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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주보에 본당이 주관하여 일본 성지 순례를 간다고 나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 평생 어찌 성지 순례를 가겠냐 싶어 ‘좋다, 좋아’라는 말이 입에서 연거푸 나온다. 옆에 있던 어머니께 말했다.
“2인 1실이니까 엄니하고 나하고 가면 딱 되겠네요. 아마도 이번 성지 순 례는 저와 엄니를 위하여 기획된 거 같으니 우리가 신청 안 하면 되겠수 까?”
얼마 전에 다리를 다쳐 옳게 걷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수학 여행 가듯이 열을 내니까 어머니도 마지못해 신청을 해주셨다. 어머니는 신청은 하셨지만 내가 갈 수는 있을까, 가서 또 남 피해주지 않을까 계속 걱정이 태산(泰山)이었고 적잖은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셨다.
4월 5일 새벽에 출발했다. 어머니는 제대로 속이 타 문드러지고 나는 처음 소풍 가는 초등학교 새내기처럼 가기 일주일 전부터 설레기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늘 밝은 표정을 지녔지만 해외 성지 순례 간다는 사실에 더 들떠서 입을 못 다물이고 입이 귀에 걸렸었다. 누군가 이런 나를 봤다면 ‘바보’라고 했을 게 틀림없다.
대구 상인 성당 앞에서 버스를 타고 김해 국제 공항으로 갔다. 가이드가 신부님으로부터 커피를 건네받고는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라 감동 받았다고 신부님이 참 따뜻하다고 칭찬 한 줌 던지셨다. 다음에 이어진 가이드의 경험담도 내 마음을 흔들었다.
“1위의 불편 님은 누구일까요? 제 경험에 따르면 차 안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님이에요. 왜냐하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들은 제 발이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시간 여 만에 일본 후쿠오카 국제 공항에 다다랐다. 입국 절차가 까다로웠다. 몸에 철과 쇠를 모두 빼라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지나가니, ‘뚜르뚜르. 뚜뚜’ 하고 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몸에 금붙이나 액세서리 하나 없는데 왜 걸렸지?’ 싶었다. 무릎에 인공 관절이 범인이었던 거라서 ‘하하핫하’하며 한참을 웃기도 했다.
검색대를 빠져 나올 때 내 안경의 테가 떨어졌다. 이를 어쩌나? 나는 불의의 사고로 한 쪽 눈을 잃어서 한 눈으로 보는데다 보이는 한 눈도 안경이 없으면 까막눈인데……. 옆에 앉아 계신 소피아 수녀님이 테이프로 붙여 주셨다. 사람이 어딜 가도 죽으란 법은 없는가 보다. 어쩌면 이도 저 위에 계신 분의 뜻인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안경이 내려와도 손도 대지 못하고 안경을 신주 모시듯이 해야만 했던 웃슬픈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 일 덕분에 수녀님과 마음 속 깊은 진심어린 얘기도 나누고 단번에 친해질 수 있었으니, 이거야말로 ‘불행 중에 얻은 다이아몬드’라 할 만 했다.
미우라마치 가톨릭 성당에서 동행한 우리 상인 성당 최재영 시몬 신부님의 집전으로 미사에 참례했다. 계단을 오르려니 힘들어서 몇 계단일까 하나하나 세어보았다. 78계단을 올라야 했다. 또한 약간 걱정스러운 게 있었다. 전체적인 성당의 외관이 옆으로 기울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참으로 예쁜 성당이었다. 아름다운 성당 랭킹 10위 안에 든다는 게 그저 하는 말이 아니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1500년부터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교류가 왕성했다고 전해지는 항구 도시인 히라도에서 회와 초밥, 각종 해조류로 맛난 아침을 먹었다. 개인적으로 바다회를 죽도록 좋아하여 ‘임자 만났다’면서 맛나게 먹었다.
이키츠키섬으로 이동하여 이키츠키 고래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내가 서너 살 먹은 애도 아닌데, 바다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모두 박진감 넘쳐났고 섬칫하기도 하였다.
