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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크가 써먹은 유럽전선의 패튼과 몽고메리의 두개 진격로에 대해
맥아더는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 봐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알몬드를 내세워 탐탁찮은 워커를 견제하려 했다는것도 기록된 사실은 아니고
충견에 대한 배려인지, 혹은 그래야만 하는 당위성에 의한 것인지는 본인만이 안다.
진격로가 2개 였다는게 문제가 아니라, 지휘권이 2개 라는게 문제였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도쿄에서 보다 철저한 통제가 있었다면 대형사고는 없었을텐데
두 집단간의 따로국밥에 대한 낙관과 방관이 비극의 빌미였다..
이 따로국밥이 사실은 400년전 임진년에도 있었다.
풍신수길은 도쿄호텔이 아닌 오사카성에 앉아서
소서행장을 평안도쪽으로, 가등청정을 함경도쪽으로 진군시켰다.
두 왜장이 처한 상황이나 입장이란게 워커나 알몬드와 희안하게 비슷하고,
진군로는 400년 전꺼 얻어다 복사해서 써먹어도 무방할 정도다.
어쩌면 한반도의 지형이란게 그렇게 될수 밖에 없는건지도 모르겠다.
전력이 양쪽으로 분산된 상태에서 대륙(明)으로부터 새로운 적이 몰려올 경우
대책없다는것 까지 어찌 그리도 똑같은지..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이 실감난다.
올라갈수록 깔대기처럼 벌어지는 형태의 북쪽 지형과
낭림산맥이라는 백두대간의 축이 있으므로 공격루트의 이원화란 일견 타당하기도 하다.
설령 지휘권까지 나뉘었다 해도 작전협조만 원활하다면,
문명의 혜택이란게 400년 전과 다르므로 임진년과는 다르게 진행될수도 있었으련만,
원활한 협조는 커녕 이기심과 공명심에 의한 경쟁이었다게 문제였고
결국 400년 전과 똑같은 모양새로 쫒겨오고 마니, 출연진만 바뀐 리메이크 필림이었다.
가등 알몬드는 하늘과 동격인 맥아더의 의중대로 쾌속진군을 독려하지만
8군 소서 워커와 은연중의 경쟁 때문이기도 했다.
10군단의 구성은 인천작전때부터 같이한 미해병 1사단과 미 7사단,
후속 미 3사단,국군수도사단,3사단이었는데 그중 선봉은 해병 1사단이었다.
문제는 군단내의 선봉 사단장과 알몬드간에 사사건건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작전입안서 부터 시행에 이르기까지 인천서 부터 껀껀이 충돌했다.
이런 대립의 이유는 알몬드의 지휘능력도 문제랄수 있지만
육군과 해병대라는 이질적인 두 문화의 차이로 요약될수도 있다.
스미스 사단장은 상륙작전 같은 대규모가 아니라면 독자적인 작전을 원했는데
해병대가 육군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육군교리에 의한 작전으로 수행하는 대목부터
영 마땅치가 않았으니, 알몬드와의 대립은 그럴수밖에 없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이 감정적이거나 시기함은 아니었고,최선의 방책을 구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알몬드가 지휘계통을 앞세워 누르려 하지도 않았고, 일단 결정이 되면 스미스도 항명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깡마른 체구의 말이없는 원칙주의자였으며 과감성과 대범함도 갖춘 덕장이었다.
대단한 독서광으로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고, 말단병사와 똑같은 음식을 고집했다..
인천상륙에 이어 서울탈환후 10군단은 다시한번 상륙작전 준비를 해야했다.
낙동강 전선을 박차고 튀어나온 워커의 8군과 오산에서 연결에 성공한것 까지는 좋았으나
10군단을 그대로 회수하여 동해안에 상륙시킨다는 도쿄의 발상이 문제였다.
당시 인천수복이란 전략적으로도 많은 부가가치가 있었다.
경부선 철도 외엔 별다른 수송수단이 없던 당시의 인프라 현실에
인천이라는 물류항은 보급에 대단한 이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인천에서 재미를 본 맥아더는 원산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이 작전은 대실패였다.
