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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이런 잘못을 했다”고백록 (B).
- 교회의 과거 범죄 -
(오마이뉴스에서 퍼온 글입니다)
-03-08-04-
지난 3월5일 로마교황청은 중대 발표를 했다. 기독교 탄생 2000년을 맞아 기독교가 과거 2000년간 인류에 끼친 각종 해악을 자기 과오형태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교회의 과거범죄’라는 부제를 단 이 문건은 피로 얼룩진 십자군 원정, 중세의 각종 가혹한 형벌, 선교를 가장한 신대륙 원주민 말살, 교회의 유대인 학살 방조 등 주로 4부문으로 나뉘었다. 이는 개신교와 가톨릭이 분리되기 전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죄였지, 개신교의 범죄는 아니라고 개신교 한편에서는 잘라 말한다. 하지만 많은 교회사가 들은 이 같은 부정에 의문부호를 던지고 있다.
개신교는 분명 가톨릭에서 비롯됐으며, 종교개혁 이후 태동한 개신교 역시 인류에 끼친 과오가 적지 않다고 교회사가 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 같은 논란의 와중에서 기독계의 원로가 교회의 과거 범죄를 솔직히 고백한 책을 출간했다. 조찬선 박사가 ‘기독교 죄악사’ (평단문화사)라는 제목으로 최근 펴낸 책에는 과거 2000년간 교회가 인류에게 끼친 해악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저자인 조찬선 박사는 도쿄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신학대와 이화여대 등에서 교수를 역임한 한국 기독교계의 거목.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활동하던 조 박사는 은퇴 후 저술에 들어가 지난 98년 집필을 끝냈다. 한국 기독교의 거목이 교황청에 2년 앞서 기독교의 과오를 낱낱이 인정한 것이다. 조박사는 머리말에서 “인생 80을 넘겨서야 지난 2000년간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순교자의 자세로 할 수 있었다”며 “통렬한 과거 참회를 통해 교회가 예수를 진정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출간동기를 밝혔다.
이 책은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해 쓰였다. 영어 일어 라틴어에 능한 조 박사가 중세 교황청 시종의 일기, 미국 초창기 이민사 등을 참조해 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순한 교회 비판서를 넘어 정직한 문화인류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십자군 원정의 경우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교과서와는 그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 국내 교과서 대부분은 십자군 원정을 예루살렘 성지를 회복하려한 기독교도의 투쟁으로 그리고 있고, 이로 인해 동서 문물의 교류가 확대됐다고 규정짓고 있다.서양사가들의 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하지만 숨겨진 이면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성지회복이라는 명분아래 십자군은 회교도를 무참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1차 원정 당시 예루살렘 성안은 회교도의 피로 무릎까지 잠길 정도였다. 중세 회교권의 영웅 살라딘이 패주하는 십자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영토 확장욕에 젖은 교황의 탐욕으로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됐고,12세 내외 소년소녀들로 구성된 아동십자군은 매춘부나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각종 고문 형과 마녀사냥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끔찍한 종교재판이 계속되면서 16세기 스페인 인구는 2000만에서 600만 명으로 줄었다. 신앙고백의 한 형태로 시작된 마녀재판은 19세기까지 근 4백년이나 지속됐다. 마녀로 규정된 사람은 사지찢기, 끓는 기름에 튀기기, 끓는 납을 귀와 코에 붓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잔혹사 연구가인 미국의 콜린 윌슨조차 자신의 저서인 ‘사형백과’에서 중세의 마녀사냥을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나 극명히 보여준 형벌이라고 탄식했다. 조 박사는 성직자의 문란한 생활도 함께 지적하고 있다. 수많은 첩을 거느린 15세기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자신의 아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키 위해 딸을 매춘에 가담시키기도 했다. 중세 유럽을 휩쓴 매독이 교회및 상류층으로부터 급속히 전파됐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종교개혁의 아버지 마틴루터 역시 처첩을 거느렸으며 수녀와 사이에 자식을 낳기도 했다.
