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태 전 삼보 컴 회장을 어떤 사석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이용태 회장(전 삼보 컴퓨터 회장)이 우리나라 IT 산업을 이만큼이나마 키워 온 개척자 정신은 기억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을 건넸더니...."우리나라에서 실패한 기업인/경영인은 아주 빨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다....."라는 말이 되돌아 왔다.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우리 나이 올해 77세....
경북 영덕 산골에서 독학으로 검정고시 패스하여 당시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에 수석 입학(서울대 전체 차석 합격), 대학 2학년 때부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우려 당시 장안 최고의 영수학원이었던 EMI 학원의 최고 인기 수학강사가 된다.
물리학과 동기생들은 대학 졸업 후 조기 유학을 떠나는데 그는 나이 30이 넘어서야 미국 유타대학원 이태규 박사(물리화학 전공, 일본 쿄토대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이학박사)가 교환교수로 가 있던 유타대에서 미국 과학재단 후원으로 신규 연구 프로젝트를 따 낸 연구 사업에 분자간 운동역학의 수학/물리학 모델 방정식 수립하기 위해 연구 조교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이태규 박사로부터 수학/물리학에 뛰어난 연구 조교 한 사람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 한양대 대학원장 한상준 박사가 추천한 인물이 바로 이용태 전 삼보 회장이었고 당시 물리학과 출신으로 수학에 가장 뛰어났던 사람이 이용태 였다. 그는 결국 그로부터 6개월 후 미국을 방문한 한상준 박사가 보는 앞에서 이태규 박사를 모시고 당시 화학관련 연구 프로젝트에 멋지게 분자간 운동역학 방정식 수립을 수학/물리학 모델의 방정식을 이용하여 해명하므로써 명 프레젠테이션을 하여 추천자인 한상준 원장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용태는 학부시절 학원 수학강사 강의 부담 때문에 서울대 물리학과 강의 출석 기준 요건에 다소 미달 된 면이 있었고 한상준이 그를 이태규 박사 연구 조교로 추천하였지만 이 점이 다소 마음에 께림직 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물론 그는 물리학과 졸업시험에 거뜬히 패스하므로써 이 핸디캡을 극복하였다.
후에 그가 서울공대 강사로 나서 역학 강의를 할 땐 워낙이 뛰어난 수학 실력(주로 미분방정식?)으로 명강의를 펼치는 바람에 당시 대학원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학계로 나갔더라면 아마도 우리나라의 파인만(Feynman, QED(Quantum Electrodynamics) 이론 정치화로196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20세기 가장 뛰어난 미국 이론 물리학 교수 중 한 사람, 칼텍 교수)이 되지 않았을까 나 나름대로 생각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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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가 문리대 물리학과에 입학 했을 때는 전 포항공대 학장이었던 김호길 학장등 쟁쟁한 당시의 물리학도가 같은 과에 있었고 이용태는 결국 미국 유학 가서 이태규박사 밑에서 통계역학(물리학)쪽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그가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조차 태동기에 있었던 컴퓨터 사이언스를 부전공으로 택한 것도 이 때였다고 한다.
귀국하여 KIST로 와서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 발전 계획에 참여하고 성기수 전 KIST 컴퓨터 전산 연구실장과 함께 쌍두마차로 초기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 발전 모형으로 성기수 박사(공사/서울공대 출신, 하버드에서 당시 동교 최단시간 내 석사/박사 학위 취득 기록)는 소프트웨어 일변도를 주장, 이용태 박사는 소프트/하드 웨어 동시 추진 전략이 팽팽히 맞서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다소 성기수 박사 쪽으로 기울어 지는 면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일각에서 보기론 성/이 두 박사가 어떤 의견합일의 일치점을 도출 해 냈더라면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의 보다 소프트웨어 중심/하드웨어 병행 전략이 더욱 탄력을 받으며 발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말 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용태는 그 후 데이타 통신 초대 사장, 전자연구소 부소장등을 거치며 삼보 컴퓨터(주)를 창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컴퓨터를 만들고 90년대가 시작하자 우리나라 최초의 초고속 인터넷 망 사업인 두루넷을 창업한다. 그러나 그 사업이 사업주체인 한전과 마찰이 생기면서 그는 결국 경쟁사와의 치열한 경쟁에 휘말리면서 두루넷의 경영난으로 이어지고 모기업인 삼보 컴에도 주름살을 주게 된다.
삼보 컴이 미국 휴렛 패커드등과 사업 협력을 모색하고 주로 중국 심양 공장에서 대규모로 HP 미국 시장 물량을 만들어 내는 세계 최대의 주문자 생산 표시 방식의 컴 생산 능력을 운영하다가 소형 고성능 노트북 브랜드의 미국 시장 진출로 HP와 알력이 생기자 HP가 괘씸죄를 적용, 주문선을 대만업체로 일거에 바꿔 버리게 되자 공장 가동률이 급격히 하강하며 경영난에 빠지게 되고 대규모 중국 제조 공장을 운영하던 대만업체와 가격경쟁에서 이겨내지 못하게 된다. 두루넷 경영난이 모기업에 까지 미치면서 가격 인하 경쟁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부도 위험에 처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법정관리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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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난 근 30년에 이르는 기업가/경영자 인생은 바로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의 태동, 이륙,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는 치열한 벤쳐 정신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루넷을 창업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일본 소프트방크의 손정의 등을 끌어들인 최초의 사람도 이용태였다. 따라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이 며칠 전 우리나라에 와서 향후 수년간 1억 7천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나선 것도 바로 이용태 전 삼보 회장과의 비지네스 연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할 것이다.
일부에서 이런 이용태를 그가 준 재벌에 못 미치는 사업규모를 갖고 재벌을 꿈꿔 온 잘못이 있었다고 폄훼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일견 타당한 비판의 일면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삼성, LG, SK등 재벌기업과 맞서서 그래도 컴퓨터 제품 하나로 고속 인터넷 망으로 사업을 벌이며 근 수십년간을 버티어 온 사업가는 이용태 전 삼보 회장이 유일하다 할 것이며 삼보의 전문 컴 제조 기술을 결코 폄훼 해선 안될 줄 안다.
그의 두루넷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초고속 인터넷의 만개가 우리 나라에 도래 했음을 결코 잊어선 안될 줄 안다.
이용태는 우리나라 각 부문 천재 열전에 끼일 수 있는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시골 고교 2학년 수료 실력으로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영재가 모인다고 하는 서울대 물리학과에 수석입학 한 것이라든지, 후일 개인 형편상 대학 물리학 수업 출석일수가 다소 부족했음에도 이를 극복 이태규 박사 연구조교로 발탁되어 불과 수개월만에 이태규 박사의 미국 정부 후원 화학 연구 프로젝트에 동참, 멋지게 분자간 운동역학 방정식을 도출 해 낸 실력이라든지.....
그는 경영, 교육(숙명여대 재단 이사장), 과학, 공학, 인문학(퇴계 도산학 국제 연구원장)분야등 다양한 분야에서 비범한 재능을 떨쳐보이며 한 시대를 풍미한 물리학 박사 출신의 기업인/경영인이었다.
바라건데 그의 남은 여생이 행복하게 영위 되고 우리나라 경제가 재도약 하며 IT 산업도 소프트웨어/하드웨어 공히 다시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는 날이 온다면 그의 우리나라 IT 산업 초기 개척자 정신의 높은 뜻이 죽지 않고 사는 훌륭한 결실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