10군단의 병력과 장비때문에 인천항은 아수라장이 될수밖에 없었다.
워커의 8군 군수품에 대한 하역과 겹치게되니 내리고 올리고 개판이 됐다.
낙동강에서 부터 올라온 8군은 부산과는 보급로가 길어져 인천을 통할수밖에 없었는데
10군단으로 인한 북새통 때문에 보급이 제한될수밖에 없었다.
8군은 보급받은 부대부터 순서대로 북진시킬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북한군의 철수병력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막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천에서 출발하게된 10군단이,
한반도 남쪽을 ㄷ자로 돌아 원산까지 기를 쓰고 와보니
북한군이 원산 앞바다에 퍼질러 놓은 기뢰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더 기막힌건 지금 동해안 해변도로를 따라 치고 올라온 국군 1군단이 어느새 원산을 선점해 버렸다.
무지비싼 차비내고 원산에 도착한 닭쫒던 해병과 7사단은 터덜대고 상륙해야 했다.
김빠진 행정상륙이 되버렸지만, 어찌됐건 후속 예비대인 미 3사단에게
원산 함흥을 인수인계하고, 해병 1사단은 애초 작전대로 장진호로 향할 터였다..
10월 25일 워커의 8군쪽으로 낭림산맥 서쪽에서 출현한 중공군의 존재는 새로운 국면의 징조였는데
국군 6사단은 그때 벌써 한만국경 초산까지 들이밀고 있었다.
이때라도 도쿄는 사태파악을 하여 동북진출 10군단에 대한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그런 명령이 없으니 10군단은 애초대로 작전회의 결과
국군1군단은 해안을 따라 북진하여 두만강하류에 도착한다,
미 3사단이 원산에 도착하면 해병1사단은 전선인계후 장진호로 진격한다,
미 7사단은 혜산진 방향으로 진격한다.. 이렇게 하달되었다.
서부전선의 8군이 중공군의 강한반격을 받은후의 시점에 이런 작전지시가 나왔다는건
납득할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용서받을수 없는 문제로 보여진다.
어떠한 비판을 받아도 마땅한것은, 이 대목이 한국전의 승부처였기 때문이다.
장고 끝에 악수(惡手)가 아니라 무뇌아(無腦兒)에 의한 덜컥수였다.
아무리 양쪽 전선의 작전권이 분리됐다 하더라도
좌측에선 아군이 위기상황이 됐건만 우측에서 별도의 진격이 행해진다는건
장기나 바둑에서도 있을수 없는 도대체가 말이 안되는 행위였다.
따로국밥으로 시작했다 해도 나중엔 죄다 밥말아서 깍두기 국물까지 부어 숫가락으로 퍼먹거늘..
서쪽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을리도 없으니 북진은 즉각 중단하고
전선을 축소시키면서 주력을 서쪽전선과 연결시킬수가 있었을 터이다.
조밀한 전선을 만들어 적의 우회 침투로를 봉쇄함이란 당연한 일이었고,
이것은 군사전문가가 아니라 동네 전쟁놀이하는 꼬맹이들도 그리할법한 일이었다.
등쪽으로 칼끝이 다가오는데 무대뽀로 동북쪽으로 가면 소련으로 월경이라도 하겠단 작정인가..
따로국밥이라 그리됐다면 국밥만든 도쿄에서라도 통합관리를 하면 될텐데
천하태평 그 동네는 국밥에 대한 권리는 있을지언정 의무란 없었고,
외려 한술 더떠서 맥사령부는 50년 11월 "크리스마스 대공세"라는 질퍽의 진수를 펼친다..
이런 상황이니 해병1사단은 장진호로 향하고, 10군단 예하부대는 경쟁하듯 가속도를 붙였다.
7사단은 부전호와 혜산진으로, 국군수도, 3사단은 함경북도 회령을 향하여 무한 레이스를 벌였다.
다덜 넋이 나간건지 8군은 이미 후퇴하기 시작했는데도 뒤도 안보고 전진이었다.
아무리 만고강산의 도쿄라도 전선의 그림이 너무 황당해짐에
그제서야 좌우연결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다.