개신교인들의 인디오 살육 역시 씻을 수없는 죄악이다. 만화영화로도 제작된 포카혼타스 공주는 역사상 실제 인물이다.17세기 미국에 상륙한 영국인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절도를 일삼다 인디오들에게 사로 잡혔다. 당시 인디오 공주 포카혼타스는 사형위기에 놓인 이 이방인을 불쌍히 여겨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목숨을 부지한 이들 영국인은 뒷날 포카혼타스를 사로잡아 성적 노리개로 전락시킨 뒤 결국 매독으로 영국에서 객사하게 했다. 이들 서방이 복음과 신대륙 개척이라는 이름아래 학살한 인디언 수가 모두 2000만명이 될 것으로 저자는 추정하고 있다. 금세기에도 교회는 유대인 학살 방조,흑백차별,남녀차별 등의 과오를 범했다. 국내에서도 신사참배 협조, 유신체제 옹호 등 교회는 시대의 이단아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조 박사는 통탄하고 있다.
[미국] 기독교죄악사, 교회는 죄인을 만드는 곳인가? 2001년 3월 5일
오늘날 교회는 부흥회, 산상기도, 성경공부, 교회건축 등 교회행사에 온갖 정성을 다하면서도 교회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문제는 소홀이 하고 지엽적인 사소한 문제를 중요시하는 잘못된 교육을 하고 있는 듯 한 면들이 있다. 십일조를 바치고,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하여 많은 직분에 충실하면서 모범적인 교인이요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자타가 공인하고 마치 그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많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화를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주소를 함께 진단해 보자. K 집사는 옛 친구를 만나 맥주파티를 하나가 같은 교회 장로에게 우연히 발각되었다. 그 장로는 교회에서 암암리에 K집사를 가짜 집사라고 비난하였고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갔다. 그리하여 그 집사는 맥주한잔으로 평생가짜 신자로 몰려 장로 진급의 길도 막히고 또 위선자로 낙인찍혀서 가는 곳마다 암암리에 죄인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장로는 하루도 술 없이는 살지 못하는 술 고래였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숨어서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로라는 신분 때문에 위선과 기만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 사례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점은 맥주와 술을 경계하기보다는 위선과 기만이 교회라는 구조 속에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심각함이다.
오늘의 현실은 집사, 장로 그리고 목사도 교회라는 틀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위선과 기만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라는 조직 속에 속하기 위해서는 위선과 기만으로 성인군자를 가장하면서도 속으로는 평생을 죄의식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장로가 집사의 비리를 폭로하였을 때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아니면 교회라는 구조 안에 적응하기 위해서 양심까지 저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문제의 집사와 장로가 교회 바깥에서 살았다면 그들의 음주는 위선으로 가장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유명한 마틴 루터의 결혼청첩장의 내용을 소개한다.
"내 결혼식에 오소. 천사들은 폭소하고 마귀들은 울리라. 제일 가는 맥주나 한 통 가지고 오소"
심각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오늘날 교회는 주홍빛 같은 죄를 흰눈처럼 씻어주는 곳이 못되고 도리어 성도들을 평생 동안 죄인을 만드는 곳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지는 않는가? 교회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성도들이 기쁨과 화평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게 하기보다는 도리어 죄의식을 심어주고 죄인으로써 불안하게 살아가게 하는데 주력하여 온 것 같다. 그 증거의 하나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목이 터지게 통곡하며 죄를 회개하는 모습을 들 수 있다. 인간의 면죄를 위해서는 그런 기도가 필요하다고 누군가가 강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통성기도 시간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기도할 때는 대체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이나 혹은 "부족한 종, 이 죄인" 등으로 시작한다. 즉 성도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그리고 노예로 스스로를 전락시키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셨건만 그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는 어디로 가버리고 죽을죄인, 이라고 고백하고 통곡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가 성도들에게 죽을 죄인으로 살아가도록 죄의식을 심어 주었다는 증거로 보면 지나친 표현일까?. 죄의식을 강조하여 인간을 어둡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종교의 사명이 아니다. 또 인간들의 죄를 역설하여 사회와 인류의 말세나 종말을 예언하여 현세도피를 꾀하는 것도 잘못이다. 종교는 고민 속에서도 기뻐하고 억울한 처지에서도 인생을 감사로 살아가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과 보람을 찾아 현실을 극복하는 힘을 주어 사회를 밝고 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에게서 밝은 표정보다는 어두운 면을 더 많이 볼 수 있으며 죄의식에 사로잡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노예로 자처하며 새벽마다 통회의 눈물만을 숭상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신앙의 자세일까? 예수께서는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요15:15)라고 하였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친구로 믿고 기쁨에 넘쳐 미소 짓는 기도를 드린다면 그 기도를 받으시는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아니라 사랑과 보혈로 구원을 받은 백성으로 주님을 존경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로 모시고 삶을 즐기는 성도의 모습을 주님은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
그런데 그 기쁨의 도리를 버리고 매일 새벽마다 또 통성 기도 때마다 가슴을 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죄인을 부르며 통곡하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에 합당한가? 이 기쁨의 도리를 통곡의 도리로 왜곡시킨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교회인가, 성직자인가.