해안 마을 소토메로 갔다. 소토메의 상징이며 1882년에 도로 신부님의 설계시공으로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츠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영세 받은 지 27여 년 되었다지만 아는 것도 없고 엄마 손 꼭 붙잡고 주일 미사만 빠뜨리지 아니하고 다니는 발바닥 신자이다. 여기에는 물론 내가 신청하여 오긴 하였지만 미사도 봉헌하고 차 안에서 이동할 때에는 대중가요나 트로트 틀어놓고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게 아니라 묵주 기도로 내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내 마음 속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하였으니, ‘감사하고 기쁘다’는 이 두 말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매니저가 곧 머물게 될 호텔에서는 아쉽게도 ‘금연’이라고 얘기를 하자, 흡연자인 어느 형제님이 ‘그라마 재떨이 들고 가마 되겠네, 뭐!’라고 답을 하는 바람에 모두 한 번 큰 소리로 웃기도 하였다.
일본에는 자동차, 특히 택시가 장난감인 양 작았다. ‘지진’이라는 자연 재해 때문인지 집들도 다 작았다. 고속도로를 지날 때에는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눈의 피로감도 씻어주고 너무 너무 좋았다. 벚꽃 나무가 간간이 보이기도 하였으나 한국보다 못 해서 아쉽기는 하였다.
일본은 선진국으로 경제 대국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연도 두루두루 많이 살아있는 나라라는 걸 이번 성지 순례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일본은 모든 게 편리하고 앞서가는 문물로만 가득찬 나라라고만 생각했었다. 거리에는 모두 번쩍번쩍 하기만 할 뿐이라고만, 이것 밖에 볼 게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산에는 불난 데 하나 없음은 물론이고 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자연 그대로의, 천연을 그대로 잘 살려둔 한 번 와서 살아보고픈 나라였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인본인들은 어떤가?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하고 살가웠다. 언제나 친절하고 소박한 데다 작은 걸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일본인이다. 어딜가나 언제나 정(情)으로 살아가는 한국인보다 더 했다면 더하지 못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동안 임진왜란 때문에 일본, 일본인이라면 별로 좋지 않게 여겼다. 그런 선입견이 확 트러졌다. 그러나 신(神)을 좋아하는 일본인 특유의 민족성 때문에 간간이 보이는 납골당은 보기 싫고 성가셨다. 기복 신앙이 강한 탓이리라.
한국과 다른 것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고 자주 접했던 것이 있다. 자동차에서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어서 차를 탈 때마다 헷갈렸다. 화장실에서 좌변기 물을 내릴 때에도 아래에서 위로 올리는 것이 달랐다. 한국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누르지 않는가?
물론 버스 기사는 일본인이었다. 기사님과 가이드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가이드가 ‘미투’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여가 한국은 아이지만, ‘미투’라 카이 겁나네.”
이 한 마디에 신부님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사라졌다. 신부님은 늘 엄숙하고 농담 농자도 모르고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처럼 바른 소리만 해댈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생각 밖으로 굉장히 재미있고 위트 넘치는 가까이 하기에도 그다지 멀지 않은 분이셨다.
가이드가 과자를 한 웅큼 내어 나에게 주셨다. 어린이처럼 천진하게 좋아하며 입을 벌리고 하나를 집어 넣으려는 찰나에 옆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이 상황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속상했다. ‘어떻게 건진 건데…….’ 하고는 어머니 바깥 구경하는 틈을 타 조곤히 얌전스레 공주같이 먹었다. ‘원래 훔쳐 먹거나 몰래 먹는 것이 더 맛있다’는 어릴 때의 우스갯 소리가 떠오르는 즐거운 순간이었다.
기독교 소설 [침묵]의 저자인 ‘엔도우 슈샤쿠’의 문학 기념관 앞에서 단체 사진 촬영을 하였다. 눈치코치 없이 나는 선창하기를 ‘개구리 뒷다리’하였다. 일반 관광이면 괜찮지만, 이 자리는 성지 순례인데 신자들에게 미안해서 내가 내 손등을 살짝 꼬집었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결혼하는 날에 빗님이 오시면 부부가 잘 살고 좋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여행길에 빗님이 오시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더군다나 물 건너 해외에 왔는데, 우리 성지 순례 팀은 도통 운이 없는지 빗님을 만나고 말았다. 꽃피는4월에 눈까지 만났다. 봄여름 옷만 준비해 갔다가 추워서 혼났다.
일본 제품만 파는 면세점에서 신부님이 수녀님에게 면세점에서 구입한 칼을 선물이라 주면서 유머 있는 말을 건네셨다.