만일 8군이 청천강에서 밀린다면 한반도의 구조상 38선까지 후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동북쪽 10군단만 순식간에 고립되는 상황이 될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병1사단에게 장진호를 더 빨리 접수하여
낭림산맥을 넘어 8군과 연결하라는 지시를 하게된다.말로서 불가능한게 있을까..
그것은 호텔안에서 지도 펼쳐놓고 얘기할때나 가능한 얘기였고
8군과 해병은 이미 핀트가 서로 어긋나 있는 물리적인 이격상태였다.
이 대목에서 알몬드와 스미스는 서로 침을 튀긴다..
스미스 소장은 장진호 출발전부터 그 넓은지역을 산개해 나가는 것에 대해 강력한 반대를 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 동계용 장비나 피복도 없는 상태에서의 진격도 맘에 걸렸다.
장진호라는 데가 개마고원 언저리인데 겨울엔 -30도가 기본이요, -45까지도 쉽게 내려간다.
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바람을 감안하면 체감온도는 아마 남극이랑 형님동생할것 같다.
스미스는 가면 갈수록 점점 험해지는 북쪽지형과 기후상태를 고려했고
확실한 보급루트의 확보가 없다면 너무나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알몬드가 도쿄지시라며 하도 지랄을 떠니 따르기는 했지만,
후일 항명으로 문책을 받게 되더라도 자기 생각대로 진격하리라 작심한다.
산악의 좁은 험로를 지나 고원지대로의 진격은 어쩔수 없이
종대로 할수밖에 없고 거점마다 확실한 교두보의 확보만이 안전을 담보한다.
길게 늘어진 종대는 측면공격을 받게될 경우 부대가 절단되거나 후미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알몬드의 지시에 의한 연대별 분산배치를 거부하고 사단 집중배치를 관철시키지 않았다면
후일 중공군에 의해 각개격파 되었을 것이다..
스미스는 항구인 흥남서부터 병참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 1마일의 전진밖에 못했지만 거점마다 통신소와 병참기지를 만들었다.
하갈우리에 수송기의 이착륙이 가능한 임시 활주로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타부대에 비해 느릴수 밖에 없는건 당연지사였고
스미스는 10군단중 가장 느리다는 알몬드의 소프라노톤을 참아내야 했다.
북쪽의 고산지대는 10월말 임에도 이미 겨울이 시작됐고
순식간에 많은 눈이 내리면서 영하의 기온으로 곤두박질 쳤다.
진격할수록 벌어지는 8군과의 간격때문에 스미스는 좌측에 더 신경을 썼는데
지도에 표시된 길이라는게 가다보니 낭떠러지가 아니면 험준한 산이었고,
장진호 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막혀진 협곡도 있었다.
온갖 고생끝에 얼어붙은 장진호에 도착했건만 진작에 쾌속후퇴중 이었던지 8군은 안보이고
뻥뚫려 있는 8군과 해병의 간극사이에 엄청난 규모의 중공군이 눈앞에 보였다.
그러니 연결은 고사하고 당장 생존을 걱정해야할 처지가 됐다..
1950년 11월 27일 좌측의 8군을 청천강인근까지 밀어내린 팽덕화는
장진호 깊숙히 들어와 있는 해병 1사단만 격파하면,
똥오줌 못가리고 한만국경까지 들어가 있는 10군단 잔여부대를 몰살시킬수 있다고 판단하여
전 병력의 반 가까이 투입하여 해병을 촘촘하게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교두보를 확보하면서 장진호까지 왔으나 12만명이 넘는 적에게
부지불식간 포위당한 고립무원의 해병1사단은 하루아침에 괴멸될수도 있는 위기였다.
유일한 우위인 제공권이란게 이런 산악지역에서는 빛을 발하는것도 아니었다.
기나긴 항일전과 국공내전을 통하여 비정규전과 산악전에 능한 중공군에 비해
미군에게 한반도의 겨울 산악지대란 너무 낮설었다.
그들에게 비춰진 한반도란 전체가 산에서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또하나의 적인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혹독한 추위로 인해
식수와 음식,엔진오일까지 얼어붙었다.