부흥회가 열리면 그때는 교회가 애매한 성도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드는 '즉석죄인대량생산공장'으로 변한다. 부흥강사는 성경을 펴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죄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전력을 다한다. 그때 사용되는 주 무기는 물론 하나님의 이름과 뜻이라고 은근히 공갈협박으로 위협한다.
이 공갈 협박에 넘어간 순진한 성도들은 스스로를 천하에 없는 죄인으로 자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죄의식이 없는 성도들도 군중심리에 이끌려 통곡의 소리는 더욱 높을 수도 있다. 여기서 성도들은 그들의 죄의식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만치 은혜가 넘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교회에서는 은혜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은혜로 죄의식이 깊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죄에서의 해방을 뜻하는 은혜가 아니라 반대로 죄의식을 심어주는 것에 우리도 모르게 익숙해져있는 것이 오늘날 신앙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죄를 사하는 곳이 아니라 죄인을 만드는 곳으로 변모한 오늘날 많은 교회들, 과연 이것이 교회의 정당한 모습일까?
[미국] 기독교 죄악사 2001년 2월 18일
성직자들이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하는 교회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관찰되고 평가될 뿐만 아니라 승자의 논리대로 기록되기 때문에 패자 편에서 보는 역사는 말살되거나 가려지기 마련이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세계사와의 관계에 있어 강자의 정의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위선의 역사’가 진실의 역사로 탈바꿈한 경우가 허다하다 하겠다. 본보 (기독저널)는 편견 없는 역사관에 입각하여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부끄러운 과거를 정확하게 조명하여 그 정확한 토대를 기초로 수많은 교회와 평신도들의 각성을 기대하며 ‘기독교 죄악사’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예식과 교리 면에서도 변질되어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를 안타까워하는 애통이 뜻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짓누르고 있다
질문: 교회의 존재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비둘기파는 사람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하시니 .”(요2:16)
“성전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19: 45-46)
백범 김구 선생은 “경찰서 열 개를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를 세우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하다”고 하였다. 백범의 말대로 교회는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 우리사회에 필요하고 유익한 존재인가? 혹은 그와 정반대로 사회에 해독을 끼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날 수 없이 많은 교회와 인적, 물적 조건을 갖춘 강력한 기독교라는 집단이 인류사회에 얼마나 크고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가? 분열, 대립된 인류사회를 서로 사랑하고 돕는 화목한 사회로 통일되게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독선과 차별을 제도화하고 분열과 대립분쟁을 장려하며 격화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초대교회는 사랑과 평화와 행복과 믿음이 충만하여서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넘쳤다고 한다. 따라서 그와 같은 교회가 서는 곳의 사람들은 교회의 밝은 사랑의 빛으로 마음과 신앙에 변화를 받고 사랑, 화평, 행복, 희생, 봉사의 정신으로 기쁨이 넘치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은 어떠한가? 사랑으로 충만했던 초대교회가 약 2000년 동안 성장해 오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고 변모되었으며 예식과 교리 면에서도 변질되어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이를 안타까워하는 애통하는 마음이 뜻 있는 교회와 성도들을 짓누르고 있다.
천주교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개혁 (Reformation)이라고 하지 않고 기형, 변형(Deformation)이라고 비꼬는 것처럼 오늘의 교회는 기형적 불구의 교회로 치닫고 있는 듯한 증세가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한인들의 상권이 밀집해 있는 플러싱 지역, 그 가운데서도 유니온 상가의 경우를 보자 한 건물 안에 교회의 수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밀집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교회의 간판이 과연 어떻게 보일까?
