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도 사와키 스님— 사창가, 전쟁, 그리고 좌선
“무엇을 하든, 두 번째로는 반복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 반복될 수 있는 것은 로봇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 삶은 선로 위를 달리지 않는다. 새는 장조나 단조로 노래하지 않는다. 달마의 가르침은 줄이 그어진 종이에 맞춰지지 않는다. 불법은 넓고 끝이 없다. 그것을 붙잡아 고정시키려는 순간, 이미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말린 대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물고기다. 살아 있는 물고기에게는 고정된 형태가 없다.”
— 코도 사와키((沢木 興道, 1880~1965, 일본 조동종 승려)
사람들이 코도 사와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대개는 정돈된 이야기다. 엄격한 老 禪僧, “좌선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말한 사람, 그리고 훗날 “홈리스 코도(자기 절이라는 일정한 곳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던지 찾아가는 스님이라는 뜻에서 집 없는 스님이라 불렸음)”라 불린 인물. 그러나 그런 깔끔한 요약은 그를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사와키는 안락함이나 학문, 세련된 종교 문화 속에서 형성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상실 속에서, 인간적 비참함이 고여 있는 뒷골목에서, 전쟁 속에서, 그리고 생기를 잃어버린 종교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만들어졌다. 그의 선이 날카로운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것은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에서 나왔다.
그는 1880년에 태어났다. 삶을 이해하기도 전에 삶은 이미 그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또 삼 년 뒤에 아버지를 잃었으며, 그를 맡아주던 삼촌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직업 노름꾼과 그 아내—과거 창녀였고 사창가를 관리하던 여인—와 함께 살게 된다. 이것은 잠깐 스쳐간 거친 경험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의 성장 환경이었다. 그는 도박장을 지키고 기생집을 청소해야 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훗날 ‘영적 향수’를 얼마나 혐오했는지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는 향과 범종 소리 속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사람이 도박하고, 팔고, 마시고, 거짓말하며, 스스로를 속이려 애쓰는 그 자리에서 시작했다.
안락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은 禪을 쉽게 낭만화한다. 아름다운 서예, 정갈한 공간, 부드러운 언어, 고귀한 침묵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사와키는 전혀 다른 곳에서 왔다. 그는 일찍이 알았다. 삶은 누구의 이상을 만족시키도록 정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공손한 가면 아래에는 굶주림, 두려움, 허영, 절망, 그리고 순전한 인간적 혼란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훗날 그가 허세를 베어내고, 죽은 종교를 조롱하며, 선을 자기계발의 상품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을 밀쳐냈을 때—그것은 반항적 포즈가 아니라, 가면의 밑바닥을 이미 본 사람의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내면에는 이것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감각이 있었다. 욕망과 생존이 반복되는 음울한 회전목마를 넘어서는 무언가. 아직 젊고 깊이 불행했던 시절, 그는 몰래 근처 선원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곳의 주지가 그를 눈여겨보고 수행으로 이끌었다. 열 여섯 살에 그는 출가의 길을 택했고, 1899년 불교 승려로 수계했다. 이 전환은 중요하다. 그것이 이야기의 구원을 의미해서가 아니라, 그의 길이 이상주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혐오에서, 마찰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주어진 삶에 자신을 내맡길 수 없다는 감각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 전쟁이 닥쳐왔다. 출가 직후 그는 일본군에 징집되어 러일전쟁에 참전했다. 여기서 모든 낭만적 환상은 끝났다. 사와키는 보호된 종교적 울타리에서 또 다른 울타리로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밑바닥에서 전장으로 이동했다. 전쟁은 그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고, 진보·기계·그리고 인간이 스스로의 폭력을 정당화할 때 보이는 오만함에 대한 평생의 불신을 품었다. 그는 사람들이 살육을 마치 집안일처럼 말하는 방식에 대해 혐오를 표했다. 문명의 야만성을 가까이서 본 사람이었다.
군 복무가 끝난 후, 그는 불교로 돌아왔지만, 죽어가는 제도를 유지하는 점잖은 사찰 관리자가 되지는 않았다. 20세기 초 일본의 선불교는, 그의 눈에, 정체되고 반복적이며 의례화 되었고, 장례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 속에서 실제 가르침과 수행의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와키는 그 부패를 분명히 보았고, 맞섰다. 실제 삶과 단절된 불교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그는 평생 좌선을 의례와 반복, 사찰의 안일함 속에서 끌어내려 했다. 그의 말이 지금도 살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불교를 장식하려 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끌어내려 했다.
