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힘줄 같은 뚝심도 기약없는 전쟁을 이길 수는 없었나보다. 현대자동차가 지난 13년간 뚝심 하나로 일궈온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재 러시아 공장을 현지 업체에 매각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19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연산 23만대 규모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관리하는 ‘현대자동차 러시아 생산법인(HMMR)’의 지분 전체를 매각하는 안건을 승인했다. 매각 자산에는 연산 10만 대 규모의 옛 제너럴모터스(GM)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부지도 포함됐다.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위)와 GM 러시아 공장/사진출처:현대차, driver-news.ru
매각 대상 자산의 가치는 장부상 약 2,873억원에 달하지만, 현대차는 '상징적인' 금액 1만 루블(약 14만5천원, 러시아 언론은 로이터 통신을 인용해 77,67달러, 약 7천루블이라고 보도)에 HMMR을 현지에서 폭스바겐 자동차 딜러겸 위탁 조립 공장을 운영한 '아빌론(홀딩스)'의 자회사 격인 '아트 파이낸스'(러시아어로는 아르트 피난스·Арт-Финанс)에 넘기기로 했다. 대신 2년 안에 지정학적 상황(우크라이나 전쟁)이 안정되면 모든 자산을 되찾을 수 있는 '바이백 옵션'을 걸었다.
◇ 뒤늦었으나 최선의 선택
현대차의 매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너무 늦은 감도 없지는 않지만 해를 넘기지 않는 것도 다행스럽게 보인다. 전쟁의 여파로 지난해 3월부터 생산과 수출이 모두 멈춘 HMMR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HMMR은 지난해 2,301억원의 당기 순손실을 기록했고, 올해 상반기 순손실 규모도 2,270억원대다. 그러나 조금 더 일찍 결단을 내렸다면 '2년 바이백'이 '3년 바이백' 조건으로 좀 더 여유가 있을 뻔했다.
인수한 아트 파이낸스는 '복이 덩굴채 굴러들어온' 셈이다. 지난 5월 폭스바겐의 러시아 자산(칼루가 공장과 4개 자회사)를 인수한 아트 파이낸스는 '아빌론'의 외국 자산 인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현대차와 rbc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2010년 9월부터 가동을 시작한 현대차는 전쟁으로 공장 가동을 중단된지 1년 9개월 만에 매각 결정을 내렸다. 현대차는 전쟁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시장에서 가장 큰 자동차 생산업체 중 하나였다. 2021년 기준 연 23만 4천대를 조립했다. 그해 시장 점유율도 전체 2위(1위는 러시아 자동차 브랜드), 외국산 자동차 1위(37만7천600대 판매)였다.
그러나 지난해 2월 전쟁이 터지자 서방의 대러 제재가 발표되고, 부품 공급망이 막히면서 현대차 상트 공장은 멈춰섰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세계 유수의 자동차 제작사들이 서둘러 현지 공장(자산)을 헐값에 넘기고 러시아를 떠났지만, 현대차는 휴업을 반복하며 버텼다. 지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후 세계적인 주요 자동차 브랜드가 모두 러시아에서 철수할 때, 홀로 남아 기어코 '러시아 국민의 차'라는 타이틀을 따낸 경험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현지 언론은 시시때때로 러시아 정부와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고위 인사들을 인용해 매각설을 보도했지만, 현대차는 이를 일축하고 꿋꿋하게 버텼다.
◇ 푸틴 대통령도 안타까워한 현대차 철수
분위기가 바뀐 것은 지난 9월 데니스 만투로프(Denis Manturov) 부총리 겸 산업통상부 장관이 현대차가 '2년 바이백' 옵션을 붙어 자산을 매각할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면서 부터. 전쟁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러시아 당국의 매각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덴마크 맥주회사 칼스버그의 러시아 자산 '발티카 브루어리스'에 외부 경영진을 투입됐고(사실상 법정관리), 매각시 조건이 더욱 까다로워졌다거나, 크렘린이 서방 기업의 '자유로운 러시아 시장 철수'를 배제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푸틴 대통령도 지난 14일 기자회견겸 '국민과의 대화'에서 '자동차 값이 급등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서방 자동차 파트너들이 모두 철수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현대차마저 떠났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난 2010년 열린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차 공장 준공식에 직접 참석해 시운전까지 한 그였다(당시 총리)
현대차 측은 매각 승인이 난 뒤 "러시아 공장의 처리 방안을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아트 파이낸스에게 매각하는 안이 가장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아트 파이낸스는 지난 5월 독일의 폭스바겐 칼루가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사들여 이름을 'AGR Automotive Group'으로 바꾼 조그만 법인이다. 자본금은 겨우 10만 루블. 지난 2월 등록된 이 법인의 소유자는 '아빌론(홀딩스)'의 사장을 지낸 안드레이 파블로비치다. 그는 지난해 12월 아빌론 사장을 그만두고 이 법인을 설립했다.