이외에도 현재 뉴욕지역에는 6백여 교회가 있으며 2천여 명의 목사들이 교회개척을 위해 지금 이 시간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마치 교회가 장터로 변하고 있는 듯 한 현상`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한다면 교회의 상업화 혹은 성직자가 교회를 밥벌이하기 위한 장터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한국교회 100주년 종합조사연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지출예산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교회건물관리비 24.2%
△성직자 생활비 38.5%
△교육사업비 16.8%
△상회비 5%
△선교사업비 15.5%
이 조사 결과는 성직자의 생활비가 총예산의 약 4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교회가 성직자들의 구멍가게라는 비난의 소리도 웃어넘길 일 만은 아니다. 또 성직자의 생활수준에 대해서도 많은 일반인들이 ‘사치스럽다’라는 표현을 서슴치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단지 한국뿐이 아니라 미국 교회의 성직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크리스천투데이’의 발표 자료를 보면 1천2백여 교회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직자의 생활비가 교회 총예산의 41%로 나타났다. 결국 성도들이 정성들여 바친 헌금의 40%가 성직자들의 사치스런 생활비로 충당된다는 통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전요섭의 “통계와 숫자로 보는 예화자료집”을 보자 거기에는 성직자의 생활비가 전체 교회예산의 75%를 차지하는 교회도 등장한다. 성도들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바친 헌금의 75%가 성직자의 사치스러운 생활비에 지출된다고 불평하는 교인을 누가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목회자 중에는 타 교회의 부흥강사로 초청 받아 가면서 본 교회로부터 출장비까지 받아 이중수입을 올리는 철면피도 있다고 한다.
목사에게 인색하면 축복 받지 못한다는 교육을 받은 그 교회 회계는 쓴맛을 다시며 수표를 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복음전파, 하나님나라 건설 등의 공동목표를 지향하는 수많은 교회들, 서로 협력하여 사랑과 기쁨으로 양보하고 희생봉사의 정신을 발휘하여 공동목표를 향하여 전진하여야 함이 마땅한데 과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배경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교회들의 모습과 그리고 계단적 배경을 자랑스럽게 내걸은 교회들 과연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며 교단은 어떤 정책으로 그 비좁은 틈에 교회를 설립하였는지 묻고 싶다. 양식 있는 목회자와 양식 있는 교단이라면 분명 행동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죄악사"와 자기 비판
-송태현-
근자에 내가 구독하는 신문에 어떤 책 광고가 여러 차례 실렸다. 그 광고는 나의 시선을 끌었는데,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에 관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주제가 많을 것 같아 인터넷을 통해 책을 주문하여 읽어 나갔다. 이 책의 저자는 팔십 줄에 접어든 조찬선이란 노(老) 목사이다. 그는 한국 교회의 현 상황을 (간략하게) 비판적으로 고찰한 후, 세계사를 통해 저지른 기독교의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콜롬부스의 소위 '신대륙 발견'(아메리카 원주민 입장에서는 '신'대륙도 아니며 '발견'도 아니다), 아홉 차례에 걸친 십자군 봉기, 면죄부, 교황들의 부패한 성(性)생활, 천주교도의 중남미 침략, 중세의 마녀 사냥, 장 칼뱅의 세르베투스 화형(火刑), 청교도들의 아메리카 원주민 정복 등의 사건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악을 범하였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반박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 책은 전문적인 학술 서적이 아니며, 엄격한 학문성이 결여되어 있다. 사실 이 책은 방대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한 사람의 연구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 둘째, 각 사건에 대해 '죄악'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 사건의 전체적인 맥락이 흐려지며, '죄악'의 면모가 과장될 우려가 있다. 가령 칼뱅의 '세르베투스 화형' 사건의 경우, 칼뱅이 형벌 가운데 화형이라는 방법을 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칼뱅은 화형을 피하고자 노력했으나 당대의 관습과 성난 군중들을 제어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 셋째, 선교에 대해서 저자가 취하는 신학적 입장은 종교 다원주의로서, 복음주의 견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 한 비판점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범한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인정하게 만들기에 는 부족함이 없다. '기독교 죄악사'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다.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어내는 일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동일한 오류를 범하기 쉬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남의 죄에는 민감하지만 자신의 죄에는 둔감한 법이다. 오늘날엔 모두가 히틀러와 나치 독일을 비판하지만, 히틀러 당시에 독일 개신 교회는 히틀러를 옹호했음을 기억하자. 일제 때 한국 교회 역시 전(全)교단 적으로 신사참배를 의결하지 않았는가? 해방 후에도 "불신자 대통령을 억지로 조찬기도회에 불러 놓고 서로 경쟁적으로 아첨 떨던" 해프닝들이 반복되지 않았는가?
