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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채우시는 예수님
설교본문 : 요한복음 2:1~12, 시편 23편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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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여기에서 ‘영접’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내 마음의 가장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나의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믿는 것’‘내 목숨을 걸 만큼 강하게 확신하고 신뢰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며,
‘권세를 주셨으니’는
신분의 승격과 함께 주어지는 권세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2의 이 말씀만 보면 주님을 왕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내 목숨을 걸며 복종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능한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정도로 강한 믿음이 있는 자만 구원받는다면
나같이 평범한 믿음의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조금 주눅이 듭니다.
1)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라)(요 1:4)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빛이라).
그러나 이런 믿음도 내 힘과 내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빛 안에 머물러 있으면 주께서 내 안에 이런 믿음을 주셔서
구원에 관한 모든 일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
2) 우리 인생 : 내 마음을 두고 벌이는 성령과 사탄과의 한판 승부
주께서 내 안에 믿음을 넣어주시는 일까지 모든 일을 도와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일을 간절히 원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빛과 생명 안에 머물러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
이 간절한 열망이 주님과 나 사이의 통로를 열고 이어지게 합니다.
주께서 나를 도와주실 수 있게 내 안에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을 품으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이 간절한 열망을 두고
성령과 사탄이 한판 승부를 버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원해야 주께서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제 1 부 :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세례요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그리스도)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소개하였습니다.
1)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셰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으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이사야 53장 참조).
그때가 마침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으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에 비유하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사람 대신에 죽는 것에 비유하여
예수께서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실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2) 세상 죄를 없애기 위해 오신 분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은
세상 죄를 제거하고 없애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세상의 모든 죄가 제거됩니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없애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일지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믿는 자들은
주님처럼 죄 없는 자로 여김 받아 영생을 얻게 됩니다.
3)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1:33)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으므로
34. 내가 이를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이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다윗과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성령께서 임하셨는데,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누구든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청소해 주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채우십니다.
제 2 부 : 가나의 혼인잔치
세례요한을 통해서 예수께서 이 땅에서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증거한 요한복음은
바로 이어서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소개합니다.
1. 떨어진 포도주
1)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잔치(요 2:1~3)
1. 사흘째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어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더니
3.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져 모자란지라.
예수님 어머니가 예수께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아직 본격적인 공생애의 삶을 시작하시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초청받아 그 잔치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예수께서 그 잔치에 참여했을 때 그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2) 당시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는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보통 결혼식을 6~8일 정도 하였는데,
그 잔치의 기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포도주였습니다.
포도주는 유대인들에게 기쁨을 의미하므로
만일 그 잔치 기간 중에 포도주가 떨어지면
새로 시작하는 가정에 어두운 암운이 드리워진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포도주만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데,
이 집에서는 그만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3)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잔치의 비유 :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
물론 혼인 잔치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포도주가 떨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주께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그 자체로 당시 유대 사회에 주시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의미하므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기쁨이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기쁨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2. 비어 있는 항아리
1) 항아리에 물을 채워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요 2:3~8)
3.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져 모자란지라.
예수님 어머니가 예수께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사용되는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주었더니
그때 마리아가 예수께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을 해 주었고,
예수님은 처음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난색을 표시하다가
마리아가 그 집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하자
그 집에 있던 큰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붓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명하셨습니다.
2)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
그 항아리는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위해 있던 것입니다.
팔레스틴은 먼지가 많은 곳이므로 밖에서 들어올 때에는 그 물로 손발을 씻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그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손발을 씻거나 손을 씻을 때 어떻게 씻어야 한다고 예법을 정하고는,
그대로 씻어야만 그들의 죄가 씻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죄를 씻어주는 예식을 정결 예식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물로 손발을 씻는 것을 정결 예식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3) 그러나 모두 빈 항아리였습니다.
이 집은 정결 예식을 위해 사용하는 큰 항아리를 여섯 개나 준비했습니다.
이것은 이 집 사람들이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항아리는 빈 항아리입니다.
정결 예식을 위한 항아리가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만 할 뿐,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한 것입니다.
헤롯왕이 40년이 넘게 짓고 있는 아름답고 큰 성전이지만,
그 안에 있어야 할 예배가 없습니다.
아니 예배가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그들만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성전입니다.
겉모습만 그럴듯하고 속은 텅 빈 성전입니다.
● 묵상 :
오늘날 한국의 교회들이 이러하지 않습니까?
