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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 풀기 그리고 끈 자르기 | ||||
[사람 사는 이야기-심명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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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봉두씨가 죽었다. 그의 죽음을 두고 주의의 반응이 가지각색이다. ‘뒈질놈’이 갔으니 잘 되었다, 라는 긍정파, ‘있을수 없는 일’이라는 부정파, ‘결국 갔구나’의 동정파. 영산강변 가난한 소작농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심하게 앓은 중이염으로 청각을 잃었다. 말귀 못알아 듣는 아들이 답답한 아버지는 ‘식충이’‘썩을놈’이라고 구박했다. 농삿일에 장남은 큰 노동력이기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가 아버지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 없었다. 열여섯 살의 그는 아버지의 손찌검과 눈칫밥을 피해 그는 야반도주를 했다. 부지런하고 쾌활하고 씩씩하고 인상좋은 그는 서울역 주변의 중국 음식점에서 자장면 배달을 시작했다.그러나 귀가 말썽이었다. 학교는 근처에도 안 간 까막눈에 의사소통이 안 되니 실수가 잦았다. 중국음식점에서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났다. 청소부, 주방설거지, 넝마주이 등 안 해본 게 없다. 그러나 어디든 오래 붙어있지 못했다. 발 붙일 데가 없었다. 고향 생각이 그리웠지만 아버지가 무서웠다. 5년만에 돌아온 고향집은 흔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동생들은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아버지는 행방불명이다.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만 살 길이 막막했다. 사람들은 그를 이용만 했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하소연 할 데도 기댈 데도 없다. 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쌓이는 술병 만큼 그는 술에 빠져들어갔다. 신림동 시장바닥에서 ‘개’로 악명높은 부랑인 김봉두씨를 구해준 사람은 요셉의원의 원장인 의사 선우경식이었다. 구걸, 문전취식, 행패로 ‘뒈질놈’이 된 그를 선우경식은 평생 환자로 접수했다. 그때부터 환자와 의사의 긴 동행이 시작되었다. 술만 마시면 개지랄을 해대는 그를 ‘쫓아내자’고 이구동성 항의가 빗발쳤지만 그럴때마다 선우경식은 그의 편이었다. 그러나 선우경식 혼자만의 외로운 짝사랑이었다. 어제 멀쩡하던 그가 다음날 술에 망가져서 오면 수선(?)하는 것이 선우경식의 몫이었다. 술을 사이에 두고 쫓고 쫒기는 둘의 숨바꼭질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연어가 산란기만 되면 어김없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듯이 김씨 역시 그랬다. 패잔병이 되어 나타날 때마다 선우경식은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 더러운 벌레인냥 그를 향한 따가운 시선과 ‘떠나라’는 주위 사람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다.그를 향한 선우경식의 짝사랑이 효험을 보기 시작했다. 일주일, 1개월, 1년, 3년... 드디어 마의 벽 3년을 넘기면서 술을 끊었다. 20년 걸려 이룬 쾌거였다. 술을 끊으니 희미하게 살아있던 오른쪽 귀의 청력이 움직였다. 보청기로 의사전달이 가능했다. 그는 새 인생을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새벽 4시의 지하철 무가지 신문 수거, 공공근로 경비원, 행상 등 투잡 쓰리잡까지 뛰었다. 그는 이제 ‘멋진놈’이 되었다. 폐지를 팔아 번 돈 2만원중 만원을 빳빳한 새 돈으로 바꿔 봉투에 넣었다. “선생님 감사함니다. 술 꼭 끈케습니다.”감사의 편지와 함께. 봉두씨는 유명해졌다. 악명을 벗고 유명인사가 되었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텔레비젼 다큐에 그의 인생역전을 제보하자고 야단들이었다. 세밑 한파가 손끝을 아리게 하는 지난해 겨울 나는 그의 자살소식을 들었다. 2년전 선우경식이 세상을 떠난후 나 역시 요셉의원을 떠나야 했기에 먼 데서나마 김봉두씨를 응원하고 있었다. 선우경식의 죽음 후 그는 어미 잃은 강아지가 되어 몸도 마음도 붙일 데 없이 방황했고 결국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뒈질놈’에게 유일한 ‘내편’이 되어준 선우경식이 없는 세상은 그에게 죽음이나 다름없는 곳이었을 것이리라 짐작한다. 언젠가 포장이 몹시 꼼꼼하게 된 소포가 왔다. 포장된 끈을 자르려고 하자 선우경식이 말렸다. “끈은 자르는게 아니라 푸는 것”이라고. 나는 포장끈의 매듭을 푸느라 짜증이 났다. “가위로 자르면 될 것을...” 투덜댔다. 결국 끙끙거리며 매듭을 풀자 그는 “잘라 버렸으면 쓰레기가 되었을 테지만 끈이니 나중에 다시 쓸 수 있다”고 “잘라내기 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진지하게 덧붙였다.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선우경식과 김봉두 씨의 인연은 ‘자르는게 아니라 푸는 것’이었다. 현실의 고통앞에서 김봉두씨는 선우경식과의 끈끈한 연대를 통해서 큰 위로와 사랑을 얻었다. 이처럼 소소한 연대가 사랑을 깨우치고 발전시키며, 결국 사람을 기어이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지나온 내 고통에도 말없이 함께 해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을, 그러기에 내가 아직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진실을 두 사람을 통해서 깨닫는다. 우리는 김봉두씨의 매듭을 푸는데 실패했다. 김씨 스스로 매듭을 잘랐다. 분명한 것은 김씨의 자살안에 우리 모두가 함께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가 ‘뒈질놈’일 때도 그가 ‘멋진놈’일 때도. 지금까지 우리는 김씨의 매듭을 풀기도 자르기도 해왔다. 선우경식이 지난 20년동안 자르지 않고 요셉의원에 남긴 김봉두 씨의 끈을 말이다. 끈은 자르는 것이 아니다. 푸는 것이다. 그 끈이 사람일 경우는 더더욱. * 이글은 <생활성서> 2011년 1월호에 실린 것으로, 필자가 다시 손을 보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기고했다. 심명희/ 마리아. 약사. 2000년 4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요셉의원에서 상근 봉사자로 일해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