 현재 대한민국 공화국의 국민은 정확히 좌와 우의 50 대 50이라는 극한 분열의 시대를 계속 끝까지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과 함께 2020년 3월 3일 40000일의 4세대(the fifth-generation)에 걸친 장구한 세월속에 그대로 반역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4.19 의거와 같은 경우를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수족관의 물의 양과 붕어 숫자는 그대로 있으면서 수족관내 상부층 물만 바람따라 물결치는 모습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 수족관의 붕어는 비유적으로 큰 강으로 가지 못하고 수족관에만 갖혀 있는 것일까?
즉, 지금으로부터 258년전에 장자크 루소가 만든 공화주의 이론이 그대로 대한민국 공화국의 체제에 그대로 투영되어 현재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고, 이것은 설사 문제의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나 나치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이 되는 것처럼, 대한민국 공화국내 어떤 급변 사태나 제2의 4.19 의거와 같은 국민 운동이 벌어졌다고 해도 국가는 그대로 권력이 유지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혁명은 대한민국 공화국내에서 이루어질 수도, 또 성립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한때, 마산의 김주열 열사 희생으로 촉발된 4.19 혁명은 결국, 대한민국 공화국의 끝을 알 수 없는 모순과 부정을 국민의 단합된 힘으로 짓부수는 쾌거를 일시 거두었지만, 대한민국 공화국의 모든 정치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에 의해 모든 국가 운영이 마무리되는 상황은 항상 맞이했었습니다. 1960년에 있었던 4.19 의거의 경우도 이후에 제2공화국 출범을 위해 1960년 7월 29일로 예정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미국은 민감하게 극도의 관심을 기울여, 가장 친미성향이 매우 강한 장면을 선택, 1960년 7월 11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avid "Ike" Eisenhower)가 서울특별시에 주재한 월터 매카너기(Walter Patrick McConaughy, Jr.) 주한 미국대사에게 장문의 훈령을 보냈고, 여기서 미국 정부는 장면을 대한민국 공화국의 지도자로 선발하는 것이 가장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선택임을 주지시켜, 곧바로 월터 매카너기 주한 미국대사가 당시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말함으로서, 장면에게 지도자 자리를 수락하도록 은밀히 요청하라고 주문하였고, 그렇게 1960년 8월 18일, 4.19 의거 4개월 뒤, 민주당의 친미성향 인물인 장면이 이승만 전 대통령을 대신하여 대한민국 공화국의 국무총리로 당선되는 것으로서 제2공화국이 대한민국 공화국내에서 의거한지 4개월만에 겨우 출범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실제, 1960년 4월 19일부터 1960년 8월 18일까지 있었던 4개월에 걸친 4.19 의거의 전말이며, 현재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가 외치며 기념하고 있는 소위, '4.19 혁명'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아무리, 대한민국 공화국의 국민이 많은 피와 땀을 흘려가며 대통령 한 명 바꿔도 결국 미국에 의해 입맛에 맞는 사람을 지도자로 앉히는 상황은, 그리고 그렇게 한 장면 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듬해 1961년 5월 16일에 있었던 5.16 군사 정변으로 다시 맞바꾸는 더러운 짓까지 2차로 자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번 더 묻고 싶습니다. 과연,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는 4.19가 혁명입니까, 아니면 의거입니까?
국민의 거대한 저항과 반란에 의한 공화국내에서의 변화는 사실상 미국의 의지에 따라, 대통령의 교체밖에 이루지 못하는 분명한 한계 또한 스스로 내포하며, 일각에서 이른바 4.19 의거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일컫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제와 같은 4.19 혁명 기념일 행사를 하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 일일까?
