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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사무엘상 20:18-23절
제 목 : 서로 유익 되게 하려면
지난 2일에 제가 사는 부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70대 노동자 한 분이 2층 계단에서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골반과 머리 등을 크게 다쳤는데, 지금 문제가 되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를 경험한 것입니다. 환자는 사고 현장에서 50킬로미터나 떨어진 병원으로 이송해 갔지만 끝내 수술받지 못하고 사고 4시간 만에 숨졌다고 합니다.
이 사태는 정부와 의사협회 둘 중 누가 더 잘못이 크냐?를 탓하고 책임을 묻기 전에 정부의 존재 이유와 의사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또한 의사는 환자를 위해 존재하고 환자를 치유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의대 정원 확대냐 축소를 놓고 정부와 의사협회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할까요?
저는 본문에서 요나단이 다윗에게 닥친 위험을 어떻게 제거하고 풀어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성경에서 그 해법을 찾으려 합니다.
첫째로, 우리의 말이나 계획은 서로에게 유익된 것이어야 합니다(18-19절).
여러분 내 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또한 내가 머리로 생각해서 고안해 낸 계획은 내 맘대로 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는 이익이 되고, 유익이 될 수 있더라도 타인에게 또는 사회와 국가에는 해가 될 수 있고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성경의 원리를 따라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보다 남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요나단은 자기의 유익보다 다윗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을 잘 살펴야 합니다. 요나단은 평소에 아버지를 잘 살펴서 돌보아 왔습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내일은 초하루 곧 월삭 예배와 축제가 있는 날인데, 다윗의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자기 아버지가 다윗이 왜 식사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자세히 물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한 것은 사울은 자기가 다윗을 죽이려고 라마 나욧까지 추격해서 다윗을 잡으러 갔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식사에 오지 않는 이유를 자세히 묻는다는 것은 요나단이 평소 자기 아버지의 말과 태도를 살펴왔음을 알게 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기 아버지를 진심으로 보살피지 아니했다면 모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나단은 자기가 누구보다 아버지를 잘 살펴왔기 때문에 다윗에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사람이 자리에 있을 때도 잘 살피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자리에 없을 때도 잘 살피는 매우 신중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과 다윗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진짜 죽일 결심을 했는지는 아직 확신이 가지 않지만, 아버지 사울과는 달리 예측이 가능한 인물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변덕이 죽 끓이듯 한 아버지 사울 왕과는 달리 한결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도 요나단이 자기에게 앞으로 닥칠 위험을 어떤 식으로 제거해 줄 것인지, 그 계획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고자 한다면, 한결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변석개처럼 아침에 바꾸고 또 저녁에 고치는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이나 계획은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요나단은 다윗이 숨을 곳과 다윗의 안전을 위해 둘만이 아는 은밀한 일에 관해 말합니다. 본문 19절 말씀에 보시면, 에셀 바위는 사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숨는 장소이지만, 그를 사울 왕에게서 피하여 숨겨주고 계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훗날 다윗은 이러한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하나님은 환난 날 자기의 피난처가 되어주셨음을 시를 지어 노래합니다.
시편 18편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로다.” 아멘.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처럼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은신처를 타인에게 노출하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 아들 요나단은 적이 아니라 동지이며 다윗의 아군이요 든든한 파수꾼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윗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다윗은 요나단에게 자기가 취할 행동을 사전에 고지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요나단의 마음은 혹시 있을 다윗의 신변에 위협이 될만한 위험을 제거해 주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사울 왕의 아들이지만, 사울이 그토록 미워하는 다윗에 안전에 관한 일을 대답하는 것은 자기 아버지의 눈 밖에 날 수도 있고, 자기 아버지가 요나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요나단이 이런 것 저런 것 다 생각하고 계산해서 자기에게 손해가 나는 일이라고 여겼다면, 그가 다윗과 맺은 맹약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요나단은 자기의 유익보다 다윗의 유익을 먼저 구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말이나 계획은 서로에게 유익된 것이어야 합니다.
