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생존자
밤새도록 비바람이 몰아치며 파도가 미친 듯이 날뛰던 바다가 아침 해가 동녘 수평선에 떠오르자
언제 풍랑이 일었느냐는 듯 잠자는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해변에 부서진 배 조각들이 널브러졌고 판자와 부러진 돛을 잡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친 사람들이
기진맥진 해변에 쓰러져 있다가 하나둘 일어났다.
강진에서 스물네명이 탄 배가 난파되며 목숨을 건진 사람은 단 여섯명밖에 되지 않았다.
여인도 한사람 있었다.
남자 다섯과 여자 하나, 그들은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여자는 목을 놓아 울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나이 지긋한 선장이 해변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가 운 좋게 목숨을 건졌지만, 앞으로 살아갈 일도 만만찮을 거요.
해변에 떠다니는 잔해 중에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건 모두 건져 올립시다.
특히 먹을 것은 쌀 한톨이라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포에 떨던 남자들이 일제히 바다로 들어가고 여자는 첨벙첨벙 옷가지를 챙겼다.
그 와중에도 남자들 시선은 바닷물에 착 달라붙은 여자의 몸매에 쏠렸다.
몸의 굴곡으로 봐서 삼십대 초반이요, 차림새나 얼굴을 봐서 사대부가의 맏며느리 같은 귀부인이다.
처서가 지난 초가을이어서 저녁나절이 되자 서늘했다.
불행 중 다행, 오후 내내 젖은 부싯돌로 애를 쓰던 선장이 마침내 불을 만들었다.
바닷가 넓적한 바위 위에 불을 피우고 여섯이 빙 둘러앉아 건져 올린 물통의 물과 육포로 저녁을 때우고
하룻밤을 새웠다. 이튿날, 선장이 섬을 한바퀴 돌아오더니
“이 무인도는 보잘것없는 섬이요. 이제 건져낸 식량으로는 한달 살기도 빠듯하오.
구조선이 올지,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를 일이니 힘을 합쳐 살아갈 궁리를 해봅시다”라고 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에선 우선 물을 찾는 게 급선무다.
남자 다섯이 섬을 샅샅이 뒤져 운 좋게 옹달샘도 찾고 선장은 동굴도 찾았다.
바닷물에 젖은 쌀로 밥을 해 먹고 나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마른 풀을 모아와 동굴 바닥에 깔았다.
선장이 자연스럽게 두령이 돼 하나하나 질서를 잡아갔다.
기역(ㄱ) 자로 꺾어진 동굴은 꽤 깊어 얼추 서른자는 됐다.
맨 끝에는 홍일점 호실댁이, 입구 쪽에는 남정네 넷이,
그리고 꺾어진 중간에는 호실댁을 지키기라도 하듯 두령인 선장이 자리 잡았다.
선장만 돌아앉으면 호실댁은 마음대로 옷을 벗고 입을 수도 있게 칸막이가 된 셈이다.
선장은 건져 올린 그릇 중에서 하나를 골라 호실댁 요강으로 마련해줬다.
어느 날, 오 사범은 찬 바닷물 속으로 자맥질을 해 소라 열두어개와 전복 한개를 따왔다.
전복을 선장에게 바치자 선장이 먹기 좋게 칼질을 해서 호실댁에게 건넸다.
먹을거리는 모두 동굴 끝 호실댁 방에 두고 선장이 통제했다.
선장이 안동소주 호리병 하나를 꺼내 삶은 소라 안주에 남정네 다섯이 술판을 벌였다.
청나라로 가던 무역선의 승객 네사람은 모두 점잖아 술자리는 화기애애했다.
하 대인은 청나라에 경면주사를 사러 가던 길이요,
이 진사는 유학을 공부하러 가던 학자요,
정 의원은 침술을 배우러 가던 의원이다.
소라와 전복을 따온 오 사범은 태극권을 배우러 가던 무술인이다.
김 대감의 셋째 며느리인 호실댁은 당나라 왕실에서 새어나온 비취노리개를 사러 가던 길이다.