화기들의 발사불능에, 몰핀이 얼어붙어 위생병은 앰플을 입에 넣고 다녔다.
부상자를 눈위에 잠시 둘라치면 바로 동사했고, 대원중 절반이상이 동상에 걸려
일부는 시커멓게 변해가는 발목을 잘라내야할 정도로 전투력의 약화를 초래했다.
B.O.B의 바스통이나 스탈린그라드도 억세게 추웠다고들 하지만..
개마고원 주위는 해발 1000M 이상의 산악지대로 낮기온 -20도에 밤기온 -35도로
기록되어 있는걸로 미루어 보아, 체감온도로 따지면 그쪽 동네는 택도 아닐걸로 생각된다.
게다가 평양출신인 eastno어무이 말로는, 그해 겨울의 추위는 평생처음 봤다고 한다..
핼버스탬이 생존자들을 직접만나 증언을 토대로 써내려간
"가장 추웠던 겨울"이란 책 제목도 상징적인 의미만은 아닌듯 싶다.
생존자중 오언이란 장교가 "지옥보다 더한 추위"라는 장진호수기를 썼는데
추위에 대한 내용에서 가족은 밤새 통곡하며 읽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악천후가 상대적 보급이 열악한 중공군에게는 거의 재앙수준이었다.
방한복이 신통찮은 그들은 추위를 견디다 못해
멍하니 쭈그리고 있다가 잡혔고, 집단투항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미스는 좌절할수도 없었고 좌절하지도 말아야 했다.
자연과 기후가 최악이었지만 힘들기는 적도 마찬가지라 생각했고
싸워보지도 않은 항복이란 해병에게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그들이 12만명 규모의 중공군과 맞짱뜨고 있는 동안,
질퍽대고 올라가 있는 10군단 부대들의 안전한 후퇴로를 확보해 줄수있기 때문에
포기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도 버텨줘야 했다..
신념의 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포위된 상태에서 혹독한 추위에 질려버린 대원들에게
전사에 길이 빛나는 유명한 훈시를 한다.
우리는 후퇴가 아닌 진격을 한다, 다만 방향만 바꾸었을 뿐이다..
사단장의 이 한마디 말은 내일이 없던 대원들에게 실낫같은 희망을 주었다.
그는 자원병으로 구성된 해병대원을 믿었고
해병의 자부심은 이런 난관을 돌파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일방적으로 쫒기는 후퇴가 아니라
중공군의 삽겹살 포위망과 싸우면서 후퇴하는 신전술의 전형을 보였다.
다행히 그들은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6군과 달리,병참선이 살아 있었고
12월 1일 하갈우리의 임시 활주로가 개통되었다.하늘쪽으로는 열린 것이다.
제공권이 있는 미군에게 하늘이 열림은 종군기자들에게 열림이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해병1사단의 소식은 미국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본토가 발칵 뒤집혔다.맥아더 말로는 거의 끝나 간다고 했는데 느닷없는
정예사단의 전멸 아니면 항복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뉴욕 헤럴드지는 "미 해병사단 장진호에서 전멸위기"라는 톱기사로 도배를 했고
해병사령부의 교환대는 해병으로 입대한 가족의 전화로 마비가 될 지경이었다.
미군 역사상 사단이 통채로 괴멸의 위기와 조우한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더욱 심각했다.
대부분 신문의 논조가 전멸쪽으로 예상했고 정부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들의 안위는 서방측 전세계인의 주목과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의 격려차 맥아더도 날아왔고,사태파악후 스미스와 논의했다.
종군기자들은 혹독한 환경속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처절하게 진군하는
해병의 분투에 가슴 뭉클한 눈물을 흘리며, 대원들의 감투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알몬드의 닥달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설치해논 병참기지는 이제 생명선이 되었고,
하갈우리는 부상병수송과 보급품지원에 이용되었다.
임시 활주로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들은 괴멸 당했을거라는게 중론이다.
중공군은 아무리 퍼부어도 끝이 없었고, 인해전술이란 용어도 이때 등장했다.
적의 손실은 계산이 안될 정도였으나, 해병도 막대한 손실이 있었다.
결국 도쿄사령부는 이 세기의 주목에 대해 항공을 이용한 탈출을 제안한다.