대통령이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는 것을 두고 인제 와서 정책을 수정하거나 취소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의사들도 지금이라도 전공의들이 응급실에 복귀했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의 말이나 계획이나 정책은 서로에게 유익된 것이어야 합니다. 환자의 생명을 침해하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0장 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 제물인 줄 알고도 지식이 있어서 그것을 먹을 수는 있지만, 이를 보고 제물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한 것처럼 자기를 위하고 남을 구원하는 삶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삶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서로 유익 되게 하려면 지혜로워야 합니다(20-22절)
열정과 패기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보는 사람도 저절로 힘이 납니다. 그러나 열정과 패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무엇도 있어야 합니까?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열심과 열정과 패기로 말하고 일하는 사람과 지혜롭게 말하고 일하는 사람 누구를 더 사람들은 선호할까요? 당연히 지혜롭게 말하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기도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훗날 말과 일에 있어서 지혜롭게 하는 사람을 등용하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자기 아내를 구하는 일에 있어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습니다.
성경은 아비가일을 소개할 때 사무엘상 25장 3절 말씀에 보시면,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여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나발이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죽자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습니다. 이처럼 다윗도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그와 생명 언약을 맺은 요나단도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계획은 어떻게 하는 것이 다윗에게 해가 되지 아니하고 유익 되게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의 목숨을 지켜 내는 데 여러 수단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에서 보듯이 화살을 쏘는 것을 수단으로 삼은 것은 평소 요나단이 과녁을 쏘려 함 같이 바위를 맞추는 것을 훈련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바위를 맞출 수 있음에도 바위 곁을 쏘는 것을 본 병사는 이상하게 여겨서 사울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21절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아이를 통해서 이 일을 수행한 것은 요나단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합니다. 아이는 일반 병사와는 달리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시는 주인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이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아마도 요나단이 평소 화살을 쏘면 화살을 주워오는 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해서 요나단은 사람들의 의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합니다.
그리고 요나단과 다윗만이 아는 은밀한 신호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화살이 쏘는 방향을 달리해서 다윗에게 길한 소식인지 흉한 소식인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는 말은 요나단이 쏘는 화살 방향을 아이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에게 잘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요나단이 얼마나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화살이 네 이쪽에 있다는 것은 다윗의 안전을 보장하는 신호이고, 아이에게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 사울이 다윗의 목숨을 찾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쪽이든지 앞쪽이든지 다윗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요나단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본문 21, 22절 말씀을 보시면, 그는 철저히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며, 자기가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이롭게 하고 있습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 나아가 단체나 조직 또는 사회나 국가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께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이롭게 하는 것은 곧 누구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요나단이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본문 21, 22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를 보내지 아니하고 돌아오게 하여 왕과 국가를 위하는 것도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 사울이 해치려 하는 것을 알고 다윗을 평안히 보내 주는 것은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을 왕 삼으셔서 이스라엘을 크고 강하고 견고한 나라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아닌 타인과 사회와 국가를 이롭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말이나 일을 지혜롭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이라도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화를 내게 말을 하는 사람이 있고, 나쁜 소식이지만 상대를 기분이 나쁘게 하지 않고 화를 내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파송하시면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천 장의 전도지를 전달해 주어도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사람 만나지 않아도 전도지를 전달하지 않아도 전도를 받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바로 지혜롭게 전도하기 때문입니다. 시끄럽게 확성기가 틀어진 곳에 가서 아무리 외쳐본들 듣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인도에는 힌두교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는 수십만의 교인이 모여 예배하는 큰 부흥도 일어나는 교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는 곳에 가서 전도한다면, 전도를 하기도 전에 잡혀서 순교하게 될 것입니다. 순교하는 일은 귀한 일이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지금 정부 의대 정원 늘리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대 정원 2,000명을 막무가내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간을 정해서 단계별로 점차 확대해 가는 것도 방법일 것입니다. 일을 지혜롭게 하는 것이 정부와 의사 환자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셋째로, 그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세상을 이롭게 합니다(23절)