그래서 “홈리스 코도”라는 이름은 단순한 별명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사찰 경력자로 안착하는 길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그는 일본 전역을 떠돌며 좌선을 가르쳤다. 지위를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어버린 것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는 선이 의례, 제도적 허영, 종교 비즈니스로 축소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무주(無住)’는 결핍이 아니라 자유였다. 그를 하나의 역할로 고정시키지 않는 자유. 깨부수어야 할 바로 그것 안에 안락한 둥지를 틀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이 지점에서 그의 가르침의 어조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고아, 도박장, 사창가, 전쟁, 죽은 종교를 거쳐 나온 사람이 잘 포장된 행복 안내서처럼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이 습관 속에 숨는 모습을 평생 보아온 사람이 향기로운 구호를 내세울 수는 없다. 사와키의 날카로움은 획득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환상을 유지하도록 도와줄 생각이 없었기에 거칠 수 있었다. 그는 위선, 지위, 제도 의존을 경멸했고, 돈이라는 이유만으로 돈을 존중하지 않았다. 가짜 품위에 인내심이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직접적이고, 살아 있으며, 남에게서 빌려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좌선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그의 말은 깊게 찌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어떤 ‘이익’을 기대하며 수행에 온다. 돈이나 명예가 아닐지라도—평온, 정체성, 깨달음, 권위, 혹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더 세련된 자기. 사와키는 그 모든 것을 걷어찼다. 좌선이 가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거래로 만드는 순간 이미 삶과 흥정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반짝이는 약속도, 영적 화장도, 허위의 업그레이드도 없는 수행. 그저 앉고, 그저 살고, 눈앞의 할일을 연기처럼 꾸미지 않고 하는 것. 그것은 일반적인 영성 시장보다 훨씬 엄격하며, 훨씬 정직하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다. 사와키는 사회나 사찰 불교를 바깥에서 비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가 냉소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이거나, 무감각해질 모든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에게서 나온 것은 허무가 아니라 규율이었다. 장식적인 규율도, 도덕적 과시도 아닌—다시 수행으로 돌아가는 단순하고 벌거벗은 삶. 그는 더러움을 알았고, 거짓을 알았으며, 기계를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앉았다. 이것이 그를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는 삶의 추함을 경멸로 도피하는 이유로 삼지 않았다. 그것을 무의미를 베어내는 연료로 삼았다.
그러니 이것은 달콤한 승려 초상이 아니다. 사와키는 인간적 혼란 위에 떠 있는 장식적 성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 속을 통과해버린 사람이었고, 그래서 영적 ‘아름다움’을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존경이 아니라 정직이었다. 영적 연극이 아니라 실제 삶. 사찰의 지위가 아니라 실제 수행. 빌린 지혜가 아니라 접촉. 이미지와 브랜딩, 이데올로기와 자기 과시에 잠긴 오늘의 시대에서 그는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오히려 살아 있는 전류처럼 느껴진다.
196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많은 이들은 그를 근대 일본 선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분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도 여전히 무정하고 직접적이었다. 그의 시신은 의학에 기증되었고, 책은 대학 도서관으로 갔으며, 그는 이미 군인 연금을 사용해서 나온 저작물을 출판해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그는 세속적 의미에서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자기 과시로 꾸며진 영적 유산도 없었다. 다만 선을 장식으로 만들기를 거부한 한 삶의 흔적만이 남았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명확한 표현일 것이다. 코도 사와키는 선을 더 아름답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속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창가와 전쟁, 죽은 종교의 냄새 속에서 나온 그는 그것을 향으로 덮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대량생산도, 제도화도, 미화도 할 수 없는 한 가지로 계속 돌아갔다. 살아 있는 수행! 그래서 그는 여전히 중요하다. 또 하나의 존경할 승려이기 때문이 아니라—멀리서 감탄하는 안락함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땅으로 끌어내린다. 바로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코도 사와키는 1965년 12월 21일, 安泰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저것을 보아라. 자연은 참으로 장엄하다.
나는 평생 동안, 내가 굴복할 수 있고 진심으로 경탄할 수 있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鷹峯三山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코도, 코도’ 하고 부르고 있다.”
코도 사와키의 삶이 주는 교훈: “삶을 이용하지 말고, 삶을 살아라.”
수행을 이용하지 말라. 불교를 이용하지 말라. 자신을 꾸미는 도구로 모든 것을 쓰지 말라.
“있는 그대로의 삶에서 도망치지 말라.”
더럽고 혼란스럽고 불완전한 그 자리에서 → 그대로 앉고, 그대로 살아라.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그것은 ‘살아 있는 행위’입니까, 아니면 역할만 반복할 뿐입니까?