“여서 우리 인연 끊고, 한국에 가서 다시 인연 맺어요.”
한국에서의 근엄하고 딱딱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부드럽고 유머도 있고 센스 넘치는 신부님이다.
새로 안 사실(事實) 가운데 하나는 일본은 술은 꼭 한 잔씩 판매한다는 거였다. 술은 기내에 들고 가지 못하므로 뱃 속에 다 넣어가라는 가이드의 재미있는 말도 놓칠 수 없었다.
사흘 째 되는 날이다. 일본과 우리 나라는 시간대가 동일하여 시차가 없다. 그래서 마치 한국의 집에서 지내듯 잘 적응하였다.
운젠으로 이동했다. 지금도 하늘에는 허연 수증기가 솟아오르며 유황 냄새가 후각에 민감하지 못한 내 코까지 맹공격을 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을 ‘운젠 지옥’이라고 한다니 직접 가지 않은 이들도 가히 여기를 짐작하고 남으리라 생각된다. 여기 운젠은 화산과 지옥 온천의 흔적이 서린 땅이다. 내가 걷기에 운젠 성당이 거리가 조금 멀어서 혼자만 택시를 타고 갔다. ‘운젠 지옥 성당’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천국을 체험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 마음이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찼으며 4월에 웬 눈이 내리고 있다. 봄이라고 반팔 티셔츠만 준비해 가 후회막심이었다. 그런 가운데 샌달을 신은 수녀님을 보니 ‘춥다’는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웃슬픈 일도 있었다. 운젠 지역은 예전 후겐산의 화산 용출로 용암이 바다까지 흘러내리는 재앙을 겪기도 했다. 운젠지옥 일대에는 유황 온천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어 1930년대에 일본 최초로 지정된 사연이 있는 곳이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이름이 같은 ‘오바마 마을 온천’도 있다. 최장 길이를 자랑하는 해변가 족욕탕에는 애완견 목욕탕도 있어 내가 속으로 ‘개팔자가 상팔자네. 하핫하’하며 짐짓 웃었다.
호텔에서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식당 직원이 부패식이라 걸으면서 담기 힘들다고 바퀴 달린 차를 주시며 만국 공용어 귀여운 미소로 권했다. 일본인이 친절 빼면 송장인 걸 모르는 바 아니오나 내가 몸소 겪으니 그 감동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일본 제품만 파는 데서 신부님이 젓가락을 사오셔서 우리 모두에게 선물해 주셨다. 사실은 우리 신자들이 신부님과 수녀님에게 선물을 드려야 하건만, 순서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멋짐이 폭발하는 신부님과 수녀님이다.
이번 성지 순례의 마지막 날, 아침에 일어나서 아쉬워서 아쉬워서 발을 동동 굴렸다.
나가사키에서 오우라 천주당을 둘러보았다. 팔각형의 탑신을 가진 눈에 띄는 돌층계를 끼억끼억 힘주고 하나하나 올라가야 들어갈 수 있었다. 니시자카의 언덕에서 순교한 26인의 성인들을 봉양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교회로, 1864년 프랑스 신부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국보로 정해져 있으며 스탠드 글라스에서 발하는 아름다운 빛들이 마리아상을 장엄하게 비추는 조용하고 경건한 교회이다.
나가사키, 원자 폭탄이 투하된 슬픈 도시였다. 산등성에 마을이 있었다. 그래서 현재는 평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누구에게서도 자기들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라는 걸 인식하는 사람은 눈곱도 찾을 수 없었다.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신부님이 케익과 술잔을 들고 오셨다. 금혼식(金婚式)을 맞은 형제자매가 있어 축하해주려는 거였다. 모두 잔을 들고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담아 건배하였다.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었다. 이럴 때 신자들이 가만 있을 리 없었다. 입이 건질건질거려 다들 목청껏 외쳐댔다.
“뽀뽀해, 뽀뽀해!”
신자들의 성화에 못 이긴 나머지 그냥 살짝도 아니고 진지하게 찌인하게 뽀뽀하셨다. 모두 물개박수로 화답했다.