앞 절 본문 21, 22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는 이 두 구절에서 요나단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오, 또한 다윗을 자기 아버지 사울을 피해 무사히 보내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목숨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세운 계획이 누구한테서 나왔다는 것입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본문 23절 말씀을 보시면, 요나단과 다윗 둘 사이에만 주고받았던 말은 설사 요나단이 이를 어기더라도 둘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요나단이 비난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나단이 마음만 잘못 먹으면 둘만 아는 일이기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이 여호와를 증언자로 세운 것은 이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하나님이 주관하여 주시도록, 또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요나단의 신앙이 배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둘 사이에 유한한 약속이 될뻔한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증언자로 세움으로써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약속이 되게 합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사십니다. 사람의 말은 쉽게 변하고 약속 또한 쉽게 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요나단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고 영원히 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를 어기면 여호와께 벌을 받아도 다윗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지혜는 그가 여호와 중심의 신앙을 가졌음과 이러한 말과 행위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에게 지혜를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단의 지혜를 사용하셔서 다윗의 목숨을 지켜 내십니다. 만약, 요나단이 지혜롭지 않게 계획을 세웠다면, 자기가 생명을 다해 사랑한 다윗의 생명을 지켜 내지 못할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생명만 지켜내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은 모두를 멸망으로부터 지켜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십자가의 신비를 알지 못합니다. 위에서부터 주지 아니하시면, 땅에서 난 지혜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는데,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 육신으로부터 난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3장 14장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난 지혜는 남의 유익보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 해서 독한 시기와 다툼과 자랑이 난다고 말합니다. 15절 말씀에서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3장 17절에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절 말씀에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위로부터 난 지혜 곧 하나님의 지혜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사실, 요나단은 할 수만 있으면 자기 아버지 사울과 다윗과의 사이에 화평하는 것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을 평생의 대적으로 삼지 않았지만, 사울은 다릅니다. 다윗을 평생의 대적으로 삼았습니다.
독한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의 지혜는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부리신 악령이 그에게 접한 것처럼, 육신으로부터 난 것이요, 귀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닙니다. 다윗이 이처럼 요나단의 도움을 받아 사울 왕을 피해 도망가려는 것은 사울과 다투지 아니하고 자기 손에 피를 흘리지 아니하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울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이기에 다윗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는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의향이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이 흑심을 품지 아니했음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설사 자기 아버지가 다윗을 원수처럼 여기더라도 자기는 둘 사이를 화평케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는 다윗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고, 다윗에게는 그런 자기 아버지를 이해해 줄 것을 원했을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다윗도 요나단의 그런 마음을 알고 있어서 사울이 진짜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의향을 살펴볼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래도 요나단의 아버지인데, 다윗을 죽일 결심을 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자기는 벼랑 끝에 선 목숨이라고 했지만, 다윗에 관해 자기 아버지 의향이 선한지, 해치려는 마음이 있는지 정말 다윗이 몰라서 요나단에게 부탁했을까요?
번거롭더라도 요나단이 이를 확신할 수 있도록 기다린 것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말을 해보았자,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변호할 것이기 때문에 진짜 자기 아버지의 의향이 어떠한지 살펴서 그때 말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도 참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이나 일에 있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전에 먼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어떤 계획이나 정책을 세울 때도 이렇게 하는 것이 나와 타인 또는 조직과 사회 나아가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인지를, 그래서 국민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의대 정원도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와 의사 환자 모두를 이롭게 하는 정책, 응급실 뺑뺑이가 다시는 재현되지 않도록 차분하고 신중하며 단계적인 정책이 필요할 때입니다. 교회에서 말을 하거나 계획을 세워서 집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교회에 유익이 되는지, 나아가 이 말과 이 일이 하나님을 이롭게 하는 일인지를 깊이 살펴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해운대숨쉬는교회 9월 8일 주일예배. 성경: 사무엘상 20:18-23 (사무엘상강해 53) 서로 유익 되게 하려면|작성자 삶에서 쪄낸 아침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