그날 밤, 술자리가 파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잠에 빠졌는데,
선장과 호실댁은 끝없이 얘기꽃을 피우다가 호실댁이 흐느끼고 선장이 달래는 듯하더니
둘이서 술 마시는지 캬~ 소리도 났다. 파도소리에 깨끗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선장이
“우리가 죽을지 살지 모르는 판에 체면은 무슨…”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부스럭거리다가 숨소리가 가빠지고 호실댁의 자지러지는 감창소리도 파도소리와 뒤엉켰다.
입구 쪽 네사람은 자는 척했지만 한사람도 자지 않고 귀를 세우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네사람의 시선은 일제히 호실댁과 선장에게 쏠렸다.
‘무슨 일이 있었어?’라는 듯. 선장은 뻔뻔한데 호실댁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오 사범, 물을 떠 와서 아침을 지어야 할 것 아니야.”
선장이 명령조로 말하자 두손을 허리춤에 놓은 오 사범이 두눈을 가늘게 뜨고
“내가 당신 하인이야? 오늘은 당신이 한번 해봐”라고 소리쳤다.
오 사범이 달려들자 선장은 “어어… 나이도 어린 사람이…” 하며 말끝을 흐렸다.
오 사범은 젊은 데다 무술인이라 멱살잡이라도 하면 일합에 선장이 방바닥에 패대기쳐질 것은 뻔한 일이다.
위풍당당하던 선장의 위엄이 쥐구멍 속으로 처박힌 셈이다.
바닷물이 차가워졌는데도 오 사범은 자맥질을 해서 전복을 따내고 문어도 잡아올렸다.
바위가 병풍 두른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 사범이 바다에서 나오자 따듯하게 데워 김이 나는
물수건으로 벌거벗은 오 사범의 알몸을 닦아주는 사람은 호실댁이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바위가 삼방을 막아주는 멍석 한장만 한 백사장에 호실댁 치마를 펼쳐 깔고
아랫도리만 가린 오 사범과 속치마만 걸친 호실댁이 문어와 전복 안주에 잔을 부딪쳤다.
선장이 오 사범의 도전에 꼬리를 내림으로써 두령으로서 권위를 잃자 홍일점 호실댁은 티가 나게
오 사범에게 기울어졌다. 바닷가 병풍바위 속 한평 남짓한 백사장이 그들의 밀회장소가 됐다.
오 사범은 더는 자맥질을 하지 않았다.
물은 더 차가워졌고 전복과 소라는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따기 어려운 것보다는
호실댁에게 더 호감을 사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은 오 사범의 오판으로 드러났다.
호실댁이 오 사범의 병풍바위 동행 요청을 거부했다.
오 사범이 다시 바다에 들어가 깊이 잠수하여 전복을 따 호실댁에게 바치자 호실댁이 움직였다.
호실댁의 속내가 드러났다.
선장을 두령 자리에서 끌어내린 오 사범의 사나이다움보다 전복을 더 좋아한 것이다.
하루에 백리를 헤엄칠 수 있다는 노루 한마리가 이 무인도에 들어왔다.
옹달샘 옆에 잠복해 있다가 노루를 잡은 사람은 선장이다. 그날이 추석날이다.
그날 밤 여섯사람은 배가 터지게 육식을 하고 안동소주를 두 호리병이나 마시며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보름달이 두둥실 떠오른 동굴 밖으로 나온 선장이 바닷가에서 소피를 보고 바지를 추스르는데
호실댁이 따라나와 팔짱을 꼈다.
두사람은 말도 필요 없이 똑바로 병풍바위로 가 훌훌 거추장스러운 걸 벗어던지고 한데 엉켰다.
거의 한달 만의 재결합에 선장은 감격했다.
살아서 돌아갈지 이 무인도에 뼈를 묻을지 모르는 깜깜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남정네들의 종족보존 본능을 자극했다.
체면이고 뭐고 던져버린 발정 난 수컷 다섯은 오로지 호실댁 치마 벗길 궁리만 했다.
정 의원이 절벽 사이에서 백하수오를 캐와 호실댁에게 바치자 그녀는 눈짓을 보냈다.
