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나무들] 탐스러운 모감주나무 열매, 익어가기를 기다리며
[2009. 8. 17]
어린 시절, 어머니는 화분에서 키우는 분꽃의 꽃봉오리가 열리면, ‘이제 저녁 밥 지을 때’라며, 부엌으로 들어서시곤 하셨습니다. 분홍색의 분꽃은 대략 늦은 오후, 해가 뉘엿뉘엿할 즈음에 피어납니다. 시계가 귀한 시절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꽃 피고 지는 걸로 사람살이의 기준을 삼았던 옛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거겠지요.
그게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철따라 셋방살이를 옮겨다니면서도 채송화 분꽃 과꽃 화분만큼은 잊지 않으셨던 가난한 어머니의 살림살이는 언제나 예뻤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2월을 송아지 털이 검붉어지는 달이라 하고, 9월을 자두가 붉게 익어가는 달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지혜겠지요.
‘모감주나무에 열매 맺히면 여름은 다 간 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옛 사람들의 흉내입니다. 며칠 째 폭염주의보를 동반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그래도 길가의 모감주나무(Koelreuteria paniculata) 가지 끝에는 노란 꽃 다 떨어지고 주렁주렁 탐스러운 열매가 맺혔습니다. 아직 뜨거운 여름임에 틀림없지만, 모감주나무의 탐스런 열매를 보면 더위 다 간 듯 싶습니다.
천리포수목원에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 여름에는 모감주나무에 노란 꽃들이 피어납니다. 가지 끝에 총총 매달리는 노란 꽃들은 대표적인 여름 꽃입니다. 가지 끝에 모여서 나무 전체를 노란 빛으로 드리우는 모감주나무 꽃 송이 하나하나는 지름 1센티미터가 채 안 되게 작습니다. 그런 작은 꽃이 모여 피어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화려합니다.
꽃이 많지 않은 한여름에 피어나기 때문에 돋보이는 꽃이기는 하지만, 꽃보다는 열매의 특이한 생김새가 눈길을 끕니다. 열매는 꽃 떨어지고 나서 곧바로 맺히기 시작해서, 가을 되면 통통하게 익는데, 꽈리와 생김새도 비슷하고 크기도 비슷합니다. 열매 껍질은 쭈그러진 종이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그렇지요.
꽈리가 전체적으로 둥근 공 모양인데, 모감주나무의 열매는 껍데기가 셋으로 나눠지기 때문에 조금 각이 졌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에요. 하지만 생김새의 느낌은 꽈리와 꼭 같습니다. 이 열매 안쪽은 과육 없이 텅 비어있는데, 열매의 껍데기 안쪽에 윤기가 나고 까만 씨앗이 3개씩 맺힙니다. 불가에서는 이 씨앗을 염주알로 쓴다고도 하는데, 염주알로 쓰기에는 좀 작지 싶습니다.
염주알로 쓴다는 때문인지, 모감주나무는 불가의 절집에서 많이 심어 키우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입니다. 천리포수목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안반도의 안면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모감주나무 군락지도 있습니다. 바닷가 3천평 정도 규모의 이 군락지에는 4백 그루가 넘는 모감주나무가 무리를 지어 자라며 방풍림 역할을 합니다.
안면도의 군락지에서 자라는 모감주나무들은 중국의 산동반도 부근의 해안에 떨어진 모감주나무 씨앗이 파도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자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천리포수목원에도 몇 그루의 모감주나무가 여름이면 한창 짙푸르러진 녹음의 숲 사이에서 노랗게 꽃을 피워서 도드라진답니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이 모감주나무들에도 여름의 끝을 알리는 꽈리 모양의 열매가 주렁주렁 익어갈 겁니다.
모감주나무 꽃이 여름을 알리는 꽃이라고는 했지만, 이 여름에 천리포수목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꽃은 뭐니뭐니 해도 여러 종류의 수국(Hydrangea macrophylla for. otaksa)일 겁니다. 가지 끝에서 둥글게 모여서 피어나는 탐스러운 꽃무리는 여름 화려함의 극치입니다. 워낙 종류가 많은 나무이지만, 천리포수목원에 심어 키우는 수국만도 일일이 종류를 헤아리기 힘들 만큼 다양합니다.
가지 끝에서 둥글게 모여 피어나는 꽃의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푸른 빛에서부터 붉은 빛에 이르기까지 색깔만큼은 매우 다양합니다. 또 수국은 한번 피었다가 색깔이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수국 꽃의 색깔이 보여주는 다양함은 일일이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이 다양한 종류의 수국을 수목원 곳곳에 심어두었는데, 무엇보다도 작은연못 가장자리에서는 한꺼번에 다양한 수국을 여럿 볼 수 있어 좋습니다.
수국의 학명에 붙은 otaksa 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 나무에 학명을 처음 붙인 이는 서양의 식물학자라고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일본에서 식물조사를 하던 중, 아리따운 기생과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기생이 마음이 변해 그를 떠났어요. 때마침 수국을 조사하던 그는 꽃의 색깔이 금세 변한다는 걸 알게 됐고, 그게 마치 애인의 마음이 변한 것처럼 생각되어, 학명에 그녀의 이름인 otaksa 를 붙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보아온 것처럼 수국의 화려한 꽃도 꽃잎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꽃받침잎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꽃이 처음 피어날 때에는 4~5장의 작은 꽃잎이 있지만, 곧바로 떨어지고, 꽃받침잎이 오래도록 남아서 여름을 화려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꽃받침잎이 화려한 다른 꽃들처럼 수국도 꽃이 피어있는 시기가 길어서 관상용으로 사랑받는 나무입니다.
한번은 저 화려한 수국 앞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한꺼번에 피어난 꽃 송이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려보려고, 꽃 앞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서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애시당초 완벽하게 헤아리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단단히 마음 먹고 하나 둘 헤아렸지만, 겨우 서른 송이까지 센 뒤에 그냥 포기해야 했습니다. 촘촘히 붙어있는 꽃송이들을 하나씩 지워가며 헤아린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냥 엄청나게 많은 꽃송이가 한꺼번에 무리지어 피어나는 꽃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지요. 수국의 많은 종류 가운데, 꽃받침잎이 꽃무더기의 바깥 송이에만 피어나는 종류도 있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다른 종류의 수국 꽃과 다르다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산수국(Hydrangea macrophylla for. acuminata)에 속하는 종류의 꽃입니다.
한낮 뙤약볕 피해 나무 그늘 아래 들어서니, 노란 색의 예쁜 애벌레 한 마리가 홀로 어딘가를 바쁘게 기어가네요. 애벌레 몸짓 따라 가느다란 풀잎도 살짜꿍 살랑이네요. 여름 지나면 이 애벌레는 어떤 어미로 몸을 바꿀까 사뭇 궁금해집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