'지금 여기에서' 진행되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객관화하지 못한다. 그러기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 깊숙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말씀에 비추어 성찰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순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범하는 과오를 누군가가 지적해준다면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히틀러를 옹호했던 독일 교회와 신사 참배를 의결했던 한국 교회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 조찬선 목사는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도 따끔한 비판을 가한다. 그는 교회가 "성직자들의 장사하는 집으로 전락"함과, 그리스도인의 일상화된 위선과, 성직자가 "순종이란 미명하에 맹종을 강요"함과, 신앙을 생활화하는 일에 무관심함과, 자신들의 "세력과 권위와 지위를" 추구하는 타락한 성직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몇 가지 예만 인용해보자.
서울의 어느 빌딩에 교회 간판이 15개나 걸려 있다. 어떤 교회 주일예배에 처음 보는 초신자 가족이 들어왔다. 안내원들이 친절을 베풀고 있을 때 옆 교회의 청년 수 명이 달려와서 그 새 가족을 끌고 가 버렸다. 남달리 정통을 부르짖는 목사의 특명을 받은 청년들이 사전에 남의 교회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그 교회를 찾아온 고객을 자기 교회로 데려간 것이다.
어떤 성직자는 신도 가정에 심방을 가서 차 한 잔을 마실 때도 5분씩이나 긴 기도를 드렸다. 식사 때만 기도하는 줄로 알았던 신도들은 차 마실 때도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속으로 감탄하며 그 성직자 앞에서는 차 마실 때도 긴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그 성직자가 없을 때는 기도하지 않고 마셨다. 그 성직자도 자기 집에서 차를 마실 때는 기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성직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경을 펴 들고 십일조를 강요하며 공갈 협박을 해댄다. 십일조를 안 바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까지 목에 힘주어 협박한다. 이 협박에 넘어간 순진한 신도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십일조를 바치게 된다. 또 창고가 넘치도록 수백 배의 보수를 기대하면서 바치는 신도도 있을 것이다. 지각없는 성직자는 순종이란 미명하에 맹종을 강요하여 정의와 불의를 구별할 수 없는 맹신도, 즉 일종의 정신적 노예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한다.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던 정당이나 정권,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국가 통치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이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부패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타락한 성직자도 타락한 교회에서 제법 목회에 성공할 수 있다. 타락한 목자는 타락한 신도를 양성하여 서로 어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직자가 더러운 정치 운동으로 큰 교회를 담임하여 호사스런 목회를 하다가 갑부가 되어 은퇴하였다고 치자. 그러면 그와 그 교회는 세상의 영리기관 사업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혹자는 교회 비판이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목적인 비판, 비판을 위한 비판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애정이 담긴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지상의 어느 개인, 어느 교회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으로 개혁해 나가야 할 상황에서 비판하지 못하게 입을 막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사단은 비성경적인 요소가 고착화되고 사람들이 거기에 길들여지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 제2의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나는 이것이 도래하지 않기를 기원한다. 비리와 부조리가 더 쌓이고 쌓여 제2의 종교 개혁으로 폭발하기 전에 교회는 지속적으로 갱신해 나가야 한다. "개혁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모토만 해마다 종교 개혁 주간에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중세의 부패한 성직자는 바로 나 자신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종하는 나의 마음, 이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는 나의 마음, 나와 내 가족의 이익을 공동체보다 더 앞세우는 연약함, 때로는 이기적인 욕심을 추구하면서도 '주의 이름'과 '주의 뜻'을 내세우는 나의 어리석음과 뻔뻔스러움, 이런 것들이야말로 개혁의 대상인 것이다. 종교 개혁은 결국 자기 부정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보다 더 사랑하는 '나와 내 가족이라는 우상'의 타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