사실, 4.19를 혁명이라고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가 부르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진실되게 정말, 역사적인 맥락과 민족과 국가 정통성 회복이라는 의미보다는 소위, 지금의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좌파측 민주당 계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조금이라도 상승시키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례로, 문재인 대통령 취임 이후, 3.1 운동을 3.1 혁명으로 부르자는 주장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공화국의 일부로 간주, 소위 기념관을 자신의 임기내에 완공하려고 쩨쩨한 수단을 동원하는 경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바로, 혁명이라는 명칭은 국가의 전환 즉, 일본제국 통치시대(日本帝國統治時代)처럼 새로우면서 완전히 전혀 다른 국가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해서 공화국에서 공화국으로 국민적 요구로 중도에 지도자만 바뀌는 것만으로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침소봉대라고 보여집니다. 물론, 한때 1960년 6월 11일에 개정된 제3차 헌법개정과 이후 1960년 11월 29일 다시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 개정을 통해 의원내각제하의 정부를 구성하였으나, 그것도 이듬해 바로 1961년의 5.16 군사 정변으로 결국 무의미한 사건으로 종결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한민국 공화국의 1948년 8월 15일 건국부터 1950년 6월 25일에 있었던 6.25 전쟁, 그리고 1960년 4월 19일의 4.19 의거와 1961년 5월 16일의 5.16 군사정변까지 일련의 과정을 보면 얼마나 대한민국 공화국이라는 국가가 중구난방, 무개념으로 국가 통치를 하였는가를 여실하게 보여준 과정이었으며, 그것의 핵심과 중심에는 언제나 미국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은식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의 대한정신(大韓精神)이 전혀 부재된 상태로 미국의 강압에 의한 문화 통치(文化統治)는, 3.1 운동 이후 일본제국이 취한 조선지역 통치방식과 필연적으로 부합하는 방식입니다.
따라서, 1948년 8월 15일 이후, 2020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공화국내에서 벌어졌던 소위, 혁명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은 사실, 과대한 역사 해석과 왜곡이 낳은 부적합한 명칭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3.1 운동도 역시 반드시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사항이라고 하겠으며, 여기에 촛불 혁명은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참고로, 어제 있었던 4.19를 기념일로 처음 제정한 것은 1973년 3월 3일 '4.19 의거'로 명칭을 정의하여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는 '4.19 의거 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그러했던 것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1993년에 취임하면서 당시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1993년 4.19 33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 4.19 묘지를 참배하였고 이듬 해 1994년 12월 31일에 대통령령 제14507호로 다시 4.19 의거를 '4.19 혁명 기념일'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동시에 '4.19 묘지'에 대한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1995년 '4.19 35주년'에 맞춰서 지금의 국립묘지로 승격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마지막 해인 1997년 4월 19일에는 '4.19 혁명기념관'을 개관시켜 대한민국 공화국 정부의 민주 이념 성지로 자리잡게 하였는데, 특별히 4.19 의거에 대해서는 지난 1961년부터 1973년까지 박정희 정부에서 서울특별시 주관 기념식으로만 거행되었던 것을 1973년에 비로소 공식적인 4.19 의겨 기념일로 제정하였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1974년부터 국가보훈처가 주관이 되어 국무총리가 참석하는 행사로 치러지면서 지금까지 국무총리가 주빈으로 참석해 온 것이 현 정부까지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본 재건회는 4.19 의거를 절대,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또, 4.19 의거의 숭고한 뜻과 의지, 그리고 많은 국민의 희생속에 탄생하고 역사가 된 제2공화국 역시 대한민국 공화국의 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수족관 속 작은 물결로만 출렁이다가 끝나는 노력, 그리고 근본적인 국가의 개혁과 혁명이 아니라면, 그렇게 희생되어 버린 국민의 아픔은 너무 아깝다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숭고하고 존중받아야 할 의거가 정부의 입맛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지고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면 그것만큼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공화국의 1948년 8월 15일 건국, 그리고 이후의 과정 속에 많은 국민의 엄청난 희생속에 지금의 공화국은 유지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잘못 끼워진 건국 과정과 미국의 위성국으로서 절반이 나뉜 채 유지되어야 하겠습니까? 지금은, 의거에서 혁명으로 다시 국가를 변혁하고 새로운 국가로 발돋음 해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4.19가 의거가 아닌 진짜 혁명으로 존중받는 대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그리고 다시 국민 모두와 함께, 민국에서 제국으로 다시 욱일승천하는 대한제국으로 모두 함께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