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 (76)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宜戚而懼
마땅히 슬퍼하며 두려워해야 하거늘
온 나라가 야단이다. 연일 곳곳에서 시위로 몸살이다. 이러다가는 해방 후 70년 동안 폐허에서 세계굴지의 나라로 발전시킨 대한민국이 후퇴하는 것이 아니냐하는 우려가 식자(識者)들에게서 나온 지 벌써 한참 되었다. 그 원인은 누가 뭐라고 하든 여야(與野) 청치인과 그 세력들의 행동에 때문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들은 권력을 빼앗거나 지키기에 혈안(血眼)이어서 그들에게서 우리의 선배들이 쌓아 놓은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겠다는 진정한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시기에는 삼국지라도 한 번 읽고서 역사를 반추해 보아야 하지만 이들 가운데 삼국지라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은 사람이 있겠는가 싶다. 삼국지연의야 유교적 정통론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힌 시대에 삼국시대를 유비 중심으로 보려고 각색하였지만, 실제로 후한말 헌제(獻帝)시절의 실권자이고 중심인 인물은 승상인 조조(曹操)였다.
명목으로는 헌제가 황제이고 조조는 승상이지만 모든 권력은 조조의 손에 있었다. 그래서 조조에게는 헌제가 9석(錫)까지 내려 주었다. 이제 조조가 출입할 때는 황제가 출입할 때만 하던 경필(警蹕)하는 의장(儀仗)을 하도록 하였으니 비록 남쪽으로 손권(孫權)이 있고 서쪽으로는 유비(劉備)가 있지만 조조가 중원지역의 최강자이고 황제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치와 흡사하다할까?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쌓은 조조도 나이 많아서 자리를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러니 그 후계 자리를 놓고 그 아들 사이에 피 터지는 경쟁이 벌어졌다.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의 여야(與野) 같다고나 할까?
조조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다. 조비(曹丕), 조창(曹彰), 조식(曹植), 조웅(曹熊)이다. 물론 장남인 조비에게 후계자로서의 우선권이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될 지에는 많은 변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특히 셋째 동생 조식 때문이다. 그는 남다른 재주를 가졌고 그의 성품은 기민하고 경계심이 있으며 기예와 재능이 많았는데, 그 위에 문장을 짓는 재주도 있고 민첩하면서 여유로움도 있어 조조가 그를 아꼈으니 조비에게는 위협적 경쟁자였다.
개인 능력뿐만 아니라 조식을 밀고 있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 가운데 정의(丁儀)가 있었는데, 그는 조비에게 악감정을 가졌다. 왜냐하면 조조가 그 딸은 정의에게 시집보내려 했을 때 조비가 정의는 짝짝이 눈을 가졌다고 반대하여 이 일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의와 뜻을 같이 하는 그의 동생인 정이(丁廙)는 황문시랑(黃門侍郎)이었으니 항상 궁궐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조조를 가까이 만나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승상부(丞相府)의 주부 양수(楊脩)도 있어서 이들은 기회 있을 적마다 조조에게 조식을 칭찬하면서 그를 후계자로 삼으라고 하였다.
조조는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묻자, 그래도 장남을 후계자로 선정해야 한다고 하여 조비는 이들의 도움을 받으니, 동생 조식과 경쟁은 겉으로는 형과 동생이지만 속으로는 피 터지는 경쟁을 해야 했다. 동생 조식을 의식한 조비는 태중대부 가후(賈詡)에게 자기가 후계자가 될 술책을 자문하였다. 가후는 술책을 알려 주는 대신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덕망의 정도를 넓히고 높이고, 몸소 소사(素士)들이 하는 학업을 익히며,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하며 자식 된 도리를 어기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조비는 오관중랑장이었기에 그를 장군이라고 호칭하며 아들로서의 기본을 지키면 된다는 충고였다.
