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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국민 중 '열에 아홉'은 러시아가 점령한 자국 영토를 재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 독일 주간지 빌트암존탁의 10일 보도(우크라이나 여론조사기관인 '민주계획재단'의 조사 결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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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집권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이 10일 지방선거에서 우크라이나 4개 합병 지역을 휩쓸었다" - 현지 언론의 11일 보도.
1년 6개월여에 걸친 긴 전쟁으로 친(親)우크라, 친러시아로 갈라진 우크라이나 땅에서 거의 동시에 드러난 민심이다. 당연한 결과다.
러시아군이 진주하기 시작한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이는 친우크라 성향의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반러 감정이 강한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에서 '제 2의 삶'을 시작했는데, 그 곳에서 자칫 친러 성향을 드러내다가는 스스로 죽음을 부르는 일이나 다름없다. 소련 KGB의 뒤를 이은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인 국가안보국(SBU)이 러시아와 내통하는 스파이(반역자)를 잡기 위해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기 때문이다.
친우크라 성향의 주민들이 떠난 우크라 점령지역에는 당연히 친러 주민들만 남았다. 그 곳에서 선거가 치러진다면? 결과는 물으나 마나다.
현지 매체에 따르면 러시아 집권 통합러시아당은 러시아군이 장악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 자포로제(자포리자)주(州), 헤르손주 등 우크라이나 4개 점령지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모두 압승을 거뒀다. 헤르손주에선 통합러시아당이 74.86%를 득표(투표율 65.36%)했고, LPR에선 74.63%,, 자포로제에선 83.01%. DPR에서도 78% 안팎의 지지를 얻었다.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이 러시아에 편입된 뒤 발간된 러시아 연방 지도
개표가 가장 먼저 끝난 헤르손주의 마리나 자하로바 선관위원장은 "통합러시아당이 새 입법 의회 의석 36석 중 28석을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으로 일부 지역에서 투·개표가 어려율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됐으나, 결과적으로는 빗나갔다.
10일 러시아 전역과 우크라 4개 점령지역에서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주지사와 지방정부 수장 등 소위 '지자체 단체장'과 지방 의회 의원들을 뽑았다. 수도 모스크바에서는 세르게이 소뱌닌 시장이 76.4%의 지지(투표율 42.5%)로 재선에 성공했다. 소뱌닌 시장은 지난 2010년 10월부터 모스크바 시장을 장기 집권 중이다.
그 어느 때보다 9·10 지방선거가 주목을 끈 것은, 우크라이나 4개 지역에서 러시아 선관위 주도로 첫 선거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4개 지역 대표들은 지난해 9월 크렘린에서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 연방으로의 편입 문서에 서명했는데, 그 당사자들이 현지 주민들의 심판을 받기 위해 이번 선거에 나섰다.
데니스 푸쉴린 DPR, 레오니드 파세츠니크 LPR 수반은 전쟁 전부터 친러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지역을 이끌어온 인사이고, 예브게니 발리츠키 자포로제 주지사 대행과 블라디미르 살도 헤르손 주지사 대행은 러시아 정부가 임명한 대표다.
우크라이나 4개 지역 수장들이 푸틴 대통령과 연방 편입 문서에 서명한 뒤 만세를 부르는 모습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역 의회 의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각 지역을 대표하는 정부 수반으로 선출될 전망이다. 선거를 통해 점령지 4개 지역의 의회와 정부가 공식적으로 구성되는 셈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이번 지방선거는 점령지역이 러시아 연방 소속이라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군의 반격에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정치적 행사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러시아 지방선거/사진출처:스트라나.ua
우크라이나는 당연히 '선거 무효'를 외치고 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일찌감치 현지 주민들에게 선거 불참을 촉구하면서 투표할 경우,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뒤이은 "국제법을 위반한 가짜 선거"라는 주장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전쟁 와중에 치러지는 선거가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공정했을까?
투표소 곳곳에서 '사보타주'(비밀 파괴 공작) 공격이 보고됐고, 일부 투표소에선 수류탄이 발견됐다고 한다. 지난 8일에는 헤르손에서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공격으로 지역 선거관리위원회가 대피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엘라 팜필로바 러시아 중앙선관위 위원장은 브리핑에서 "헤르손 지역 선관위가 미사일 공격으로 안전한 비행장으로 옮겼다"고 밝혔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은 전쟁과 신종 코로나(COVID 19) 검역 등을 이유로 현장 투표일을 사흘(8~10일)로 늘렸고, 사전 선거를 8월 31일부터 7일까지 실시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사실상 열흘간 투표가 진행된 것이다.
9·10 지방선거를 통해 DPR은 기존의 '인민의회' 의원 90명을, LPR은 50명을 뽑고, 자포로제주는 새로 구성되는 '입법의회' 의원 40명, 헤르손주는 36명의 의원을 비례대표로 뽑았다. 지역 수반(단체장)은 새로 구성된 인민의회 혹은 입법의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된다.
러시아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따라 자포로제주와 헤르손주의 비례대표 후보들은 보안상의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테러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언론들은 현지의 유명 인사들이 적지않게 통합러시아당의 후보로 나섰다고 보도했다. 현지의 유명 변호사인 발렌틴 루빈이 헤르손주 통합러시아당 후보로 나섰고, TV 채널 '112'의 창립자인 빅토르 주브리츠키와 드미트리 타바츠니크 전 교육과학부 장관이 자포로제주에서 출마했다고 한다.
전자투표 이미지. 투표 참가에 감사드린다는 문구가 표시돼 있다/사진출처:스트라나.ua
이번 선거의 또다른 특징은 '전자 투표'(온라인 투표)의 확대 실시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 지방선거에서는 국가통합 행정 전산망인 '고스우슬루기'(Госуслуги)를 통해 전자투표 지역이 모스크바 등 25개 지역으로 확대됐다. 전자투표는 2021년 총선에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물론, 전자투표에 대한 러시아 야당 측의 불신이 만만찮다. 2021년 총선에서 전자투표 집계에 의해 당락이 뒤집힌 사례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당시 야당 측은 "모스크바의 일부 지역구에서 현장 투표에서는 승리했으나, 전자투표로 결과가 뒤집어졌다"며 "집권여당이 곳곳에서 승리를 빼앗아 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전시 중에 전자투표를 마냥 뿌리치기는 힘들다. 내년 대선이 예정된 우크라이나에서도 통합전산망 '디야'를 통한 전자투표의 도입을 검토 중이다. 전자투표는 전시에 유권자들의 신변 안전에 대한 위험을 줄이고, 집 떠난 난민들에게도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야당도 '부정 선거'를 우려하면서 전자투표의 도입에 적극 반대하고 있다. 향후 전자투표의 도입이 공식 발표되면, 우크라이나 정계에도 한바탕 파란이 일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