이 제안을 받은 스미스는 항공탈출이 지옥의 형국을 마무리 지을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념의 지휘관 스미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항공편으로 철수한다면 끝에가서 결국 최후의 비행기가 출발할때 까지
1개중대 병력이 경계를 서야 되는데 이들의 안전을 장담할수 없는것이 문제요,
이것은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해병의 신념과 전통에 어긋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냥반 너무 멋지지 않은가..
전체전선에 의한 고립된 후퇴였지만 장진호에서의 전투는 그들의 승리였다.
해병이 7천명 가량의 사상자인데 반해, 중공군은 4만명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고
12월 11일 그들은 마침내 흥남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그들은 전설이 되었다.
결국 중공군 주력을 2주동안 지연시켜 흥남 장진호 축선으로 잡아둘수 있게 되었고
한만국경까지 올라가 있어 고립되었을 10군단의 안전한 철수로를 확보하여 준다.
장진호 전투를 발판으로 흥남부두에서 193척의 군함이 동원되어,
피난민까지 20만명이 해상 철수한다.
그것은 "굳세어라 금순아"가 나오게된 처참한 1.4후퇴의 시작이었다.
북진작전시 무조건 진군하라는 상급부대의 무모한 작전에 반대하고
이후 계속되는 채근에도 묵묵히 안전진격의 항명을 택했으며
고립된 부대를 불굴의 신념으로 지휘하여, 중공군으로 하여금 10여개 사단을
재편시킬 만큼의 출혈을 강요하면서, 포위망 탈출의 기적을 일구어낸
미 해병1사단장..올리버스미스 소장에게 진심어린 존경과 마음의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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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리버 스미스 그 냥반 정말로 멋지구만요. 해병 대령으로 예편한 친구가 한넘 있는데....연말 송년 동창회에서 돌아가며 한곡씩 뽑는자리에서 ... 내 얼굴이 검다고 깔보지마라 해병대 곤조가라나 뭐라나... 대단한 해병들..
역사에서 가정처럼 영양가 없는 일도 없지만, 이 냥반이 U.N사령관 이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상상을 자극합니다.. 한쪽에선 이이가 첨부터 쾌속진군 했다면 8군과 만날수도 있지 않았겠냐, 무슨 전투 지휘관이 활주로나 만들고 있냐고 하지만, 중공군은 그때 이미 한반도에 포진하여 매복하며 기다리고 있었으니, 뭐.. 팽덕화는 양군 사이의 간극을 간파하고 있었지요..
'Retreat hell We're just attacking in another direction" - 마음먹고 한 말이 아닐진 몰라도, 이 말 한마디가 많은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북돋아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건, 스미스소장이 돌아가신 날짜가 12월 25일이라는 거.
그 말이 대원들을 모아놓고 한게 아니라, 참모부에서 한말인데 그 말이 병사들 간에 돌고 돌아 그리 됐다는군요..암튼 대단한 사람같다는.. ^^ 12월 25일이 기일 이랍니까
우와~ 어디서 한것까지 아시는감유?
고수님 4월과 5월 카페에서 이렇게 재밌게 심층적 역사공부를 하게 될 줄? ...요사이 알았다눈! ㅎㅎ
역사란 지루하게 마련인데 그래도 재미를 느끼며 읽게 되셨다면 절반의 성공은 한듯..^^근데 좀 길긴 하지요
역사를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재밌게 여기는 사람도 있지요. 저는 일때문에 근현대사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생각보다 재밌다는. 역사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므로 기록으로 남겨 기억하기 위한 인간들의 삶의 궤적이므로 우리의 삶과 무관치 않은 듯. 그리고 고수님 기왕이면 쪼매 덜 길게 하시면.....금상첨화일 듯.^^" 노래팬카페에서 역사이야기의 만발이라니 것 또한 재밌는 일입니다.^^"
음..역시... End가 없으니 안심해도 되겠네요... 다시한번 구리스마스 구절을 상기하며... 고수님 원적지(?)는 요즘 좀 시끄럽던데...