지난 몇십 년간 그저 교회 부흥을 위해서만 달려왔지
성도들의 심령에 무엇을 채울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가 도리어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화려한 겉모습에만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비어 있는 마음을 하나님의 거룩한 것으로 채울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마리아의 기도(요 2:3~5)
(2~5절 성경구절 위에)
마리아는 예수께 그 집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자여 이 일이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여자여(구나이)’라는 말은 여자에 대한 극존칭의 말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비록 극존칭이라고는 하지만 ‘여자여’라고 부른 것은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 하므로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거리를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께로부터 거절의 말을 들었음에도
그 집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하고 당부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 말을 듣고 하인들에게
그 집에 있는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 물을 갖다주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1) 이제 더 이상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예수께서 그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당부였으므로 들어주었다고 해석하고는,
예수께 기도하지 않고 마리아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예수께 당부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하시는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육신으로 계실 때 어머니이지만,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의 위치로 다시 오르셨을 때에는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여자여’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2) 믿음의 기도를 들으시는 예수님
마리아의 기도이기 때문에 들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였기 때문에 들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느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서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인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리아의 기도이기 때문에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일지라도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께서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물론, 이미 죽은 그 어떤 자에게도 기도를 부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4.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
1) 항아리에 물을 붓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갖다주어라(7~8절)
(7~8절 성경구절 위에)
예수께서 그 집에 비어 있는 항아리에 물을 붓게 하시고는
그 물을 연회장(잔치 책임자)에게 갖다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인들이 항아리에 담은 물을 연회장(잔치 책임자)에게 가져다주니 그가 그 맛을 보고는
다른 집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놓다가
손님들이 취하면 질 나쁜 포도주를 내오는 법인데,
어떻게 이 집은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느냐며 칭찬을 합니다.
더구나 그 포도주의 양이 두세 통 드는 항아리 여섯 개를 가득 채운 정도인데,
오늘날 20리터 생수통 24~36개 분량입니다.
정말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의 놀라움을 상징하는 것
이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기쁨이 세상 기쁨보다
더 크고 놀라운 것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것을 이를 악물고 참으며 억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은혜가 너무 커서
그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 묵상 : 이것이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구약은 힘들고 어려운 율법 조항만 있지만,
신약은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기쁨으로 섬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 사랑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신앙의 기쁨을 경험해 본 일이 없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자들은
주께 기쁨과 사랑을 알게 해 주실 것을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5.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13~16절)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을 바꾸어 주는 환전 상인들이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둘러엎으시고
16.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께서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은 무교절과 연결되어 일주일을 지키며 많은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쳤습니다.
본래 유월절은 애굽에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일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교회가 유월절 행사를 통해
큰 돈벌이하는 장사판이 된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을 기록하면서
여호와의 유월절을 유대인의 유월절이라고 표현합니다.
1) 돈벌이의 도구가 된 예루살렘 성전
당시 유월절 행사에는 약 250만 명의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칩니다.
이 돈만 해도 요즘 돈으로 수십억 원이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희생제물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흠이 없는 것인지를 심사하는 심사비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관리들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상인들과 결탁하여 특정한 곳에서 사 오는 짐승들만 허락하였다가
아예 그 장사치들을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뜰에 불러들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를 빙자한 거대한 이익집단이 된 것입니다.
2) 예배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방인들
이들이 장사 하는 곳은 이방인의 뜰로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곳이었는데,
이곳에 세상 돈을 성전 안에서만 통용하는 성전 세겔로 바꾸는 환전상들과
짐승을 파는 이들, 성전세를 받는 이들이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이방인들의 기도처가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유일한 곳이
장사치들의 터전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공간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장사치들을 다 내어 쫓으시며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1:13).
6. 가나의 혼인 잔치와 성전 정화와의 관계
1) 요한복음이 성전 정화 사건을 가나의 혼인 잔치 바로 다음에 기록한 이유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성전 정화의 이야기를
가나의 혼인잔치의 사건 바로 다음에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성전 정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이 깨끗해져야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채워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요한은 주께서 말씀하신 성전이란 예수님의 육신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1절)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 말씀하신 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주님의 기쁨을 채우기 위해 깨끗하게 해야 할 성전이란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주님의 성령을 모셔서 우리의 영이 깨끗해져야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 우리 안에 채워진다는 것을
가나의 혼인잔치와 성전 성화 사건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 3 부 : 시편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내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나에게 새 힘을 주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아주 캄캄한, 음산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끊임없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살아있는 모든 날 동안)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세상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이 기쁨이 잘 표현된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을 발견한 자가
주께로부터 얻게 되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합니다.
1. 나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시편 7편에서 극심한 고통과 답답함을 노래한 후에
8편에서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시편 23편 역시 그 앞의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규의 기도를 드린 후
23편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누리는 평안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
어린 시절 양을 치던 목자였으므로 양들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알고 있는 다윗은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 양처럼 연약한 자들로 보입니다.
다윗이 왕이므로 남들보다 조금 높은 권세를 가지기는 했으나,
그 역시 자연의 재해나 질병이나 죽음 앞에서는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비록 자신이 양처럼 연약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나에게는 그 어떠한 부족함도 없으리라고 노래합니다.
➠ 나의 목자시니 : 나를 보호하시고 먹이시는 목자이시니
여기에서 ‘목자’라는 말은 ‘나를 보호하시고 먹이시는 목자’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며 먹이시니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이 나를 사랑하시니 나는 아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2) 안전하고 편안하고 풍성한 휴식처 :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2절)
다윗은 자신을 한 마리의 양으로 묘사하며 하나님의 복을 노래합니다.