폭스바겐 러시아 공장의 이름이 'AGR오토모티브그룹'으로 바뀌었다/사진출처:아빌론홀딩스 홈피
아트 파이낸스는 그러나 폭스바겐 러시아 법인과 4개 자회사(폭스바겐 애프터서비스 법인, 스카니아 리스, 파이낸스, 보험 법인)을 1억2천500만 유로(약 1천788억원, 추정)에 인수하면서 바이백 옵션을 배제했다. 나중에라도 돌려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 2년 바이백 옵션이 핵심?
현대차가 아트 파이낸스 측에 러시아 자산(공장)을 넘긴 것은 '장기 플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2년 바이백' 옵션이 핵심 조건이다. 러시아 시장으로 2년내 복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다. 기존에 판매된 차량에 대한 애프터서비스(AS)도 계속 제공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현지 자동차 전문 잡지 '잘룰렘'(За рулем, '핸들 그 이상'어라는 뜻)의 막심 카다코프 편집장은 "(지정학적) 상황이 진정되면 러시아 시장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현대차에게는 좋은 선택"이라며 "아빌론 측은 상트 공장에 남아 있는 7만대 가량의 자동차 부품으로 자동차를 조립해 엠블럼(브랜드)만 변경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7만 대 가량의 자동차를 조립, 판매하는 데 1년, 어쩌면 1년 반이 걸릴 수 있다"며 "그 사이에 지정학적 상황이 진정되면 현대차는 돌아올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차량 부품이 소진된 뒤, 폭스바겐 칼루가 공장을 인수한 '아빌론' 측이 현대차 공장을 어떻게 운영할지 궁금하다"고 했다. 현대차 공장의 시설 개조나 조립 시스템 재설정 등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차 상트 공장의 자동차 생산 모습/사진출처:현대차
현지의 다른 전문가들도 현대차 상트 공장이 1~3개월내 가동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바이백' 옵션이 없는 폭스바겐 공장이 시설 개조 등을 위해 2024년 3월까지 10개월간 가동을 멈추는 것과는 다른 일정이다.
바이백 옵션을 붙여 각각 1유로(약 1,400원)와 2루블(약 28원)에 러시아 법인을 현지 업체에 넘긴 일본 닛산자동차와 프랑스 르노자동차 공장은 이미 현지 자동차 생산에 활용되고 있다. 르노 모스크바 공장에는 모스크비치, 라다 등 러시아 브랜드 자동차가 조립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러시아 수출을 시작한 현대차는 2007년 현지 법인을 설립하고 러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건설한 게 대표적. 상트 공장에서 러시아의 혹독한 날씨를 고려한 현지 맞춤형 차량 '쏠라리스'(국내 브랜드 액센트)와 해외시장 모델인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크레타', 기아 '리오'(국내 브랜드 프라이드) 등을 만들어 팔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상트 공장의 가동 중단과 함께 현지 판매량도 곤두박질쳤다. 판매량이 지난 2022년 12만2천595대로, 전년 대비 67.5% 줄었고, 올해에는 경우 1만1천145대를 파는 데 그쳤다.
LG전자 루자 공장/사진출처:홈피
◇ 삼성과 LG전자의 선택은?
현대차의 자산 매각으로 삼성전자와 LG전자에게도 '선택이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석이다.
2008년 문을 연 삼성전자의 칼루가 TV‧모니터 공장은 현대차 상트 공장과 마찬가지로 지난해 3월부터 운영을 중단했다. 2006년 국내 가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 공장을 가동한 LG전자도 지난해 8월 TV·세탁기·에어컨·냉장고를 생산하던 '루자 공장'의 문을 닫았다.
두 기업은 “현재 진행 상황을 지켜보며, 향후 운영 방안에 대해 다각적으로 검토 중”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