으음, 사실은 앞전 글에다 이 얘기를 같이 하려 했는디, 또 무식하게 길어질듯 하여 따로 빼서 올린거구요.. end 얘기는 앞글에 이미 했으니.. 제 원적지는 평양이 아니라 양주랍니다..저는 제기차기동 출신이구요..^^
저 장진호 전투에서 미해병의 포병부대와 중공군 보병간의 전투가 있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3~400m간격으로 마주하였는데 포를 거의 직사로 쏴서 중공군병력을 물리쳤다죠?? 대포의 위력을 실감한 전투였읍니다.
그 시절 현장에 계셨나바여
으음, 알로에님은 전쟁스토리를 꿰차고 계시는듯.. 해병사단도 편제상 포대가 있지만 아마 알로에님이 얘기하는 전투는 배속되어 있던 7사단 포대 얘기인듯..영국 특공대도 투입되었던, 암튼 장진호는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피튀기는 전투였지요..사상자 수로 그 정도를 가늠해 본다면 마켓가든이 양군 3만명이라면, 장진호는 5만명 정도였으니 그 치열함을 엿볼수 있다는..
으아크 소설이다 언제 이걸 다 쓰세요
지 좋아서 하는 일이라 그리 많이 소요되지는 않아요..숫자 같은것 때매 인터넷 뒤져가며 소요되는 시간만 아니라면 2-3 시간이면 되는데, 대신 집중을 해야 하지요.. ^^
지금쯤 고수님은 담 이야기 욜렛아짐을 자극할 만한 스토리로는 무얼 주제로 으면 좋을까....대강 아우트라인을 잡은것으로 믿고..지둘리는 중이거 다 읽었느냐고는 묻지 마다 읽어내려 왔다는...마치 소설의 한 단원을 읽어 내려오듯 미진진(믿어주세요)...올리버스미스 소장님의 명장덕장특유의 자세는 가슴이 다 찡하네요정말로 아마도 항공편으로 후퇴하는 상황이 되었더라면...끝까지 배와 함께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선장이름도 공교롭게도 스미스라는)처럼..마지막 남은 꼬랑지 해병이 다 탑승하는 그 순간까지 해병동료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했을 분이실거라는 상상에 하는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
나 분명히 죄다 읽었음.....하는 소리가 여그까지 들린다는.. 암튼 맥아더에 의한 실착으로 인해 피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그가 한국전에서 잘한 일은 오로지 인천작전 딱 한개 뿐이에요.. 욜렛아짐을 자극할만한 스토리로 순수 한국군 전투중에 파로호라는 드라마틱한 전투가 있는디.. 우찌 생각하시는지.. 당췌, 됐거덩하는 소리가 또 들린다는.. 그래서 관둘란다는..
안되옵나이다~ 파로호전투도 올려주시옵소서!
정말 잘 보시는 건지는인 사살이 안됐지만, 두공님과 후리지아님을 위해 끝으로 쓸께유.. ^^
고수님! 진짜 고수시네유~ 저 사실 전쟁야기는 잘 이해못하는디유 이거 한번 읽어서는 안되겠고 또 한번 더 읽고 감상문 올릴께유 저는 첨에 장진호가 사람이름인줄알았다고 함 무식이 완죤히 탄로 나겄지유 그게 사람이름이 아니라는것만도 많이 배운거쟎아유~...
후리지아님은 절 더러 재밌다고 하시는데, 내가 볼땐 후리지아님이 외려 한수 위라는.. 이사하러 가던지 말던지에 이어 장씨 성을 가진 진호라니.. 시간 나실때 함 찬찬히 보세유..^^
한사람의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후퇴아닌~진격~~다만 방향만을 바꾸었을뿐~~멋지네요~스미스 란 양반~~~맥아더에 대해선 인천상륙작전 밖에 모르니~~파이프하고 검은 앵경하구~~~멋진글 쓰시는 멋진 고수님!고운꿈 꾸세요~전쟁꿈 말구요~`ㅎㅎㅎ
맥아더에 대해서는 앞글을 보시면 파악하게 되시겠지만, 파악해야 할 이유가 루 없지유.. 군대에서 지휘관의 위치란 부하들의 목숨을 떼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