뜨거운 태양 볕에 있던 양을 목자가 그늘이 있는 휴식처로 인도하였습니다.
양들은 본래 조금이라도 위험한 것을 느끼면 절대로 눕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자가 인도한 그곳은 마음 놓고 누울 수 있는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마음대로 뛰든지 눕든지 하며 지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양이 그 주변을 보니 푸른 풀이 잔뜩 있고,
그 앞에는 양들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잔잔하게 흐르는 시내가 있었습니다.
목자가 인도한 그곳은 안전하고 편안할 뿐만 아니라,
먹고 마실 것도 풍성한 곳이었습니다.
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싶을 만큼 좋은 곳이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곳이 바로 이렇게
➀ 안전하고,
➁ 먹고 마실 것이 풍성하며,
➂ 휴식하며 지내기 아주 좋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3) 영과 육의 소생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그저 마음 편안하게 먹고 마시게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는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천국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하십니다.
세상의 복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더 귀한 줄 아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4) 자기 이름을 위하여 :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먹기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주님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는 곳입니다.
‘의의 길’은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길’이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길’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 것은
그곳에서 주님을 사랑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그렇게 계속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갈 때
주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의의 길의 마지막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길입니다.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와 은총입니다.
주님을 더욱 열심히 섬기는 자에게는
더 좋은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원한 푸른 초장과
생명수 샘물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영광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2.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1)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4절)
하지만 주께서 인도하시는 의의 길은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시편 22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다가
악인들로부터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죽음에 비유하였습니다.
이미 사망의 진토 속에 자신이 빠져 있는 것 같은 괴로움에 처해있다고
절규하며 호소하였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것과 같은 악한 자들로부터 오는 핍박의 고통이거나
혹은 그밖에 어떤 종류의 어려움이든지, 그곳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도 하나님은 결코 나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2)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절)
핍박과 고통이나 그 어떤 재앙보다 더 끔찍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악인을 물리쳐 주시고 나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안위하시나이다’에 해당하는 ‘예나하무니’의 기본동사 ‘나함’은
‘동정하다, 위로하다, 윈수를 갚다, 안심시키다’의 뜻으로
주께서 우리를 동정하고 위로하신다는 뜻으로,
여기에서는 미완료형 예나하무니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끊임없이 지키시고 돌보실 터이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가 양을 보호하기 위해 맹수를 물리치고 보호하는 지팡이도 되지만,
때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징계하는 막대기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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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는 하나님은
나의 연약함을 동정하여 위로하시고, 원수들을 물리쳐 주시고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누리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만,
때로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셔서
우리를 주의 의의 길, 은혜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기도 하신다는 뜻입니다.
3)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5절)
다윗은 사람이 평생에 누리는 기쁨 중에 가장 큰 기쁨을
‘원수의 목전에서 베푸는 상’으로 표현했습니다.
가장 큰 승리는 원수들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가 죽어 없어진다면 오히려 마음이 허망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허망한 승리를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는 원수들 앞에서 큰 잔칫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포로가 된 원수들 앞에서 승리의 잔칫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보다 더 통쾌한 승리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이 바로 이런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4)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5절)
여기에서 말하는 기름은 잔치 자리에 초청된 귀족들의 머리와 귀에 발라주는
향기롭고 귀한 향유를 뜻합니다.
그런데 그 향유를 바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머리에 부어주셨습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이 수염까지 흐르고,
잔에 부은 향유가 잔에 넘치도록 부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그 잔칫상에서 최고로 귀한 귀족으로 맞아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거의 왕이 받는 수준의 대접을 주께서 우리에게 해주십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3. 내가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
1)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6절)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는 것은
주께서 마치 나의 시종이나 된 것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손을 뻗치면 닿을 수 있는 곳에 계시면서
혹시 내가 마음이 아플까, 혹시 내가 외로워하지는 않을까,
혹시 내가 어디 불편한 것은 없을까 늘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2)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6절)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지키시며 도우시니,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라고 노래하며 이 기도를 마칩니다.
여호와의 집은 본래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여호와의 성전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곳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한다는 것은,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항상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하며 주께서는 더 큰 사랑과 복으로
그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내가 사는 곳이 바로 여호와의 집이 되게 하십시오.
이 모든 복은 내가 있는 곳이 여호와의 집이 되어야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주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주께서 우리를 떠나시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다윗처럼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가 되십시오.
결 론 : 주께서 나를 도와주실 수 있게 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빛 안에 머물러 있으면 주께서 우리 안에 주님의 신령한 생명을 넣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들어온 그 신령한 생명(성령)이 우리를 주님의 나라까지 인도하십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임을 잊지 마십시오.
➠ 간절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게 하십시오.
세상의 일은 물론, 심지어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들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잃어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의 프로그램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그것은 한낱 종교적인 감정놀음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내 안에 주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이 항상 있게 하십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일 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기쁨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게 해 주옵소서.
주께서 주신 그 큰 기쁨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주의 전을 향한 주님의 열심을 본받아
우리도 주께 충성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