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정귀수/글무늬문학사랑회
새벽 산책이 끝나가는 오르막길에서 빨라진 호흡을 몰아쉴 때였다. 먼 하늘 끝을 붉게 물들이며 장엄하고 황홀한 여명이 밝아지는 가운데 유난히 커다란 별 하나가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밤하늘 셀 수 없이 많았던 별은 모두 사라지고 홀로 당당히 빛을 내며 떠 있는 강하고 끈질긴 특별한 모습이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한 세월동안 내 처절한 이민 생활 때문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 이른 새벽 어찌하여 갑자기 내게 다가왔을까? 무슨 별일까?
용변 후 물을 내리지 않고 나오는 어머니께 “제발 좀” 이라며 퉁명스레 말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알았어.” 하며 어색한 미소를 보였는데 이제는 내 맘이라는 불편한 감정의 격한 표현이 역력했다. 94세와 74세, 둘 다 체력은 급격히 쇠해가지만 고집스럽고 칼칼한 성격은 변함이 없다. 우리 모자는 달리는 기관차를 위한 두 개의 철로처럼 대립하며 살아왔다. 기관차를 위해서는 늘 군말 없이 타협하고 협력했지만 각자의 일과 목적을 위한 양보는 없었다. 강자의 권한과 약자의 순응만 존재했다. 매 순간 욱해도 오래가지 않는 성향까지 동일했다. 삶의 질과 세대가 달랐던 처와 자식들은 이러한 과격한 표현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번 불편하고 힘들어했다. 나는 자신도 바꾸지 못하면서 상대가 바뀌기를 바라는 미련은 떨지 않았다. 그저 가족의 정과 매일 매일의 아침은 우리에게 삶의 이유였다.
모자에게는 너무도 힘들었던 세상을 함께한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도 표현도 유사한 점이 많았다. 어머니는 수 십 년 전의 경제관념을 유지한 여장부였다. 문제는 최근의 기억은 상실되고 과거 회귀 속도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 중 동일 현상의 반복이 빠르게 늘고 있다.
이상한 점은 자신에게 중요한 일, 예를 들어 하루 네 번 파킨슨 약 복용과 텔레비전 리모트 컨트롤 사용법 등은 갈수록 기억이 없어져서 챙겨드려야 한다. 그러나 수도료 전기료의 절약을 위해 변기 물을 모아 내리거나 어두운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이동전화와 신문 잡지를 보는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실천 중이다. 은행 카드와 신분증이나 오팔 카드는 본인이 챙겨야 하고 혼자 친구를 만나고 쇼핑 간다며 고집을 부린다.
내 삶을 모두 정지시키고 365일 매 순간 어머니를 돌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론의 실천이 어려워서 수많은 스트레스의 중압감에 시달려왔다. 양로원에 이것저것 문의하는 내 모습이 두려웠다. 이제는 필요한 문의와 현장 확인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감당하기 힘든 순간마다 양로원행을 상상으로 연습했다. 어려서부터 우리의 삶에는 항상 선택만 있었다. 최선의 선택을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드디어 작년 3월에 한국인 간호사가 있는 양로원을 찾아 단기 체류를 과감하게 실행했다.
한 달 후 어머니는 양로원을 나오며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하셨다. 차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양로원 거주자들의 초점 잃은 허연 눈망울들을 차창 뒤로 밀어내며 달렸다.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상큼한 바람과 햇살을 온몸으로 받는 자유로움을 어머니 대신 만끽하며 말했다. “어머니 동의 없이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8개월 후 미국과 한국의 40일 여행은 아내만 갔다. 한국인 직원이 있는 양로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Aged care에서 제공하는 양로원이 있다면 한국인 직원의 유무에 관계없이 간병인 휴가 63day/y를 쓰기로 했다. 365일의 17%의 휴식은 호흡이기 때문이다.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만화를 읽으며 눈이 빛나는 소년이 있었다. '엄마 찾아 삼만 리' 그날부터 소년은 주인공처럼 엄마별을 따라가며 무작정 떠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출을 결행했다. 하얀 쌀밥은 설과 추석, 제사에만 먹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집에 왔는데 외삼촌이 하얀 쌀밥을 혼자만 먹는 모습을 보았다. 다음 날 새벽, 나는 신문 팔러 나간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엄마를 찾아가면 하얀 쌀밥을 배불리 먹으며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시가와 친정에 맡기고 메리야스 미싱공과 가정집 식모, 식당 일을 하며 홀로 전전할 때였다. 피눈물로 돈을 벌어서 친정집 8명의 동생과 자식(남매)들의 경제적 책임을 지고 있을 때라고 했다. 첫 가출은 네 번째 전학한 전주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기억한다. 한 달 정도의 가출은 버릇이 되어 전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됐다. 그래도 살아남은 이 기적의 경험으로 이후의 내 삶에 사춘기는 없었다. 먹고사는 숙제만 있었을 뿐이다.
그랬다. 그 당시 어머니는 참담했지만 소년에게는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만날 수 없는,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 상상만 했던 그리움 속의 별이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칼칼한 성격만 힘없이 빛을 내는, 속마음이 훤히 다 보이는 희멀건 별이 되었다. 이제 식사 시간과 하루 네 번 약 먹는 시간, 일주일에 두 번 데이케어 가는 날, 병원 진료, 은행일, 쇼핑 갈 때 만날 수 있는 별, 보고 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별이 방문을 열며 '어머니'하고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