그러나 조비는 아들로서의 기본은 지키기 보다는 눈치작전에 힘을 기울였다. 한번은 조조가 늙은 몸으로 출정(出征)하게 되었을 때 조비와 조식은 나란히 출정하는 아버지를 환송(歡送)하기 위하여 길가에 나와 있었다. 이때 조식은 그 화려한 글 솜씨로 아버지 조조를 칭송하였다. 이를 듣는 사람들은 역시 조식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조비는 바로 위기(危機)를 느끼던 차에 바로 옆에 있는 오질(吳質)이 술책을 제시하였다. “대왕께서 떠나시게 되었으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옳습니다.” 조조는 이때 위왕(魏王)이었으므로 조조를 눈물로 전송하라는 말이었다. 이 말을 들은 조비는 아버지 조조를 향하여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며 절하는 것으로 전별(餞別)하였다. 이를 본 조조와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흐느껴 울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조식의 화려한 말은 진실한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눈물 작전이 효과를 본 셈이다.
그러나 조비의 눈물은 오질의 권고에 따른 술수일 뿐이었고, 진심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조식은 성품대로 행동하며 스스로를 새기거나 꾸미지 못하였으나, 조비는 감정을 술책으로 제어하며 고치고 스스로를 꾸미니, 그 술책에 떨어진 궁인과 주위의 사람들이 나란히 그를 위하여 칭찬하는 말을 하였다. 결국 조비는 태자로 정해졌다. 술수가 성공한 셈이다.
태자가 되자 조비는 바로 의랑인 신비(辛毗)의 목을 껴안고 말하였다. “신군(辛君)은 내가 기뻐하는 것을 알지 못하시오?” 여기서 너무 기쁜 나머지 그동안 수식하던 태도를 지키지 못하고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 말은 들은 신비의 딸 신헌영(辛憲英)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태자께서는 군주를 대신하여 종묘와 사직을 주관하실 분입니다. 군주를 대신한다는 것은 슬프지 않을 수 없고, 나라를 주관한다는 것도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당 슬프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도리어 기쁘게 여긴다면,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 위나라는 창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담당할 일의 무게를 모르고 아버지가 이룩한 과실만 따먹으려는 조비의 술수를 비판한 것이다.
신헌영의 예언대로 되었을까? 조비를 태자로 삼은 조조는 얼마 뒤에 죽었다. 조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漢) 헌제(獻帝)의 제후인 위왕(魏王)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은 그는 허울뿐인 황제 칭호를 갖고 있는 헌제에게 자기에게 선양하게 하여 황제 자리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위왕조를 열었다. 그리고 아버지 조조의 상기(喪期) 중인데도 그는 황제가 되어 연회를 거창하게 열었다. 아버지가 죽어서 잘 되었다는 뜻일까?
그러나 신헌영의 말대로 그가 황제에 오르자, 유비도 촉에서 황제에 올랐고, 얼마 지나자 손권도 오(吳)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오른다. 삼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위(魏)에서는 사마의(司馬懿)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권력은 사마씨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명목만 남은 위(魏)왕조는 세운지 45년 만에 조(曹)씨는 형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황제자리마저 사마염(司馬炎)에게 넘겨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술수로 이룩한 허망한 꿈이 무너진 것이다.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지금 다투고 있는 여야는 술수로 지고 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다. 어디에도 선배들이 이룩한 이 위대한 대한민국의 업적을 이어받아 이 험난한 세상에서 더 발전시킬 꿈을 제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을 쟁취하여 선배들이 이룩한 과실만 따먹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이를 보는 선량한 백성들은 괄목할 만큼 성장한 한국의 세계적 위상과 술수로 자리를 차지하여 선배들이 이룩한 과실을 챙기려는 정치인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앞날을 걱정한다. 제발 조비 같이 술수 꾼인 인물만은 승리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첫댓글 좋은 역사평론 감사합니다. 항상 깊은. 전공에 힘쓰시는 선생님의 학문태도가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