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단 한순간의 의미 있는, 혹은 단 한소절의 아름다운 음악, 단 한 장면의 아름다운 모습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그 짧은 ‘한 순간의 것’이 내 마음의 다락방에 저장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그러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실체에서 점점 멀어지고 무뎌진다는 것을 뜻한다. 세상을 점점 더 산다는 것은 그렇다. 점점 세상의 것에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열정이 식고 물기와 색상마저 훌훌 벗어버린 겨울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바람 따라 흩날린다는 뜻이다. 마른 낙엽처럼 그렇게 흩날릴 때가 많다. 그러한 날엔 영화를 보고 싶다. 하루에 단 한 순간은커녕 한주에 한 번이라도 심지어는 한 달에 단단 한번이라도 ‘한 순간의 것’이 결핍된 정신적 영양실조의 순간, 링거를 인위적으로 맞듯.
프리드리히 니체의 만년은 끔찍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규모있게 정리하며 글을 쓰던 철학자가 거의 10년을 병상에 누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죽은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가는 병증의 단초는 1889년 이태리 토리노였다. 마부의 무자비한 채찍을 맞으면서도 꿈쩍 않고 있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니체는 울부짖었다.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 그 뒤 니체는 정말 바보처럼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도, 느낌도 글도....니체를 죽을 때 까지 간호한 사람은 그의 누이였다.
영화‘토리노의 말’은 그런 니체의 예화를 차용한다. 말이 어느 날 갑자기 꿈쩍도 않기 시작한 것이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처럼, 혹은 이상의 시 오감도처럼 영화는 같은 동작, 같은 장면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한다. 라벨의 볼레로, 하나의 리듬과 두 개의 주제가 요설처럼 단조롭게 반복하지만 막상 음악이 끝났을 땐 귀가 먹먹할 정도로 엄청나게 다채로웠다는 느낌. 극단적인 단조로움이 오히려 수많은 인상을 야기하는 모순. 나는 이상의 시, 제1호 오감도를 생각한다.
황무지 위에 지은 집, 신은 엿새 동안 해와 달과 별, 나무와 물고기, 사람까지 만들었지만 황무지 위에 지은 집에 사는 부녀는 엿새 동안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말이 마굿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장화를 벗고 옷을 벗고(그것조차 아버지는 제 손으로 할 수 없다. 한 손을 못 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일은 딸이 한다) 바깥 모습을 창문으로 구경할 뿐이다. 죽음보다 더 지독한, 반복이 주는 권태, 엿새 동안 먹는 것은 씁쓰레한 술이거나 삶은 감자뿐이다. 몇 사람이 찾아오고 우물이 갑자기 마르고 그래서 새로운 곳을 ‘한 번쯤’ 찾아가지만 그들에게선 그 어느 곳도 있을 곳이 없어 되돌아온다. 신은 엿새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창조했지만 그들의 엿새는 점점 모든 것을 잃어만 간다. 물도 그치고 불도 꺼지고 바람조차 그친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반 창조론처럼 꺼진다.
烏瞰圖 詩第一號
이상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