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의 인연/靑石 전성훈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여행이라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한 채 출발한다. 부부 여행, 가족 여행, 친구끼리 여행, 친목 단체나 모임에서의 여행 등 다양한 여행을 다녔지만, 이번처럼 동창 부부와 함께하는 나들이는 처음이다. 가끔 부부 모임을 한 덕분에 모두 아는 얼굴이지만, 남자끼리 혹은 여성끼리 여행이 훨씬 편하고 부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맴돈다.
오전 7시 서울역 옛 대우빌딩 앞에서 몇 사람, 나머지는 잠실에서 자동차를 탄다. 서울을 벗어난 리무진 버스는 신나게 달린다.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이는 가운데 버스에 탄 사람들은 약간 들뜬 모습으로 소곤소곤 이야기한다. 여행객 나이가 대부분 우리 또래와 엇비슷해 보인다. 문막휴게소에서 잠시 쉴 때 하늘을 올려다보니 미세먼지가 낀 뿌연 모습은 여전하다.
처음 간 곳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강원도 정선 적멸보궁 정암사(淨巖寺)다. 일반적으로 적멸보궁은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근처에 수마노탑을 지어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한다. 이곳 적멸보궁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을 묘사한 신중탱화(神衆幁畵) 2점과 동종(銅鐘) 1점을 보관하고 있고, 뒷산 중턱에 수마노탑이 있다. 수마노탑은 용궁에서 나온 푸른 마노석 불탑이라는 의미로, 정암사는 통도사, 법흥사, 상원사, 봉정암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이다. 수마노탑 올라가는 숲길이 조금 가파르다. 간절한 마음으로 큰절을 올리는 불자도 관광객도 생각 외로 많다. 적멸보궁을 보며 어떻게 하면 평상심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정암사를 떠나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이며(해발 1,330m) 야생화의 천국인 만항재(晩項齋)로 향한다. 고도가 높은 만항재는 모르는 사람과 대면할 때 조금 어색하거나 생경한 기분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진작가 친구가 ‘바람난 여인’이라는 꽃말을 가진 고개 숙인 얼레지 꽃잎의 속살을 찍는 모습을 보며 감탄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서 찍어보지만, 풋내기 솜씨로는 잘 안 된다. 만항재 휴게소에 들리니 마시고 싶었던 메밀 막걸리가 눈에 띄어 얼른 두 병을 챙기고 값을 치르려니까 카드는 안 받는다고 한다. 냉장고 안에 ‘벌떡주’라는 묘한 이름의 술이 보이길래 궁금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술병 위에 얹힌 술잔이 그 무엇과 꼭 닮은 꼴이어서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정갈한 산채정식에 막걸리 한잔하며 맛있게 점심을 먹고 태백석탄박물관을 찾는다. 석탄 채굴 모형을 보면서 한 시대 앞선 선배와 부모세대의 힘들고 한 많은 삶이 떠올라 마음이 안쓰럽고 착잡하다. ‘물이 흐르면서 구멍이 생겼다’는 구문소(求門沼)에서 사진을 찍고 죽변항으로 떠난다. 모노레일을 타고 바람이 세찬 바다를 바라보는 관광이다. 한 친구가 옛날 이곳에서 군대 생활을 했다며 추억어린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11년 전 5월 어느 봄날, 혼자서 영덕 고래불 해변에서 강릉을 향해 동해안 해파랑길을 걸으며 지나던 죽변항, 발바닥에 물집이 심하게 생겨 약국에 들어가 약을 사서 치료했던 기억이 새롭다. 온종일 해가 나지 않고 바람이 불어 체감온도가 낮다. 죽변항 횟집에서 모둠회와 문어를 안주 삼아 메밀 막걸리, 소주,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며 즐거운 향연을 벌린다. 밤이 깊어가는 죽변항을 떠나 울진 백암온천 호텔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다. 소파가 놓인 넓고 아늑한 방에서 달달한 술기운에 포만감을 느끼며 깊은 잠에 푹 빠진다.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뜨거운 온천탕에서 몸을 풀고 뷔페식 아침을 먹고 후포항 등대공원을 구경하고, 하늘과 호수와 바라보는 사람의 눈동자에 달이 뜬다는 안동댐 월영교 다리에서 멋진 포즈를 취한다. 부근 음식점에서 짜지 않고 심심하게 간이 밴 간고등어와 된장찌개에 소주를 곁들여 맛있게 점심을 먹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회마을에 들려 뜨거운 햇볕 아래 시원한 냉커피를 마시며 훌륭한 조상의 문화유산을 구경한다. 함께 간 아내들은 꼭 붙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꽃을 피운다. 그 와중에도 남편 흉보는 게 제일 재미있나 보다. 밴댕이 소갈머리를 닮은 사람은 누구일까,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와 세탁 등 집안일을 제대로 할 줄 몰라 집에서 내쫓겨날 것 같은 사람은, 배려심 많고 잔정이 많은 사람은, 쓸데없는 고집이 가장 센 사람은 누구일까? 등등 이런저런 우스운 이야기를 하며 스트레스를 풀고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10대 소녀처럼 웃음꽃을 터뜨리는 아내들 모습을 보니 문득 오래전에 보았던 신문기사가 떠오른다. 내세에 태어난다면 현재 배우자와 다시 결혼할 것인가를 묻는 내용으로, 남성의 60% 가까이는 그렇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여성의 경우는 거의 90%가 부정적인 응답을 한 내용이다. 여행을 함께한 부부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어떤 대답을 할지는 본인 이외에는 알 수 없을 것 같다. 배우자라도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결혼생활 40년이 훌쩍 넘어, 다정히 손잡고 걸을 리 없고 남편은 저만치 떨어져서 걸어갈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미운 정 고운 정을 느끼며 울고 웃기도 하고, 눈을 흘기면서도 살을 맞대고 한세월을 살아온 인생의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다. 이제 얼마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우리의 앞날, 마음을 비우고 모질고 질긴 ‘인연의 끈’을 원망하거나 한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옛날 젊은 시절 처음 만났을 때의 아련한 설렘과 향기와 빛깔을 기억의 저쪽 창고에서 끄집어내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다시 한번 모두 손을 잡고 나그네가 되어 가을 하늘을 향해 길을 떠나고 싶다. (2023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