정 의원이 먼저 병풍바위에 가 있자 호실댁이 뒤따라왔다.
한바탕 거친 일합을 치르고 정 의원이 바지를 추스르며 동굴로 돌아가자
호실댁은 나른한 몸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지난 일을 생각했다.
‘남편이란 작자가 이 여자 저 여자 치마를 벗기며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요즘 저승에서 나를 내려다보면 방방 뛰겠지’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동굴 속에 질서가 잡혔다. 절대 권력을 움켜잡은 사람은 호실댁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옥문에서 나왔다.
호실댁은 여왕벌이요, 남정네 다섯은 일벌이다.
동굴의 기역(ㄱ) 자로 꺾어진 지점에 마른 풀잎을 쌓아 칸막이를 만들고 작은 문은 난파선의 판자로 만들었다.
기역 자 동굴이 방 두개로 나뉘었다. 안방은 여왕벌이, 문간방은 일벌 다섯이 오글오글 비좁게 살았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쌀이다 육포다 소금·고추장 등 난파선 잔해에서 건져낸 식량은
안방의 호실댁이 차고앉았다. 곳간 열쇠를 찬 셈이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지나자 바깥 날씨가 싸늘해졌다.
달콤한 섬다래를 한바가지나 따 온 이 진사에게 보답하려고 병풍바위로 가려던 호실댁은
그를 제 방으로 불러들였다. 감창이 옆방으로 좀 새어나간들 그게 대수랴.
서로 그렇고 그런 걸 다 아는 사실인데.
일벌들이 여왕벌로부터 하룻밤 선택받으려면 먹을 것을 구해 바치는 것뿐인데
북풍한설이 몰아치니 척박한 무인도에서 구할 것이 없었다.
상강 때 섬다래를 얻어먹고 시혜를 내린 후 보름이 지난 입동까지 아무 공물이 들어오지 않자
호실댁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공물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시혜를 베풀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어느 날 밤 호실댁은 오 사범을 제 방으로 불러들였다.
오 사범이 호실댁 방문을 빠끔히 열고 머리만 들이민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날이 추워 자맥질을 못해요.”
오 사범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호실댁이 오 사범의 상투를 잡아당겼다.
“누가 전복 따 오래?”
호실댁이 오 사범을 덮쳤다.
힘들게 일을 치른 오 사범에게 호실댁이 육포와 볶은 콩을 주자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역전이 됐다. 먹을 것을 받고 치마를 벗던 호실댁이 먹을 것을 주고 바지를 벗겼다.
점점 줄어드는 양식에 밥그릇도 줄어 모두가 주린 배를 움켜잡고 목숨만 이어가는 판이라
종족보존 본능은 쑥 들어가고 자기보존 본능만이 할딱거렸다.
외딴 무인도에 눈이 덮이고 삭풍은 귀를 도려냈다.
양식은 바닥을 드러냈다. 하루 한끼 밥 세숟갈이다. 식량 통제권을 쥔 호실댁은 아직도 오동통했지만,
수컷 넷은 피골이 상접해 반송장이나 다름없고 그나마 사람 몰골을 한 오 사범은 사육당하고 있었다.
결국 오 사범도 길게 가지 못하고 내팽개쳐졌다.
망망대해 무인도가 말없이 북풍한설을 맞고 있었다. 강진현 전라병영에서 수색 군선을 풀었다.
연기를 보고 군선이 배를 대어 동굴로 들어왔다.
삐쩍 마른 남자 다섯이 벌레처럼 기어나오며 한사코 수군들이 굴 속으로 들어가려는 걸 막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수군들이 꺾어진 굴 속으로 들어가다가 놀라서 자빠졌다.
바닥에는 뼈가 흩어져 있고 솥뚜껑을 열자 아직도 팔 하나가 남아 있었다!
최후의 생존자 다섯을 구출해 강진으로 돌아간 수색 군선 선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무인도에 표류한 다섯사람만 살아남았고
여자 하나를 포함한 열아홉사람은 난파선과 함께 수장됐다.” 하더란다.
첫댓글 재밋네요
잠시 즐기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