성지에서 순례도 영광스럽게 잘 하고 금혼식 축하연에서 그 어디서도 보기 힘든 뽀뽀하는 장면까지 실시간으로 보았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복을 받고도 받아 흘러 넘칠 지경까지 왔다. 이 모든 게 저 위에 계신 아니, 우리 마음에 계신 분의 뜻이요, 그 분의 은총에 따른 것이리라.
내 생애 처음으로 일본 성지 순례를 마치고 후쿠오카에 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빗님이 오시고 때 아닌 눈까지 오셨었다. 우리가 돌아가려고 하는 오늘은 거짓말처럼 날씨가 화창하다. 신부님을 비롯한 신자들이 웬걸 화창한 날씨 때문에 분통이 터지는지 한 마디씩 던졌다.
“누구 놀리는 것도 아이고, 이기 뭐꼬! 우리가 갈라 카이 와이래 날씨가 좋 노!”
내가 참말로 초등학교 때 소풍가는 날 비가 와서 분통이 터진 일은 있어 봤지만 오늘처럼 날씨가 눈에 띄게 화창하고 맑아서 분통 터져본 일은 없었다. 나뿐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다들 너무 화창한 날씨 때문에 약간 삐쳐 있었다. 이 때를 그냥 넘기지 않는 센스 넘치는 가이드의 웃긴 일화가 빛을 발했다. 그 얘기인즉슨, 불교 신자였던 가이드가 천주교 성지 순례 길에서 “신부님! 공양하셨습니까?”라고 말실수를 했다고 했다. 다들 언제 우리가 삐친 적이 있었냐면서 “푸하하하!”하며 탤런트 최불암 씨를 흉내내곤 하였다.
일본에 와보니 이웃 나라임에도 ‘한국’과는 모든 게 다르니, 그 내용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일본의 거리에는 주차된 차가 한 대 없다. 있다 하더라도 작은 차뿐이다. 길에는 담배 꽁초 하나 없고 쓰레기 봉투도 안 보이니 무지 깨끗하다. 신발 벗고 맨발로 걸어 다녀도 될 만큼이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들에게는 양보와 친절이 몸에 배여 있다. 거리에는 ‘덴샤’라는 노면전차가 외국인인 나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개인주의가 팽배한 일본인들은 웬만해서는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일반 주택 창문을 보면 유리창에 커턴을 다 쳐 놓은 걸 볼 수 있다. 또한 집에 사람을 잘 초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처럼 가족이나 친구, 동창회에서 같이 여행가는 것을 매우 부러워한단다.
깜짝 상식이긴 하지만 알아두면 꽤 도움이 된다면서 주워 들은 게 있다. 일본인들의 얼굴에는 희노애락이 나타나지 않는단다.
한국인들과 쉽게 비교해보겠다. 한국인은 고스톱을 칠 때 좋은 패를 얻으면 그저 좋아가지고 입을 못 다물이고 코를 벌렁벌렁거린다.
일본 장례식장에 가면 땅을 치는 사람이 없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절대 울지 않는다. 이것은 몰인정하다고 해야 할지 어쩔 수 없는 국민성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쬐금 웃긴 비교를 한 가지 해본다. 한국에서는 나만이 가진 것에도 모두 공유한다. 예를 들자면 ‘내 마누라’, ‘내 엄마’, ‘내 아빠’가 아니라, ‘우리 마누라’, ‘우리 엄마’, ‘우리 아빠’이다. 강한 공동체 정신이 불러온 습관이라고 보여진다.
일본에서는 관계 형성이 어렵다. 직설적인 표현이나 예․아니오의 정확한 표현을 하지 않고 우회적 표현을 한다.
일본인들은 오래 된 것을 좋아하고 가업이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일본에서 만든 음식들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반면에 바로 이웃해 있는 한국에서는 요리할 때 고춧가루를 많이 쓰는 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일본인들이 원래 매운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맵게 요리하는 음식점은 망하기 일쑤라고들 한다.
이번 성지 순례의 마지막 날이다. 불가능을 모두 가능하게 만드신 하느님 덕분에 3박4일의 여정도 잘 이루었다. 내게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기적이란 본디 그냥 하늘에서 푹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런 바람을 가지고 그에 마땅한 노력을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가고 싶다는 바람만 있었다면 감히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게 아니라, 나도 불편한 몸이지만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하려고 애를 썼고 복이 많게도 함께 해준 사람들이 있어 기적(奇跡)을 선물 받았다.
아유감사해^^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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